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외갓댁 고모댁 (32)심달원 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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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16 11:54 조회1,246회 댓글0건본문
증 가선대부 이조참파 겸 동지경연사 홍문관 제학 심공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전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 소세양은 글을 짓고,
가선대부 전주부윤 전주진 병마절제사 아들 전은 글을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다.
심씨는 청송인으로 대대로 의관거족(문벌이 좋은 큰 가문)이 되었다. 고려 때 휘 용은 문하시중이었고 휘 덕부는 청성백에 봉해졌고 아조(조선)에 와서도 정승으로 백에 봉해졌다. 아들 온은 영의정부사로 시호는 안효이며 소헌왕후를 낳았다. 왕후의 동생 좌의정 회는 공훈으로 익대좌리공신에 책봉되었고 청송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공숙이다.
이가 원을 낳았는데 원은 내자시판관으로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순문을 낳았다. 순문은 의정부사인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네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남 연원은 영의정으로 당대 인순왕후(명종비)의 조부이다. 삼남 봉원은 승정원 동부승지이고, 통원은 지금 우의정의 자리에 있다.
공은 그 둘째아들로서 휘는 달원이며 자는 자용이다. 어머니는 신씨로 역시 평산의 망족(명족) 사헌부 감찰 영석의 따님이며 전조(고려)의 명장 숭겸의 후예이다. 공은 홍치 갑인년(1494년) 2월에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친을 잃었다. 학문에 힘써 어머니에게 친히 가르침을 받았는데, 밖으로 나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글을 한 번 읽으면 모두 외우고 외우면 잊지 않았다. 15세에는 정시에 급제하여 명성이 놓았으며 장성하여서는 모제 김안국을 스승으로 섬기고 조용히 강습하면서 의리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정덕 정축년(1517년) 별시을과에 급제하여 초직으로 승문원 권지정자로 나갔다가 선관되어 예문관 검열로 옮겼으며 홍문관 저작으로 발탁되었다가 승정원 주서로 자리를 옮기었다. 또 기묘년(1519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한 후 이조좌랑으로 옮기었다.
공은 화어(중국어)에 능통하고 또 받아 적기를 잘하여서 항상 승정원의 직을 겸하였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시사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임오년(1522년) 예조좌랑을 제수받고 성균관 직강을 지냈으며 질정관이 되어 조경사로 중국에 겠는데 공은 화어(중국어)에 능통하여 통역이 필요치 않았으며 말과 자용이 단아하고 수려하며 행동거지는 겸손하여, 일찍이 태학관에서 머물 때 관중의 여러 유생들이 공의 풍채를 사랑하여 연연한 정을 끊치 못하였다. 후에 이로 인하여 사신으로 돌아오는 이에게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묻고 향전(아름다운 편지)을 전하는 이와 노자까지 주는 이도 있었다.
계미년(1523년) 개성부 도사가 되었다가 교체되어 종친부 전부로 옮겼으며 성균관 직강으로 또 이직하였다. 질정관으로 또 중국에 자녀온 후 공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충훈부 경력으로 옮겼다. 무자년(1528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복을 벗자 훈련원 부정이 되었는데 이에 공의 형 및 일문의 종족들이 연이어 이조에 자리한 연유로 오랫동안 채용되지 못하였다. 신묘년(1531년)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이어 장악원과 군기시정을 지냈으며 승문원 판교에 올랐으나 친척의 혐의로 인하여 다시 장악원정으로 좌천되었다가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갑오년(1534년) 다시 장악원정으로 복직하였고 통례원 우통례로 승진하였으며 을미년 좌통례로 승진하였다.
이해 11월 갑자기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니 향년 42세였다. 병신년(1536년) 2월 통진의 약산에 장사지냈다. 아들들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홍문관 제학에 증직되었다.
