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 외갓댁 고모댁 (27)한확 신도비명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09-25 20:39 조회1,881회 댓글0건

본문

 양절한공신도비명(襄節韓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서원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西原府院君) 증시양절(贈諡襄節) 한공신도비명(韓公神道碑銘)과 서(序) …… 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 …… 가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찬하고,…… 가 글과 전액을 쓰다.

홍치(弘治) 7년 갑인(甲寅)년 여름 4월 신미일에 임금께서 신하인 세겸(世謙)을 불러 전하여 이르되, 양절공(襄節公)이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까지 묘비(墓碑)가 없다.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께서 이를 서운하게 생각하시고 서릉군(西陵君) 한치례(韓致禮)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고 일의 규모와 계획을 지시하되 국가의 재력을 소비하지 말고 자손들은 문중(門中)에서 자금을 모으도록 하였다. 석공을 고용하여 돌을 다듬어서 비석은 마련되었으나, 비문이 없으면 부지런히 뚜렷하게 새겨서 후세를 밝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로서 외가를 공경하게 받들어 섬기어 대비의 의사에 승복하려는 것이다. 그대가 비명을 쓰라 하시니 신이 명을 받고 황송하여 글이 짧다고 사양하고 피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생각건대, 공의 세계(世系)는 가보(家譜)에 있고 공의 훈덕은 국사에 기록되었으므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다시 거론할 바 없으나 신도비를 빛나게 꾸며서 세인의 이목에 비치도록 하려면 마땅히 비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의 성은 한(韓)이고, 휘는 확(確), 자는 자유(子柔)이고 청주인이다. 원조(遠祖)의 휘는 난(蘭)으로 고려 때에 태조를 보좌한 공훈으로 삼한공신에 책봉되었고, 그 후로 명신의 대를 이어왔다. 7대조의 휘는 강(康)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과 충렬왕을 섬기어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찬성사의 손자의 휘는 악(渥)으로 충선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임금에게 다가오는 불의의 화를 용감하게 막아낸 공으로 삼한삼중(三韓三重)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책봉되고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사숙공의 아들 휘는 방신(方信)으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이니 공민왕 때 삼원수와 더불어 홍건적을 대파하고 서울을 수복한 공로로 일등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책봉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 령(寧)은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병조판서로 증직을 받았고 부친은 영정(永 )으로 순창군사(淳昌郡事) 지냈고 영의정부사에 증직되었다. 모친인 정경부인 김씨는 좌명공신승령부사(佐命功臣承寧府事) 양소공(襄昭公) 영렬(英烈)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모두 덕용(德容)이 뛰어나서 명나라 황실의 간택에 선발되어 첫째딸은 태종 문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고려 왕비에 책봉되었고 황후가 죽은 후에는 중궁의 일을 전담하였다. 둘째딸은 선종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영락(永樂) 무술(戊戌)년에 황제가 공을 불러 한번 보고 그 풍채와 예의가 뛰어나서 대우가 특별히 융숭하였고 봉의대부(奉議大夫)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하고 그 조서에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직위 중에 광록이 가장 중한 것은 덕행이 뛰어나게 현저한 자가 아니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고 친척이나 친구 중에 특별히 뛰어난 자가 아니면 관직에 현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니 이 어찌 명예와 직위의 영광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특별한 은총으로 발탁하는 대우인 것이다. 한확은 돈후한 천품(天稟)에 성실한 의지를 가졌으며 두드러지게 재능이 뛰어나고 어질었다. 실제로 내척(內戚)은 되는 사람만이 특별히 이 자리에 제수한다 하였다. 더욱 조심성 있고 근면하여 은총으로 내려주는 명을 공경하며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서만 보더라도 공의 덕량(德量)은 이미 황제의 중심에 화합하여 다른 외척들로서 이에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때에 우리나라 태종께서 보위를 세종에게 물려주면서 사신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청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꺼이 윤허하고 공으로써 정사(正使)를 삼고 광록시승 유천(劉泉)으로 부사(副使)를 삼아 칙명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고 와서 국왕을 책봉하도록 하였다. 