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학봉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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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7-26 15:51 조회1,186회 댓글0건본문
김성일(金誠一)1 1538(중종 33)∼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출신. 아버지는 진(璡)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貂#구A4〕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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