공은 효제에 독실하고 벗과의 사귐에는 신의가 있었으며 친구의 궁핍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치에 밝아 모든 기예에 통하지 않는 바가 없어 무리 가운데 가장 두두러졌다. 기묘년 이래로 당시 권력가들의 비위를 거슬렸기에 하급관료로만 전전하다가 자신의 뜻한 바를 다 펼치지 못하니 공을 아는 사람들은 이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담소하여 분화(화려하게 꾸밈)를 기뻐하지 않았다. 「금서우흥」이란 넉자의 큰 글씨를 중국에서 얻어 집에 걸어놓고 꽃과 대나무를 심어 기르며 항시 도서를 좌우에 두고 그 가운데 거처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은 이조참판 윤희인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진은 병오년(1546년) 가을 생원에 합격하여 지금 김포현령으로 있고 둘째 아들 자도 동년에 급제하였고 또 병진년(1556년)에는 중시에도 합격하여 지금 전주부윤으로 있다. 전은 재주와 명망이 뛰어나 제부(천자가 동성의 제후를, 또 제후가 동성의 대부를 부르는 호칭)의 풍도가 있어 선정을 베품으로서 가선의 품계를 상으로 얻었다. 막내 아들 수는 지금 남평현감으로 있다. 딸은 종실 익양군의 아들 황양군 수린에게 출가하였다.
김포현령 진은 사인 신석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우명으로 신유년(1561년) 진사에 합격하여 와서별제가 되었고, 딸은 엄인달에게 출가하였다. 김제군수 자는 군수 구사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3형제를 낳았는데 장남은 우직으로 선전관이며 둘째는 우익이고 셋째는 우정이다. 전주부윤 전은 현감 이 한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우선이고 둘째는 우준, 셋째는 우승이며 막내는 우순이다. 장녀는 김광두에게, 둘째 딸은 정문기에게, 막내 딸은 김대섭에게 출가하였다. 남평현감 수는 정량 박인량의 딸에게 장가들어 5형제를 낳았는데 우성, 우현, 우신, 우관, 우인이다. 황양군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간으로 청원부정이고 장녀는 별제 김광국에게, 둘째는 정의원에게 출가하였으니 무릇 증손 남녀가 수십인에 달한다.
부윤 전은 모부인을 모셔다가 받들 때, 좋은 명절이면 여러 아들들이 다 모여 오래 삶을 비는 술잔을 올렸는데 이때 매번 금관자 옥관자의 끈이 서로 부딪히니 좋은 음식으로 봉양함과 자손의 성함이 세상에서 비할 데가 없었다. 공이 비록 세상을 떠났으나 능히 신후의 영화로움을 누려 고관의 증직과 나라의 은총이 끝없으니 모두 하늘의 보답함이 예부터 가히 속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명을 받아 서학유생을 가르칠 때, 공은 지은 글을 봄에 매번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또 그 언행과 용모가 옥같이 윤이 났다. 공은 재화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 함께 벼슬을 할 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벗으로서 서로 막역한 사이를 허락하였는데 공이 돌아감에 심히 한탄스러운 것은 하늘이 나이를 더 주지 않아서 벼슬이 그릇에 가득차지 못한 것이로다. 부윤 전이 오랜 친구의 좋음으로서 나에게 특별히 청하여 행장을 지어줄 것과 묘도의 명을 청하니, 오호라! 어찌 사양하리오, 명하기를,
청성의 심씨는 문벌이 아주 성하였네.
연이어 나라의 왕비를 배출하였고, 그의 후손이 창성하였다네.
당당한 대윤이여! 명망은 좋은 때 떠오르는 것이라네.
네 마리의 봉같은 아들들 날개를 펼치니 실로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네.
은혜를 헤아려 증직을 받으니 마침내 그 보답을 받았다네.
하늘의 령으로 명성이 오랫동안 지속됨을 반드시 취하리라.
가정 42년 계해 8월 일 세움
이 신도비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에 있으며 비문 글씨는 아들인 관찰사공 심전(도사공김대섭의 장인)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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