책명을 내리던 날 황제가 친히 정전에 납시고 문무백관이 열을 지어 시위(侍衛)하는 자리에서 공이 홀(笏)을 바로잡고 책명을 받을 때 행동거지가 찬찬하고 의젓하였으므로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고 우리 조정에서 맞이하여 받아들일 때의 예의범절에 있어서도 보다 더 근엄하고 신중하게 봉행하였다. 대체로 국왕을 책봉하는 일은 큰 행사이다. 중국 조정의 우수한 시종 중에서 선발하지 아니하고 특별히 공에게 하명한 것은 황제의 마음 속에 신임하는 바가 두터웠다. 공이 이미 어린시절에 중요한 자리에 오르고 또 번거로운 절차와 예의를 받들고 돌아오니 온나라 백성들이 모두 늠름한 풍채를 우러러보았다. 유천은 일을 마치자 바로 서울로 돌아가고 공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에도 황제의 소명으로 여러 번 황도(皇都:명나라 수도)에 갔었으며 인종의 딸로 사위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연로하신 어머니의 곁을 떠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를 사절하니 황제는 이를 옳게 여겨 중지하였다. 세종은 공이 중요한 직책을 맡길 수 있는 인격임을 알고 선덕(宣德) 을묘(乙卯)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제수하였다. 정통(正統) 기미(己未:1439)에 한성부사로 천거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전후를 통틀어서 제일가는 치적을 올렸다. 일시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중추원사로 소명을 받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었다. 다음해 경신(庚申) 가을에 병조판서로 전임하였다. 갑자기 북쪽 국경지대를 지키는데 공이 아니면 적당한 인재가 없다 하여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대신들과 시비를 논쟁하다가 처음 판단한 것을 굽히지 않고 그만두었다. 계해(癸亥)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가 한성부윤으로 천거되었다. 갑자(甲子)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을묘(乙卯)에 지중추원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가 얼마 있지 않아 이조판서로 전임하였다. 오랫동안 문무직을 선발하여 임용하는 데 인재를 전형하는 방법이 공정하므로 감히 이론하는 자가 없었다. 병인(丙寅)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되고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이 공을 불러 면전에서 말하기를, "지금 평안도에 민정이 시들고 피폐해서 경이 아니면 가히 무마시킬 사람이 없어서 경에게 잠시 외직을 맡긴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판윤에 제수하고 평안도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게 되어 문무직책을 한몸에 겹치게 되었다. 공이 성심으로 직무를 닦아서 조정에서는 서도(潟)의 걱정을 없게 되었고 군인과 백성들이 기근에서 구제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서도사람들이 추앙하고 부모 같이 여겼다.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임신(壬申)에 의정부에 들어가서 좌찬성이 되었다. 그 시기에 어린 임금(단종)이 즉위하게 되니 정사가 권력 있는 간신들에게 넘어가서 국정이 날로 그릇되고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공의 엄정한 태도와 고상한 언사는 혼자 뛰어난 입장에서 간악을 막는 데 방파제와 같았으므로 누구나 모두 믿고 존중히 여겼다. 세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공은 충직하고 현량한 신하로 일찍이 국가대사에 몸을 바쳐 분투함을 알았고, 국가의 위란을 당하여 이를 평정할 때에 공이 도와준 공로가 많아서 일등공신이 되었다. 계유(癸酉)에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를 주고 이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영경연사서성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領經筵事西城府院君)으로 발탁하였다. 세조가 처음 대란을 평정하고 영의정부사의 소관인 내외 대소사무를 모두 쥐고 있었는데 공을 불러들어서 의정부 내에 함께 있었으니 그 임무의 의존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을해(乙亥)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공이 의정부에 있을 때 대체로 몸가짐과 사물을 대하는 데 한결같이 엄정히 하고 시비를 논의할 사건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단호히 처단하였다. 성질이 본래 인자하여 죄수를 재판할 때는 언제나 관대하고 너그럽게 해주었다. 일찍이 부좌(府佐)에게 이르기를, "죄가 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잘못 된 것이니, 만약 확실한 증거가 없는 재판은 간절하게 훈계하고 거듭거듭 타일러서 살려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등극하자 보좌하고 도움을 준 공적으로 공훈에 기록하고 또 동덕좌익공신의 호를 하사하고 서성부원군을 서원부원군으로 고쳐서 책봉하였다. 병자(丙子) 여름에 명황제가 태감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직첩과 관복을 하사하고 임금이 공으로 사은사를 삼고 호조판서 권준(權 )으로 부사를 삼고 편전으로 불러보고 말하기를, "경이 돌아올 때에는 내가 성문 밖에까지 영접을 나가서 그대와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리라."라고 하였다. 