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 외갓댁 고모댁(29)천하명당 김번 묘비명(김로 글씨)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10-11 12:25 조회1,198회 댓글0건

본문

조선국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행통훈대부 평양부서윤 겸 춘추관편수관 김공 묘갈명과 서문

내 친구 승지 김영(金瑛)은 영가(永嘉)인인데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의 막내 동생 번은 재능과 덕행이 승지공과 짝할 만 했다. 처음 회시를 보러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육기와 융운이 낙양에 들어온 것과 같아서 당시 무리들이 모두 그 명망을 흠모하였다. 그 때 나 희보는 성균관에 있으면서 복(僕) 형제와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다. 그 후 10년 뒤 내가 직제학으로 부(府)의 좌관(左官)이 되었을 때 승지공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복은 새로 급제하여 조정의 명을 받고 부모님을 뵈러 갔다. 내가 두 사람을 따라 풍산 삼구정(豊山三龜亭) 위에서 대부인을 뵙고 차례로 장수를 비는 잔을 올리자 마치 3형제와 같았다. 이때부터 정분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로부터 30년 뒤 내가 부친상을 당해 쇠약해져 병으로 서울의 집에 누워 있다가 복의 부음을 들었다. 가정(嘉靖) 23년 갑진년(중종 39) 겨울이었다.
이듬해 을사년 후사를 이은 생해(生海)가 복을 양주 도혈리(楊州陶穴里)에 장사지냈는데, 모두 복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생해가 장례를 마친 지 몇 달 후 복의 가첩을 적어 상복을 입은 채 상장을 짚고 와서 예를 다하여 간곡하게 비명을 청했다. 내 나이 이미 80이 넘었고 우환으로 정신과 뜻이 혼몽하여 필력이 막혔는데 어떻게 차마 벗의 묘명을 쓰겠는가? 그러나 죽은 복의 선조의 덕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모두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쇠약하고 병든 나뿐이니 내가 어떻게 차마 묘명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의 빛나는 덕과 아름다운 행적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진 것은 생략하여 기록하지 않고, 오직 눈과 귀에 익은 것만 가지고 말한다.
복의 효성과 우애는 가정에서 드러나고 신의는 향당을 적셔 뛰어난 행적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고, 작은 기쁨을 사양했으므로 선비들이 다투어 따랐다. 자신은 청렴하되 남에게는 후하고, 옛 것에 독실하면서도 지금의 것에 거슬리지 않았다. 이것이 그 사람의 대강이다.
나이 6,7세가 되기 전에 학문은 대의를 통하고 능히 문장을 지었고 무오년에(연산군 4년)는 진사과에 합격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친상을 당했는데 그 뒤로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고향마을에서 대부인을 봉양하며 효도를 극진히 했다. 대부인이 거처하는 당에 음식을 올리고 따뜻한지 시원한지 묻고 주방에 들어가 맛과 간을 옛사람처럼 맞췄다. 대부인이 일찍이 훈계한 적이 있다. “세 가지 희생과 즐비한 솥단지로 봉양하는 것이 한번 이름을 날려 현양하는 것만 못하다. 너는 왜 과거에 급제하여 선조의 영령들이 지하에서 기뻐하도록 하지 않는냐?” 복은 훈계를 듣고 난 뒤 분발하여 침식을 잊고 드디어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정덕(正德) 계유년(중종 8년) 문과 갑과에 올라 처음에 군자감직장에 제수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했다. 때마침 가뭄과 병충해의 피해를 북도지방이 더욱 심하게 입어 혼찰(昏札)이 잇달았다. 조정에서는 남쪽의 곡식을 배로 운반하여 북쪽의 백성을 살려야 했다. 그러나 물길이 3천여 리이고 파도는 산처럼 솟아 하늘을 차니 배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십중팔구였으므로 전운사로 적당한 인물을 얻지 못하면 양곡만 없애고 실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선을 잘하고 중망이 있는 대신을 전운사로 선발하고, 종사관은 전운사보다 더 신중히 선택했다. 조정에서 복을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조에서는 신진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겨 널리 사람을 구했다. 그러나 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등용하게 되었다. 복은 처음으로 중책을 맡았으므로 기대를 저버릴까 크게 두려워 밤낮 걱정했는데, 일을 나누고 처리하는 것이 모두 유탁지(劉度支)의 해운에 따라 실행했다. 아무리 자주 왕복하더라도 진과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전혀 침몰하지 않고 온전히 한 것이 셀 수 없었으므로 복의 현명함과 능력이 이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병조와 예조의 좌랑을 거쳐 경기도사에 승진하여 노모를 편안하게 봉양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세 번 전직한 뒤 공조의 정랑이 되어 복의 명망은 바야흐로 혁혁하고 날로 융성해졌다. 다만 복의 천성이 뻣뻣해서 굽히고 바라보는 것에 능해 시세에 순응할 줄 몰랐으므로 곧바로 출척을 당해 안음현감이 되었다. 이것은 난새와 봉황을 군색하게 만들어 가시나무에 서식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유감으로 생각했으나 복은 편안히 여기고 개의치 않았다.
