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안동김씨 상고사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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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27 18:16 조회1,325회 댓글0건본문
<안동시청 홈>
풍산읍 ◎ 계평리(桂坪里)
낙동강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된 계평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와평리, 상계곡리, 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계곡리의 계(桂) 자와 와평리의 평(平) 자를 취하여 계평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의 현황은 욋들, 살머리, 웃절, 엄실 마을 등 4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96가구에 285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욋들
한자 표기로는 와평(瓦平)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마을을 개척한 후 가마를 만들어 기와를 굽던 곳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에 와서는 욋들로 부른다. 회곡리의 아랫절과 경계를 이룬 곳으로 마을의 북서쪽에 계평못이 있어 계평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 계평들:욋들 마을 앞에 형성된 들이다.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퇴적지이다. 들판 위로 중앙고속도로의 풍산대교가 지나며 강 건너 낙암정(洛巖亭)과 상락대의 절경이 또렷이 보인다.---
▶ 웃절·상계곡(上桂谷)
살머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편에 상계사(上桂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상계곡 또는 웃절이라 이름지었다. 막곡리와 경계되는 지점에 대덕사(大德寺)가 있다.
풍산읍 ◎ 막곡리(幕谷里)
막곡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래 서선면에 속하였다. 청성산이 남쪽을 가로막아 막실, 막곡, 두곡, 두곡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탄곡리와 서후면의 교동 일부를 병합하여 막곡이라 하고 풍산읍에 편입되었다.
청성산(靑城山)은 성산(星山), 청산(靑山),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영가지에 따르면 "용산(龍山:서후면 교리 뒷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은 청(靑)과 성(城) 두 자를 합하여 청성산이라 이름하였다. 김학봉(金鶴峯)의 석문정사(石門精舍)와 권송암(權松巖)의 연어헌(鳶魚軒)이 있다. 송암기(松巖記)에 말하기를, --- 산에는 적송봉(赤松峯), 대학봉(對鶴峯), 상진암(上眞巖), 적홍암(赤虹巖), 목단암(牧丹巖), 계수대(桂樹臺), 취소대(吹簫臺), 구하대(鷗下臺), 세이천(洗耳泉), 한송단(寒松壇)이 있다."고 적고 있다.
막곡 1리는 웃막실과 아랫막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곡 2리는 미름미, 방갓골, 청석골, 주상골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막곡(幕谷)
막곡, 두곡(杜谷), 두곡촌이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안동의 합전교(안동시 송현동)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를 할 때에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이 마을에서 진을 쳤는데 이때에 커다란 막을 쳐서 주둔하였다고 한다. 막을 친 골짜기가 장관이었는데 이 때부터 막곡이라 불렀다.
◇ 웃막실:마을을 위, 아래로 나누었을 때 위에 있다고 해서 웃막실 또는 윗막실이라고도 한다. 송암선생을 모시고 있는 청성서원이 이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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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당골:아랫막실의 서쪽 청성산 기슭에 있다. 예전에 절(성산사)이 있어서 불당골이라 이름했다.
◇ 석문(石門):청성산에 있는 큰 바위문이다. 위에 석문정이 있는데 이 정자로 나아가려면 석문을 거쳐야 한다.
◇ 쉰골(오십곡):아랫막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풋굿재:아랫막실의 서쪽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기암절벽 위에 있는 고개이다. 막실에서 회곡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7월 백중 이곳에서 주로 풋굿을 한다고 해서 풋굿재라 한다.
