[re]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14세손 보정(普停) 김정회(金正會) (1903~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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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11 20:56 조회1,218회 댓글0건본문
우리의 전통제례 매안제(埋安祭)
우리의 문화적 전통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통하여 이해될 때 보다 깊은 의미와 근원적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민족 정신사 속에서 유교는 하나의 근원으로 오늘까지 면면히 내려온 중심 축으로서 역할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존의 긍지가 뿌리내림으로서 온갖 역경을 뚫고 나가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 원동력은 효(孝)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유교는 신앙이 아니고 실천위주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일가족 살해 암매장 사건은 인륜의 타락이 어느 선까지 이르렀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사건에서 존속살인 이라는 패륜은 말할 것도 없으며 현대인의 잔인성마저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의 선영에 대한 제례(祭禮)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일지라도 좀 더 인륜을 생각하는 그 자세가 새로워져야겠고 오늘 우리 모습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지난 8월 22일 고향에서 세교(世交)해 오는 한 선배 댁의 제례에 참관한 일이 있다. 그 날의 제례는 우리의 주변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 제례의 명칭조차 모르는 경우가 되어 버렸지만 이른바 유가(儒家)에서 행에 오는 길제(吉祭)와 매안제(埋安祭)가 그것이다. 옛날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선영을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고조이하 아버지까지 4대를 제사하게 되고 가묘가 있는 집안은 4대를 가묘에 신주로 모시고 봉제사(奉祭祀)해 왔다. 그리고 5대조부터는 묘전(墓前)에서 제를 지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의식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문명에 밀리면서 경제생활에 급급한 나머지 인륜은 차츰 희박해 가고 제사 역시 합제(合祭) 아니면 편리할 때로 따르고 부모의 장례까지도 소홀히 하는 세태다. 또한 가묘, 즉 사당이 있는 가정도 요즈음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한국전쟁때 소실된 경우도 있고 그 후 폐한 곳도 많기 때문이다. 가묘를 모시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상기(喪期)가 끝나면 그 부모가 사당에 입묘(사당에 들어가심)해야 하기 때문에 5대조는 출묘하여 산소 옆에 매안(埋安)하게 되는데 이 제례가 매안제로 사당의 봉사자였던 아버지가 입묘함에 따라 이제 봉사지가 본인으로 바꿔지기 때문에 봉사지가 된 본인으로서는 사당의 선영 앞에 이제 부모의 상기를 끝내고 석고(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묘하게 됨을 고하고 또한 신주에 대해 개제(改題)하게 됨을 고하는 제례가 바로 길제다. 이러한 제례가 전북 고창읍 도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안동 김씨 가문인 김경식박사댁(현, 한국교원대학원과 전주대에서 교육사상 강의)에서 행해 졌다. 그는 보정(普停) 김정회(金正會)1)선생의 장손이며 그 댁(宅)은 금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댁 사당에는 당시 5대조인 만수 김영철(晩睡 金榮喆)2), 고조 학묵(學黙), 증조 재종(在鐘), 조고 정회(正會)의 내외분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다. 이제 김박사가 선친의 탈상을 끝내고 선친이 사당에 들어가심에 앞서 만수공 영철의 신주께서 세대가 변하여 사당을 떠나가야 됨으로 이에 애통한 마음 무한하나 전례(典禮)에 따라 매안하게 된다는 독축으로 시작해서 행사가 끝나고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어 임시로 한 쪽에 정중히 모셨다. 다음 김박사의 보고, 증조, 고조의 신주를 향하여 이제 선친을 사당에 모신다는 것 그리고 봉사자가 바뀜에 따라 신주의 개제가 있게 된다는 것을 독축하고 각 신주에 대한 개제를 봉사자인 김박사가 정중히 행하여 다시 모셔졌다. 제례가 끝난 후 여러 후손들이 아침식사를 마친 후 5대조인 만수공 내외분의 신주를 정중히 모시고 사당을 나와 그 분의 정사(精舍)인 만수당에 잠깐 유하시다가 묘소에 가서 그 옆에 매안하였다. 그 날 행사의 절차와 모습을 대략 적었는데 필자로서는 처음 참관한 것이었고 비록 사라져간 우리의 전통 제례였으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제례 후 김박사로부터 그 소감을 들었다. “뵙지도 못한 5대조이나 사당을 떠나시고 매안하게 되는 게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옛 전통을 그대로 고수한다거나 사치스럽게 효도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제 봉사지가 되었으니 선고(先考)를 이어 그저 직분을 하는데 까지 다하려 노력하겠다. 요즈음은 인륜에 대한 의식이 자꾸만 희박해져 가는데 인륜 그것은 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선영에 대한 인식도 전통을 지킨다거나 효도한다거나 또 종교적인 이유 그 차원을 떠나 우선 쉽게 나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선영에 대한 흠모의 정을 배제할 수가 없다“ 숙연한 자라였다. 가족제도가 핵가족으로 바뀌고 있고 또 산업의 물결에 따라 세태가 변해 간다해도 가정, 그 곳은 어느 땐가 우리의 선조가 설정한 이 후 존속의 과정으로 지금까지 확대되면서 존속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륜과 선영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김박사 그는 이 시대의 선비다. 가장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며 효의 정신은 가르치는 일과 함께 늘 그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효를 중심으로 현대의 상황 속에서 재창조된다면 그것은 인간 긍정의 인도적 사상으로 열어 줄 것이요, 또한 여기에 장래가 있어 우리 역사의 미래적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당 뒤편의 울창한 대나무 숲과 고목이된 동백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한결 시원스러웠다. 1) 서울 經學院출신으로 成均館 司成을 지냈다. 1931년부터 해강 김규진문하에서 서예를 사사 받고 38년 全日本文藝展覽會에서 입선, 40년 전일본국전에서 風竹으로 1등 당선한 서예가로 사군자에 능하였다. 2) 성균관원생, 한일 의병을 일으키려고 松沙 奇宇萬선생과 밀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송사 행장에 기록된 숨겨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次子 純黙은 최익현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그 분의 倡義를 돕게 하였다. 문화저널 1993. 1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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