부임한 뒤 맨 먼저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세력 있는 아전은 억제하고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면서도 미치지 못한 것이 있을까 걱정했다. 그렇게 하니 몇 달 새에 교화가 크게 행해져 도적이 도망가고 간악한 풍습이 고쳐지게 되어 전에 복을 헐뜯던 사람들도 도리어 칭송하게 되었다. 1년이 못 되어 상을 당해 떠나가게 되자 현민들이 부모를 잃은 것처럼 길을 막고 울었다.
당시 평양부서윤이 자리가 비었는데 적임자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평양부는 서관(西關)을 담당하는 관서로 압록강은 중국과 경계이고 적유령(狄踰嶺)은 말갈과 연접해 있어 명나라로 가는 사신이 연달았고 관소를 관장하는 장수가 끊이지 않았다. 계미년(중종 18년) 서쪽을 변방을 진압한 때부터 전염병이 도내에 돌아 일대가 도륙 난 것처럼 시체가 쌓였다. 서울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재능으로 직접 국사를 바로 잡을 사람이 아니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왕왕 견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은 자원해서 부임했는데 춘추관의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 정성을 다해 생각을 극진히 하여 첫 번째로 둔전책을 세워 힘써 농업과 잠업을 권면했다. 우선 백성들의 먹을 것을 충실히 한 다음, 창고를 채우는 것 외에는 이름 없는 군역세를 모조리 없애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집집마다 노랫소리가 높았다. 그 나머지로 술과 고기를 몽땅 준비해 가난한 사람들과 군인들을 먹이자 노래와 풍악을 울리며 밤이 되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고로 평양부윤으로서 능히 사신 등을 잘 접대하는 경우는 백성들을 벗기게 되어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복은 빈약한 관소를 풍족하게 하면서도 백성을 수척하게 하지 않고, 부세를 증액하지 않으면서도 재정이 항상 넉넉해 귀신이 베풀고 공급하는 것과 같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렇게 정사를 잘 한 지 5년이 지나 복의 현명함과 재능이 조정에 보고되었으므로 장차 포상을 내리고 발탁하려고 했는데 불행히도 근심과 수고가 골수에 사무쳐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수레에 실려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20년 뒤 사망했다.
복은 병이 다소 뜸하면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한 뒤 천권이 되는 책을 서가에 꽂아놓고 누워 읽으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생일과 같은 좋은 날이면 친척과 이웃을 초청하여 술과 안주를 베풀어 즐기며 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갑진년 겨울에 중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면서 억지로 고기를 먹지 않다가 병이 재발하여 일어나지 못했다. 복은 처음에 어머니의 훈계를 받고 야인 생활을 거두고 관직에 발을 내딛었다가 국가의 부음을 듣고 충성심이 분발하여 지하로 돌아갔으므로 가히 충효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조정에서는 커다란 재능이 있으면서고 복이 크게 쓰이지 못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한가한 관직을 주어 녹을 받으면서 일생을 마치게 했는데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복은 기해년(성종 10년)에 태어나 갑진년에 사망하여 향년 66세였다.
복의 선대에 선평(宣平)은 고려 태조를 섬겨 큰 공을 세웠으므로 지금까지 사(杜)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고, 후손은 안동에 대대로 거주해 왔다. 증대부 삼근(三近)은 비안현감이었고 조부 계권(係權)은 한성판윤이었으며, 부친 영수(永銖)는 사헌부장령이었다. 어머니 김씨는 현령 박(博)의 딸이고 명주군왕(溟州郡王)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복의 배필은 홍씨(洪氏)로 사직서령 걸(傑)의 딸이고 가계는 남양의 귀족에서 나왔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생해(生海)는 장례원사의로 이름을 날렸고 딸은 종부시첨정 겸 춘추관편수관 김의정(金義貞)에게 출가했다.
생해는 왕자 경명군(景明君)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대효(大孝), 달효(達孝), 극효(克孝) 3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사위인 첨정은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은 농(農)이고 딸들은 다 선비의 처가 되었으며, 증손주도 몇 있다.
복은 경륜의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베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혜택을 입지 못한 채 병상에서 웅크리고 주저앉아 세상을 마쳤다. 이것은 진나라의 치태위와 천년을 건너 궤를 같이 한 것으로 군자들은 애석해 했다. 명왈(銘曰),

신근한 백년의 공 병으로 꺾이고,
당당한 낭묘의 그릇 낭리로 끝났네.
하늘도 애석해 하여 아들이 이었다.
당대에 받지 못했으니 죽지 않았네.
그윽하고 안온한 이름 영원히 전하리.

가정(嘉靖) 25년(1546년) 병오년 9월 일
통정대부 전성균관대사성 안분당 이희보(李希輔) 지음.
군자정 김로(金魯) 글씨.
숭정(崇禎)기원후 83년(1710년) 9월 세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