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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문집의 학봉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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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8-21 20:04 조회1,1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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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됐던 <하담문집>(2001. 10. 간. 김익수 역, 김항용 편집. 35P)의 부계기문에 나오는 학봉 김성일의 일본 사신행과 관련한 하담선조님의 글입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동지(同知) 황윤길(黃允吉)등을 좇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굴함이 없는 꿋꿋한 태도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일이 없었다. 회답의 글을 받는 일이나 여러 가지 논의(論議)에 다 힘껏 다투어 바로잡으니, 동행(同行)은 목을 움츠리고 적인(敵人)은 경탄(敬歎) 하였다. 목숨을 바치어 힘쓴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방(四方)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말을 가지고 일컫는 것에 이르러서는 나는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저 전대(專對-사신이 외국에 가서 독단(獨斷)으로 자유롭게 응답함)라는 것은 어찌 요행(僥倖)이나 절목(節目)의 일을 가리킨 것이겠는가?

  학봉이 이미 돌아오니 상이 적인(敵人)의 정상을 물었다. 윤길 등은 다 적이 침입(侵入)해 올 조짐이 있다고 말하니, 학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항언(抗言)하여 여러 천 마디의 말로 깊이 윤길 등을 공격하고, 스스로 자세히 적정(賊情)을 살폈다고 말하였다. 다음해에 적이 전 국력을 기울여 가지고 입구(入寇)하여 종묘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民生)이 어육(魚肉)이 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병화(兵禍)의 참혹함이 옛날로부터 임진년과 같은 것은 없었다. 그가 요령을 얻지 못함은 이와 같다. 이것을 전대(專對)라고 말하여 되겠는가? 만약 한고조(漢高祖)의 때를 만났다면 전사십배(前使十輩)의 베임1) 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주1. 전사십배(前使十輩)의 베임 : 한(漢)나라 고제(高帝) 7년에 흉노(匈奴)를 치고자 하여 사자(使者) 10인을 흉노에 보내었다. 장사(壯士)와 살찐 우마(牛馬)는 다 숨기고 노약(老弱)과 수척한 마소만을 보이게 하였다. 10인의 사자가 돌아와서 다 “흉노는 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제가 다시 유경(劉敬)을 시켜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돌아와 복명하기를 ”흉노가 좋은 것을 보이지 않고 단소(短所)만을 내보이니 반드시 복병(伏兵)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됩니다.“하였다. 그러나 고제가 듣지 않고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의 길에 올랐다. 평성(平城)에 이르러 과연 적의 기병(奇兵)에 포위되어 겨우 살아 돌아왔다. 고제는 드디어 먼저 사자로 보냈던 10인을 죄다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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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보아 유원지의 요구를 받은 하담선조님(휘 時讓)의 아드님인 사휴제공(휘 徽) 선조님은 원문을 수정하여 재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자료 단서를 제공해 주신 태영아저씨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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