▶ 청성서원(靑城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송암 권호문(權好文,1532∼1587)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어 매년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
선조 41년(1608)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에 창건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다가 영조 43년(1767)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 이 서원은 안동사 편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용만(龍巒) 권기(權紀,1545∼1624) 선생이 편찬한 영가지 한 본을 당초 청성서원에 갈무리 하였다. 1791년 귀와(龜窩) 김굉(1739∼1816)이 서원의 원장이 되어 향중의 여러 선비를 초청하여 영가지를 교정하고 한 부를 정서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목판본이 간행될 수 있도록 한 결정적인 모임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석문정사(石門精舍)
학봉 김성일 선생의 정자로 선조 20년(1587)에 건립하였다. 학봉은 청성산 중턱에 이 정자를 짓고 칠백리 낙동강 맑은 물과 자연의 경관을 벗하며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력하였고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의 연원을 계승하였다. 석문이란 정사 서쪽에 큰 바위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데 골짜기가 휑하니 비어 마치 문과 같다고 해서 석문이라 이름지었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졸루정(拙陋亭)
영가지를 편찬한 용만 권기의 정자이다. 용만이 지은 졸루정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아들인 괄(适)이 나무 기둥 넷을 꽂아서 한 칸 집을 지었다. ---
▶ 연어헌(鳶魚軒)
송암 권호문이 자연과 벗하며 거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건물은 청성산 아래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연어헌 위에는 청성산 중턱에 학봉의 석문정이 있다. 두 분은 청성산을 나누어 가지며 평생을 자연과 벗삼으며 학문에 전념할 것을 기약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현판은 신재 주세붕의 글씨라고 전한다.
송암은 30세 되던 명종 16년(1561)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여러 번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내 사양하고 청성산 기슭에 이 건물을 짓고 유연자적 하였다. 스승 퇴계가 이곳을 찾아 처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송암에게 내려준 시와 산옹이라 자호한 송암 자신의 시판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송암은 퇴계의 처사적인 삶을 가장 잘 실천한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퇴계의 문하에서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기만 했어도 단번에 급제할 분이 세 사람이 있는데 그 세 사람은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매암 이숙량, 송암 권호문이다고 할만큼 선생의 학문은 뛰어났다.
서후면 ◎ 금계리(金溪里)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
영가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전기에 금계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는 흥해 배씨와 안동 권씨였다면 조선 중·후기에는 의성 김씨인 학봉의 후손들이다. 학봉은 임하 천전에서 청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금계로 이주하였다. 학봉은 이 금계에서 실제 살았던 기간은 불과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안동지역 학문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 500년 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 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여 천년불패지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 같다 하여 금지라 불렀다.
◇ 학봉종택(鶴峯宗宅, 風雷軒):학봉선생의 종택---
◇ 소계서당(邵溪書堂):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강학지소이다. 선생은 학봉의 11대 종손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퇴계학의 적전을 이었고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 경광(鏡光)
금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광서원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에 오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선생이 정국의 문란함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공조전서를 지낸 계씨(季氏) 상공(尙恭)공과 함께 안동으로 낙향하였는데 전서공은 풍천면 하회리에 정착하고 선생은 금계촌에 우거(寓居)하였다.
선생은 집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나타내고 당호를 백죽당이라 하였다.
서후면 ◎ 교리(校里)
교리는 송야천을 경계로 하여 안동시 노하동과 마주하고 있다. 시내에서 솟밤다리를 건너 봉정사로 향하는 지방도로와 연접한 마을로 남쪽으로는 풍산읍 막곡리와 경계하고 있다.
교리라는 지명은 안동의 옛 지명인 복주 때에 이 지역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향교골 또는 행겟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리와 대석동을 병합하여 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새마을, 평촌, 한석골, 시묘골, 운곡 등 5개 마을에 98세대 29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권기(權紀) 선생의 효
선생은 조선 명종 때(1545년) 지금의 풍산읍 송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는 안동의 서남을 맡아 싸워 큰공을 세웠으며 그 후 안동의 유래, 산천, 인물, 고사 등을 정리하여 완성한 영가지(永嘉誌)를 저술하여 우리 고장 안동의 선비정신의 맥을 잇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 향교골
고려 때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 예의판서를 지낸 권인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마련된 송파재사가 이곳에 있으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종택과 정자인 관물당(觀物堂)이 있다.
권인 선생에 의해 이곳의 지명이 소야(所夜, 솟밤)에서 송파(松坡)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하는데 이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를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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