공은 사양하여 이르기를, "신이 늙고 쇠약해서 다시 돌아와 임금을 뵐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진실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마침내 경사에 가는데 모진 바람과 추위에 시달린 까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주 사하역 여사(旅舍)에서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마침 질환이 위독하자 부사가 여러 수행관속을 데리고 문병을 하고 유언을 청하였으나 공은 부사의 손을 잡고 한마디 사사로운 말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세조는 공의 병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의복과 약품을 보내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임금이 부고 소식을 듣고 너무나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보내어 영구(靈柩)를 맞게 하고 부의금을 후하게 하사하며 도승지 한명회에게 명하여 장지를 마련해주게 하고 호상을 맡아보게 하였다. 정축년을 지난 다음해 정월 계유일에 광주 치동 두척리 조곡산 임좌병향 자리에 예장하고 양절(襄節)의 시호를 제수하였다. 부인은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묘소는 양주 소라산에 있다. 공의 영구가 지나오는 광녕, 요양 등지에서 거리마다 집집마다 제물을 올리며 모두 애도의 뜻을 다하였다. 모두가 한정승이 돌아갔다고 탄식하였고 비록 마부나 아이들까지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천성이 명민하고 엄격하고 공정무사하였으며 비록 부귀가 더할 나위 없지마는 내몸을 낮추어 더욱 겸손하였고 대인관계나 사물처리가 평탄하였고 사건을 처리하는 데는 단연코 과감하였으므로 이를 함부로 막지 못하였다. 가정에서도 항상 청렴결백하여 이익을 취하는 사업은 하지 않았으며 친구 사이에는 후하게 대하였고 친척간에도 화목하였다. 동생 전( )과 절(石失)이 모두 일찍 죽어서 어린 조카들을 양육하는 데 나의 소생 자식과 조금도 차등이 없었다. 오호라, 공은 몸가짐이나 집안일이나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하여 근무함이 하나 하나가 다 옛사람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이 가신지 15년이 되는 경인(庚寅)에 조정의 첨의로써 세조 묘정에 배향케 되었으나 살아서는 능히 국가에 충절을 극진히 하였고, 죽어서도 능히 종묘의 향사를 같이 받게 되니 군신의 의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름이 없는 것도 또한 높이 자랑할 만하였다. 부인의 성은 홍씨로 남양부부인에 책봉되었으니 바로 남양군 길민(吉旼)의 손녀이고 이조판서 문량공(文良公) 여방(汝方)의 딸이다. 부인은 3남 6녀를 낳았으니 첫째아들 치인(致仁)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 서성군(西城君)이고, 둘째아들 치의(致義)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청양군(淸陽君)이고 셋째아들 치례(致禮) 무과에 급제하여 숭정대부 판돈령부사 겸 지훈련원사오위도총부도총관(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莩摠管) 서릉군이니 모두 순성좌리공신이다. 첫째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계령(李繼寧)에게 시집을 갔고 다음은 왕자 계양군(桂陽君) 증( )에게 시집을 가서 군부인에 책봉되었고 다음은 현령 김자완(金自 ), 다음은 동지중추부사 최정(崔 ), 다음은 사직 권집(權輯)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인수왕대비는 여섯째딸이다. 측실에서 6남을 두었다. 왕대비께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전하(성종)가 둘째아들이고, 첫째아들은 월산대군 정( )이다. 딸은 명숙공주이다. 월산대군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이 없고 부실에서 1남을 두었다. 명숙공주는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에게 시집을 가서 1남을 두었다. 치인은 중추원사 조서안(趙瑞安)의 딸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고, 치의는 군사(郡事) 이항전(李恒全)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치례는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계령(繼寧)은 자녀가 없고 계양군은 3남 3녀, 자완은 3남 1녀, 최정은 2남 2녀, 권집은 3남 1녀를 낳아 길렀다. 내외손 몇 명까지는 비석 후면에 기록해둔다. 놀랍도다! 적선(積善)한 가문에 경사가 있다는 옛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이에 이르러 돈독하고 후한 성질을 받아서 성녀를 탄생하여 국모가 되시어 왕자를 탄생하여 양육하시니 삼한땅에 우리 조선 억만 년의 무강한 왕업을 공고히 다져 놓았다. 이것이 모두 천우신조로 공에게 내려주신 홍복에 연유함이 아닌가. 왕비의 높으신 덕으로 궁중 내외에 감도는 화기와 왕자 왕손에까지 미치는 상서로운 왕실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 감히 이런저런 버릇없는 말로 늘어 놓을 필요가 없다. 옛날에 태임태사(太姙太 )가 주나라의 국모가 되고 마(馬)·등(鄧) 양씨가 한나라를 중흥한 일들이 모두가 국왕의 선대가 덕을 많이 쌓은 대가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니 그 유래로 전해 내려오는 까닭이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 항상 양절공을 사모하는 것이 어찌 공연한 헛된 생각인가. 전일의 위대한 업적을 선양하여 대비의 거룩하신 근본을 밝히고자 하는 두터운 효성이 무위로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삼가 제배를 드리고 머리를 쪼아리며 이 명(銘)을 쓴다.

