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에 얽힌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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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30 08:52 조회1,782회 댓글1건본문
상계동 · 중계동과 남양주군 별내면과의 경계에 불암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은 한천(漢川)을 끼고 넓은 들을 이루고 있는 마들평야 동쪽에 있으며 서쪽에는 북한산, 북쪽에는 수락산이 이웃하고 있어 더욱 운치를 느끼게 한다.
불암산 최고봉의 표고는 507m로서 봉(峰) 그 자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하나의 거암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봉우리는 암석이면서도 정교한 형형색색의 기이한 모양과 수백 수십척의 절벽, 바위틈에서 자란 기송과 괴목은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봄에는 철쭉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산 전체가 거대한 화원을 만들고 있다. 계곡 깊은 곳에는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산의 정취를 더해 주고 딱다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는 정답게만 들려온다.
불암산은 일명 필암산이라고도 하여 먹골(묵동) 벼루말(연촌) 등의 지명과 함께 필 · 묵 · 연으로 지기를 꺾는 풍수지명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불암산폭포를 비롯해서 불암사 · 석천암 · 불암굴 · 학도암 등이 있으며, 서쪽 기슭에는 정암사 · 약소암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불암산의 대표적인 절로는 행정구역상 남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 해당되는 불암사를 들 수 있다. 수림이 우거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암사는 창건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 지증대사(智證大師)가 개산(開山)하고 불암사라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지증대사(지선, 824∼882)의 생몰년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효공왕 1년(897)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했으며, 조선 태종 때(1400년경) 무학대사가 중수하고, 정조 6년(1782)에 서악화상(瑞岳和尙)이 보광명전 ·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는 다른 곳에서 옮겨다 지었다. 그 뒤 1910년에 풍천임씨가 독성각 · 산신각 · 동축당을 창건한데 이어 1959년에 만허화상이 칠성각을 창건하였다.
불암사 뒷편에는 불암봉이 우뚝 솟아 있고 봉우리 밑 폭포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수 많은 물줄기를 이루어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이라는 옛 시인의 시구를 연상케 한다. 옛부터 서울 근교에 동쪽엔 불암사, 서쪽엔 진관사, 남쪽엔 삼막사, 북쪽엔 승가사 등이 손꼽혀 왔다.
불암사에는「불암사경판」과 보물로 지정된「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을 비롯해서「불암사중수기」「불암사범종록」등이 전해진다.
<불암산에 얽힌 설화>
서울의 동북편에 있는 불암산이 원래는 금강산에 있었던 산이라고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데 한양에는 남산이 없어서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을 금강산에 있던 불암산이 듣고 자기가 가서 한양의 남산이 되고 싶었다.
금강산에서 떠나서 걸어 왔는데 오다가 지금 불안산이 있는 데까지 와서 보니까 벌써 한양에는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불암산은 더 가서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어서 금강산으로 되돌아 갈 작정으로 뒤돌아섰다. 그런데 한 번 떠난 금강산에 되돌아 갈 수 없다 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그래서 불암산은 지금 보는 것과 같이 서울을 등지고 있다.
<불암산성>
불암산성은 고구려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진왜란 때 양주 목사 고언백 장군이 개축하여 왜군을 네차례나 물리친 자랑스러운 유적지입니다.
<불암산성의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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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재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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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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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자유로 휴게소 옆에 있는 심학산(원래는 송악에 있었다고함)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