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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생질 김원수를 개성부 서관으로 보내면서- 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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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6-24 19:32 조회1,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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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 [兪泓, 1524~1594]

본관 기계(杞溪). 자 지숙(止叔). 호 송당(松塘). 시호 충목(忠穆). 판서 유여림(兪汝霖)의 손자로, 1549년(명종 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주서(注書)·전적(典籍)·지평(持平)·장령(掌令)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63년 명종대 후반에 정국을 주도하던 권신(權臣) 이량(李樑)을 탄핵하였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도제조로 발탁되었다. 이후에 호조참의·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쳤으며,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명나라의 오해를 풀리게 하고 돌아왔다.


1589년 의금부판사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에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 왕비를 호종하여 해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10여조의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가 그의 시를 보고 직접 화운(和韻)하기도 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가장(家藏)한 책이 만여 권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황정욱(黃廷彧)·홍성민(洪聖民) 등과 함께 정철(鄭澈)의 세력을 의지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장유(張維)가 비명(碑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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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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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토유적임을 알리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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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 신도비(검단산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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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 신도비의 김탁(金琢) 자점(自點)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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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 신도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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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목사(忠穆祠)

유홍 신도비(兪泓神道碑)

위 치 : 하남시 상산곡동
연 대 : 순조 13년(1813)
크 기 : 전체 높이 284cm, 비신 167cm, 폭 60cm, 두께 54cm
찬 서 전 : 장유 찬, 유한지 전·서

<신도비 내용 중...>

贈貞敬夫人後夫人金氏署令光烈之女仁惠善撫諸子閨門之內無閒言李夫人有三男一女長曰大述沃川郡守次曰大建大司諫次曰大進工曹參議女適金琢縣監金夫人有一男一女男曰大逸今爲三陟府使女適金集某官側室男曰大造主簿大述男曰憲曾志曾懿曾懋曾大建男曰纘曾大進男曰哲曾大逸男曰伯曾今爲慶尙道觀察使金琢男曰自點靖 社元勳今爲漢城府判尹都元帥內外曾玄不盡記銘曰

정경부인을 추증하였다. 다음 부인 김씨는 서령(署令) 광열(光烈)의 따님인데 어질고 착하여 자녀를 잘 가르치니 집안에 잡음이 없었다. 이씨 부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대술(大述)은 옥천군수, 둘째 대건(大建)은 대사간, 셋째 대진(大進)은 공조참의이고, 딸은 현감 김탁(金琢)에게 출가하였다. 김씨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대일(大逸)은 현재 삼척부사이고 딸은 모관(某官) 깁집(金集)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난 아들은 대조(大造)인데, 주부(主簿)이다. 대술의 아들은 헌증(憲曾)·지증(志曾)·의증(懿曾)·무증(懋曾)이고, 대건의 아들은 찬증(纘曾)이며, 대진의 아들은 철증(哲曾)이다. 대일의 아들은 백증(伯曾)인데 지금 경상도 관찰사이다. 김탁의 아들은 자점(自點)인데, 정사원훈(靖社元勳)으로 현재 한성부 판윤 도원수이다. 내외의 증손·현손은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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