 장하도다, 양절공은 신령의 화신이오.

주나라의 신후(申候), 여백(呂伯)같은 뛰어난 사람일세

시조께서 덕을 길러 후손에게 전해주니 위인(偉人)명사인 경대부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고

임금에게 닥친 화를 궁지에서 막아내었고 적의 대군을 섬멸하여 국난을 극복하였다.

공적이 뛰어나서 훈작을 하사받았고, 빛나는 이 문중에 정조(鼎俎)가 있을 것인가.

공의 선대에 이르러서 더욱더욱 광명이 떨쳐 있으며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영광을 누렸도다.

명나라에 들어가니 명황제가 귀하게 여겨 광록소경(光祿少卿)의 높은 벼슬로 발탁하여 제수받았고

임금이 책봉하는 명나라의 칙사로서 은총이 두터우신 분부를 친히 받고

칙서를 받들고서 본국으로 돌아올 때 사모관대에 큰 홀(笏)을 하사받았으며

그 인격과 학문, 재능 등을 인정하여 후대하였다. 헌헌(軒軒)한 기분으로 반갑게 발탁했네

큰 뜻을 같이하여 난정을 바로잡았으며 음악이 조화되니 사막에도 꽃이 피네.

세조를 보좌하여 등극케 하셨으니 산과 강에 맹세하고 심신을 다받쳤네.

재상에 올라서는 음양 이기(理氣)를 조절하고 내외직을 맡는 대로 모든 문물을 어기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마땅히 천수를 누리실 줄 든든히 믿었더니 하늘님도 어찌하여 살펴보지 못하였나.

어진 어른이 죽으니 누구든지 슬퍼하리라. 그 명성은 썩지 않고 영원토록 전하리라.

