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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시민 김시민장군 교서 되찾아오기 모금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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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5-26 08:34 조회1,2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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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진주(晋州) 정신
1592년 10월 왜군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인근에서 싸우던 병사(兵使) 유숭인이 전투에 패해 혼자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려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상급자인 유숭인을 돌려세웠다. “전투를 앞두고 주장(主將)을 바꾸면 지휘체계가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말을 돌린 유숭인은 결국 전사했다. 그러나 의병장 곽재우는“이로써 진주성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진주 사람의 복이다”라고 했다.

▶왜군은 곡창 호남으로 가는 길목 진주성을 무너뜨리려 3만 대군을 보냈다. 김시민은 병력이 3800명뿐이었지만 왜군 조총을 본떠 총통 170자루를 만들고 화약 150근을 구웠다. 넉넉히 대비한 덕에 화약을 짚에 싸 성밖으로 던져댔다. 1주일 공방 끝에 적은 물러났다. 학봉 김성일은“늙고 약한 남녀들도 돌을 굴리고 불을 던져 성안에 기와나 돌, 지붕 이엉이 다 없어졌다”며 진주 백성의 기개에 찬탄했다. 노량·행주와 함께 임란 3대첩에 드는 진주성대첩이다.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병 총탄에 숨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패전을 두고두고 수치로 여겼다. “다시 진주를 공격해 전날의 분함을 씻으라.”이듬해 왜군이 10만 군사를 몰아 진주성을 포위하자 늙은 기생이 김시민 없음을 탄식했다. “전에는 장졸이 서로 사랑하고 호령이 한결같아 이겼으나 지금은 병졸이 장군과 익숙지 못하다.”며칠 만에 성이 함락됐다. 왜군은 민·관 7만명을 살육했다.

▶선조는 1604년 김시민을 선무(宣武) 2등공신에 올리고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이 교서가 일제 때 일본인 학자에게 넘어갔다가 작년 말 도쿄 경매시장에서 고서적상에게 1200만엔에 낙찰되면서 모처럼 소재를 드러냈다. 진주정신의 상징 김시민 공신교서를 그대로 둘 진주 사람들이 아니다. 시민단체들이 모금운동을 벌이고 민속예술단체들도 모금공연에 나서 교서를 되사오기로 했다.

▶진주 사람들이 매년 10월 개천예술제로 진주성싸움을 기린 지 60년이 다 돼간다. ‘이기주소 이기주소/ 우리 군사 이기주소/죽여주소 죽여주소/ 왜놈들을 죽여주소’(쾌지나 칭칭나네). 노인 아이 없이 돌을 던지며 고향을 지켜낸 진주 사람들의 호국혼은 구전 민요에까지 담겨 내려온다. 충절(忠節)의 고장,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 진주의 곧은 얼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김시민 교서의 얄궂은 운명을 종내 바로잡으리라 믿는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입력 : 2006.05.25 23:29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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