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대 감찰어사, 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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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6-21 20:12 조회1,337회 댓글0건본문
■ 감찰어사 [監察御史]
고려시대 어사대(御史臺)의 종6품 관직.
정원은 10명으로 문(文)과 이(吏) 각 5명을 두었다. 995년(성종 14) 국초의 사헌대(司憲臺)를 어사대로 개편하면서 두었다가 1014년(현종 5)에 금오대(金吾臺)로 개편할 때 폐지하였으며, 1015년 사헌대의 감찰사헌(監察司憲)으로 고쳤다가 1023년 어사대의 감찰어사로 복구하였으며, 1045년(성종 11) 권지감찰어사를 각문지후(閣門祗候) 위에 두었고, 문종 때에 품계와 정원을 정하였다. 1275년 이후 감찰사(監察史) ·감찰내사(監察內史) ·감찰어사 ·규정(糾正:종6품) 등으로 그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원래 어사대는 정치의 적절함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을 담당했던 관청인데, 감찰어사는 다른 관원들과 달리 정치를 논하는 대신 감찰방(監察房)에 따로 거하면서 관원에 대한 규찰과 제사 및 조회와 전곡(錢穀)의 출납 등을 감찰하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 어사대 [御史臺]
고려시대 때 정치의 잘잘못을 논의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맡은 관청.
국초에 설치한 사헌대(司憲臺)를 995년(성종 14)에 개편한 것이다. 1014년(현종 5)에 김훈(金訓) 등이 무신난을 일으키자 금오대(金吾臺)로 고쳤다가 그 뒤 어사대 ·사헌대로 바꾸었고, 1023년에 다시 어사대로 개칭하였다.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하여 판사(判事) 1명, 대부(大夫:정3품) 1명, 지사(知事) 1명, 중승(中丞:종4품) 1명, 잡단(雜端:종5품) 1명, 시어사(侍御史:종5품) 2명,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정6품) 2명,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 10명(文 ·吏 각 5명)을 두고, 이속(吏屬)은 녹사(錄事) 3명, 영사(令史) 4명, 서령사(書令史) 6명, 계사(計史) 1명, 지반(知班) 2명, 기관(記官) 6명, 산사(算士) 1명, 기사(記事) 10명, 소유(所由) 50명을 두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압력으로 감찰사(監察司)로 개편하면서 대부는 제헌(提憲), 중승은 시승(侍丞), 시어사는 시사(侍史), 감찰어사는 감찰사(監察史)로 고치고 판사 ·지사 ·잡단 ·전중시어사는 그대로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 사헌부(司憲府)로 고치고 대부(종2품) 1명, 중승(종3품) 2명, 내시사(內侍史:종5품) 2명, 전중내시사(殿中內侍史:정6품) 2명, 감찰내사(監察內史:종6품) 6명, 주부(注簿:정7품) 1명을 두고 판사와 지사, 잡단은 폐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하자 감찰사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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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하여 간쟁과 봉박(封駁), 서경(署經)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불체포 ·불가범(不加犯) 등의 특권이 있었으며, 청요직으로 인식되어 선발 자격도 매우 엄격하여 대체로 과거출신의 문신 관료들로 충원되었다.
■ 풍저창 [豊儲倉]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사용하는 미곡을 관장하던 곳.
1308년(충렬왕 34) 우창(右倉)을 이 이름으로 고쳐 사(使:정5품) ·부사(副使:정6품) ·승(丞:정7품) 각 1명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이들 관원의 품계를 1등급씩 강등하고 주부(注簿:종8품)를 새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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