경사스러움이 무궁하여 성녀를 낳으시니 성자신손 탄육하여 하늘의 순서를 이어가오.

자손이 번성하여 천만억을 헤아리고 천만년을 하루같이 우리 성스런 업적을 다지셨네.

광주의 높은 언덕에 저 산줄기의 상서로운 기운이 영롱한데

여기모신 공의 산소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네.

우뚝 솟은 저 비석에 글솜씨는 부족하나 천지신명이 보우하사 오래오래 전하소서.

 

 음기

서성군(西城君) 치인(致仁)의 첫째아들은 공조참판 한( )이고, 둘째아들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찬( )이며, 셋째아들은 참판(參判) 건(健)이며, 넷째아들은 사도관정(司導官正) 종(倧)이며, …… 가운데 영보(永保)는 …… 형조정랑(刑曹正郞) 이승원(李承元)에게 시집을 갔다. 청양군(淸陽君) 치의(致義)의 첫째아들은 사복시(司僕寺) 위(偉)이고, 둘째아들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탁(倬)이며, 첫째딸은 광흥군(廣興君) 봉사(奉事)박번(朴蕃)에게 시집을 갔다. 서릉군(西陵君) 치례(致禮)의 아들은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한 익(翊)이며, 첫째딸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이문식(李文植)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딸은 조양정(兆陽正) 창(暢)에게 시집을 갔다. 계양군(桂陽君) 증( )의 첫째아들은 영원군(寧原君) 풍( )이고, 둘째아들은 강양군(江陽君) 숙(潚)이며, 셋째아들은 부림군(富林君) 식(湜)이다. 첫째딸은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안계송(安繼宋)에게, 둘째딸은 대사헌 정경조(鄭敬祖)에게, 셋째딸은 인 (仁 ) 한금(韓 )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김자완(金自 )의 첫째아들은 적 (迪 ) 윤강(允剛)이며, 둘째아들은 승지(承旨) 윤정(允精)이며, 셋째아들은 사과(司果) 윤경(允勁)이며, 딸은 순창군수(淳昌郡守) 유철손(柳哲孫)에게 시집을 갔다. 최정(崔挺)의 첫째아들은 현감(縣監) 경손(敬孫)이며, 둘째아들은 부솔(副率) 경동(敬童)이며, 첫째딸은 현하부정(懸河副正) 신(愼)에게, 둘째딸은 진사 유담수(柳聃壽)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권집(權輯)의 첫째아들은 호군(護軍) 침( )이며, 둘째아들은 현령(縣令) 회(懷)이며, 셋째아들은 현령 돈(惇)이며, 딸은 선전관(宣傳官) 이사(李 )에게 시집을 갔다. 측실에서 태어난 첫째아들은 사직(司直) 류산(榴山)이며, 둘째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유산(柚山)이며, 셋째아들은 어모장군 감산(柑山)이며, 넷째아들은 사정(司正) 시산(枾山)이고, 다섯째아들은 어모장군 이산(梨山)이며, 여섯째아들은 사과(司果) 도산(桃山)이다. 한은 6남 3녀의 자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사헌부감찰 세보(世 )이고, 둘째아들은 겸선전관 세우(世佑)이며, 셋째아들은 소격서참봉(昭格署 奉) 세임(世任)이며, 넷째아들은 승환부위(承 副尉) 세준(世俊)이고, 다섯째아들은 장사랑(將仕郞) 계금(繼金)이며, 여섯째아들은 세륜(世倫)이다. 첫째딸은 봉사 권기(權琦)에게, 둘째딸은 생원 신영홍(申永洪)에게, 셋째딸은 유학 윤합 (尹合 )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찬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참봉 선섭(宣燮)에게 시집을 갔다. 건은 5남 3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세걸(世傑)이고, 둘째아들은 장사랑 세 (世 )이며, 셋째아들은 세신(世信), 넷째아들은 세전(世佺), 다섯째아들은 세복(世復)이며, 첫째딸은 겸사복(兼司僕) 홍이석(洪利碩)에게, 둘째딸은 종사랑(從仕郞) 윤 령(尹 齡)에게 각각 시집을 갔으며, 셋째딸은 어리다. 유지(有智)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장사랑 명( 明)이며, 둘째아들은 장사랑 중명(仲明)이고, 첫째딸은 환성군(歡城君) 징(澄)에게, 둘째딸은 장사랑 홍섬(洪暹)에게, 셋째딸은 첨정(僉正) 이수공(李守恭)에게, 넷째딸은 생원 남포(南褒)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영보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장사랑 준( )이고, 둘째아들은 장사랑 적(摘)이고, 셋째아들은 장사랑 정(挺)이며, 첫째딸은 충순위(忠順衛) 구수(具壽)에게, 둘째딸은 참봉 민구(閔球), 셋째딸은 종사랑(從仕郞) 송이(宋貳)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승원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인(仁), 둘째아들은 걸(傑)이며, 두 딸은 모두 어리다. 