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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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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9-06 09:07 조회1,367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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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종친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제학공(휘 익달)의 22대손(23세손) 항용(통일항렬자-植자 항렬)입니다. 본 홈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학공파 후손들의 집성지는 대표적으로 2곳입니다. 즉 괴산과 병천입니다. 괴산에는 제학공파의 세칭 5갑파(충갑, 효갑(절손), 우갑, 제갑, 인갑)의 후손들이 고루 살고 있고, 천안의 병천에는 구암공(휘 충갑)의 후손이신 충무공(휘 시민) 후손과 교관공(휘 시진) 후손 여러분들이 가전리 인근에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병천에서 청주 방향에 있는 복다회리에는 5갑조의 조부이신 참판공(휘 언묵)의 형님이신 도사공(언홍) 계열과 그 위 상대에서 나뉜 참판공(휘 중염) 계열의 일가분들이 살고 계십니다.

 병천지역에는 상기대부님(전 대종회 상조회장님 형님)께서 문중 종약소장을 맡으셨다가 작년부터는 천응대부님이 맡고 계십니다. 그리고 원로이신 창규아저씨, 상옥대부님, 태진아저씨들이 계시고, 현재 남응대부님께서 문중종사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괴산이 고향이고 5갑 선조님의 막내이신 비안공(휘 인갑) 선조님의 후손(15대손, 16세손)입니다. 대영종친님이 구응선조님의 증손이라면 제게는  조카뻘이 되십니다.

 그런데 대영님의 세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충렬공의 27대손(28세손)

   2. 제학공의 23대손(24세손)

   3. 충무공의 15대손(16세손)

 안동김씨 전체를 대상으로 자신을 말할 때는 몇가지로 구분해서 소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즉 자신의 파를 소개할 때는 <안동김씨 제학공파로서 제학공 23대손(24세손)>, <충무공(휘 시민)의 15대(16세)손>이라 소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반가운 일가분을 만나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곳에서라도 자주 만나길 빕니다. 병천의 일가 중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본 홈에 참여하실 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아울러 구응선조님의 훌륭하신 업적이 그동안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빛나게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대영종친님같은 분이 계셔서 자꾸 갈고 닦을 때 비로소 빛이 납니다.

 님이 주신 자료는 본 홈 제학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좀더 많은 자료(문헌적 자료, 실물 유적 자료, 각종 사진 자료, 전언 자료) 등을 정리하여 이곳에 올려 주십시오. 곧 본 홈에 실어 만인에게 알리겠습니다.

 이제부터 구응선조님은 대영님으로 인하여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계속적인 만남과 본 홈의 귀한 참여자가 되시길 빕니다.

 연락을 바랍니다. 전화 : 011-892-5273.   이메일 : khy5278@chollian.net

 

 

댓글목록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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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항용님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아버님 형제분들도 식자 돌림을 쓰시는 지라 아저씨라고 불러드려야 맞을거 같네요. 그리고 저희집은 일제시대 일경의 탄압을 피해서 여기저기를 떠 돌았던터라. 현재 큰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은 서울에 살고 계시고 저희집은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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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태자 로자 쓰시던 할아버님께서 6.25때 돌아가시면서 더더욱 집안과의 고리가 끊어져 버려서 현재 천안에 5촌 당숙 아저씨들이 계시는 것 빼고는 집안 어른들과 연락할 방도가 없어져 버려서 증조부님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것이 미진하게 되었습니다.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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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6.25때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경위도 억울해서 이때까지 떳떳하게 얘기 할 수도 없었던 이유도 한가지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셨던 할아버님께서는 미군도 일본에 이은 새로운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하셨기 때문에 당시로는 보기드물게 영어를 잘 하셨지만 미군에 협조하지 않고 약간 좌익 운동에 몸을 담으셨다가 6.25전란중에 빨갱이로 몰려서 잡혀가시고는 그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버리셨습니다.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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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할아버님이 영어를 잘하게 되신 이유는 일경의 눈을 피해 영국인 선교사를 따라서 일본에 가셔서 생활하셨던데에 있는거 같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일본에서 태어나시는 바람에 식자 돌림의 이름을 쓰시지 않고 일제시대 지은 등자 왜자 이름을 쓰고 계십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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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훌륭한 독립운동가의 후예에 대한 예우가 아직도 미흡합니다.
친일파재산환수법이 발효하였으니 그 재원은 반드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기리고
빛내는데 모두 쓰여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거 바라고 독립운동하신건 아니지만, 후손들이 그후에 받은 고통은 말 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일제시대에는 더욱 그랬고, 해방후에도 친일세럭에 의한 입김이 많이
남아 있었지요.  이제는 제대로 대우 받고 평가 받는 세상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물론 후손들에 대한 예우도 소흘히 해서는 안 되구오.  우리나라 같이 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박해서야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겠습니까?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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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요즈음 젊은이들의 조국사랑이 얿다느니 하면서 탓하지만, 이는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를 곰곰히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앞으로 애국하신분드러에 대한 평가와 예우가 제대로 되어야 또 애국자가
계속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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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아 참 위에 할아버님이 좌익운동에 몸담으셨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일제시대 순경이었던 자들이 독립 이후에까지 제 허물을 덮느라 조작해서 할아버님을 잡아간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항용아저씨께서 말씀하신 증조부님 독립운동관련 자료는 제 힘 닫는데까지 모아서 올려드리겠습니다.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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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솔내님 반갑습니다. 제가 글 쓰는 도중에 글을 올리셔서 미쳐 인사를 못 드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