위(偉)는 4남을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수선(守善), 둘째아들은 수충(守忠), 셋째아들은 수신(守信), 넷째아들은 수도(守道)이다. 탁(倬)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수정(守貞), 둘째아들은 수검(守儉), 셋째아들은 수공(守恭)이며, 세 딸은 모두 어리다. 번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자관(自寬), 둘째아들은 자온(自溫), 셋째아들은 자공(自恭), 넷째아들은 자근(自謹)이며, 두 딸은 모두 어리다. 익(翊)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사맹(司猛) 세창(世昌)이고, 둘째아들은 효력부위(效力副尉) 숙창(叔昌)이다. 문식(文植)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헌(憲), 둘째아들은 , 셋째아들은 현(懸)이며, 딸은 어리다. 조양(兆陽)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강양은 측실(側室)에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홍( ), 둘째아들은 함( ), 셋째아들은 보(輔)이며, 첫째딸은 진사 정소종(鄭紹宗)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부림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회안부정(淮安副正) 식(軾)이며, 둘째아들은 도안부정(道安副正) 철(轍)이며, 딸은 진사 채윤권(蔡胤權)에게 시집을 갔다. 계송(繼宋)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광수(光 ), 둘째아들은 광범(光範), 셋째아들은 광렬(光烈), 넷째아들은 광윤(光胤)이며, 첫째딸은 승환부위(承 副尉) 이문량(李文樑)에게 시집을 갔으며, 둘째 딸은 어리다. 경조(敬祖)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승섭(承攝)이고, 둘째아들은 승우(承祐)이다. 금( )은 3남 4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형준(亨俊)이고, 둘째아들은 형걸(亨傑), 셋째아들은 어리며, 첫째딸은 유학 이덕박(李德薄)에게 시집을 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윤강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장사랑 응적(應 )이다. 윤정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창(壽昌)이며, 첫째딸은 내금위(內禁衛) 홍이명(洪以明)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윤경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수기(壽起)이며, 둘째아들은 수담(壽聃), 셋째아들은 수려(壽麗)이고, 딸은 어리다. 철손(哲孫)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종사랑 함(涵)이고, 둘째아들은 엄(淹)이며, 딸은 어리다. 경손(敬孫)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과( )이며, 둘째아들은 환( ), 셋째아들은 봉( )이며, 딸은 어리다. 경동(敬童)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영( ), 둘째아들은 연(漣)이고, 두 딸은 모두 어리다. 침( )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아들은 흠(欽), 둘째아들은 추(錘), 셋째아들은 유( )이고, 첫째딸은 생원 왕담(王曇)에게 시집을 갔으며, 둘째딸은 전력부위(展力副尉) 이인수(李麟壽)에게 시집을 갔다. 회(懷)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월산(月山)의 아들은 덕풍군(德豊君) 이고, 당양(唐陽)의 아들은 부정(副正) 백경(伯慶)이다. 홍치 8년(1495) 8월 일에 미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