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06년 추향 및 제15회 정기총회 후기(2)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11-21 14:32 조회1,295회 댓글0건본문
2)문중 관련 신도서 소개
가)중시조 충렬공 소설 출간 :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라>(김봉석 작. 시간의 물레 간. 2006. 10. 값13,000원)
나)충무공 김시민장군 소설 출간 : <충무공 김시민>(정정대 작. 미디어넷 간. 2005. 12. 값10,000원)
3)금년 첫 참석자 자기소개 : (00파. 이름00. 거주지. 근무처. 기타 )
10. 기타
1) 문중 역사 자료 소개 (제2회)
--신라김씨 비조(鼻祖) 대보공(大輔公) 소개
비조(鼻祖)이신 대보공(大輔公-諱 閼智)은 서기 60년(신라 4대 탈해왕 4년) 8월 4일,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또는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로서,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 했다. 이 '알지'는 향찰(鄕札-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알지'를 신라김씨(안동김씨 포함)의 비조로 모신다.
(*주, 비조(鼻祖) : 옛날 중국에서 사람이 모태(母胎) 속에서 자랄 때, 맨 처음 코가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고 하여 코를 모든 사물의 시작으로 본 데서 비롯된 말이다. 어떤 학문 분야나 성씨의 가장 최초의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이에 대한 <三國遺事>(一然 著)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永平3年 庚申, 八月四日, 弧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掛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足倉足倉,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해석>
영평3년(주1) 경신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걸어 가고 있었는데, 큰 광명이 시림(始林-혹은 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 있었고, 그 구름 속에는 한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바로 그 궤로부터 나오고 있던 것이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왕(석탈해왕)께 아뢰자 왕은 친히 그 숲으로 행차하였다. 그리고 왕이 그 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서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는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는데(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왕은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하였다. 알지는 곧 우리말로 '아기(小兒)'를 일컫는다. 왕은 이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세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뒤에 파사왕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 혹은 仇刀라 함)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三國遺事>李丙燾譯.大洋書籍 刊. 1972. p104)
*주1. 영평3년 : 서기 60년, 신라 4대 탈해왕 4년.
*주2. 호공(弧公) : 58년 탈해왕이 대보(大輔)로 삼음.
*금궤도(金櫃圖) 소개--조속(趙涑.1595-1668)의 1635(인조 13)년 작.
2)충익공파 묘비 건립 행사 소개
1. 일시 : 2006. 4. 15--4. 16
2. 장소 : 1)충북 제천시 봉양면 삼거리 및 마곡리
2)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3. 추진 : 충익공파 묘비 건립 추진위원회
4. 내용
가. 제천의 도사공(휘 秋萬), 밀양공(휘 鳳旨)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봉행
나. 괴산의 충익공(휘 時讓), 합천공(휘 縠), 사휴제공(휘 徽)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제막식 거행
4. 참석자 (무순)
가. 4. 15. 제천 봉양면 행사 : 약 15명(상천, 상옥, 영회, 두응, 찬응, 정응, 성응, 대응, 규동, 규원, 국진, 항용, 원용 등)
나. 4. 16. 괴산 능촌리 행사 : 약 40여 명
1)괴산 : 학응(구암공), 택응(참봉공), 태섭, 태석(구암공), 태옥(구암공), 규원(참봉공), 영수(문숙공), 용두(통덕랑공)--8
2)서울 : 상석, 두응, 문응, 찬응, 정응, 규태(구암공), 항용-7
3)청주 : 영묵(생원공), 영회, 규환(구암공), 규진, 규동, 규성, 태진, 대용(가족4)-12
4)제천 : 상천, 대응, 국진-3
5)병천 : (구암공파) : 재철, 남응, 천응, 유응-4
6)제주 : 익수(보명-태익)-1
7)안사연(안동김씨 사이버 학술연구회) :
주회(안렴사공파, 청주), 태영(군사공파, 서울)-2
8)기타 : 상천추진회장 內子 외 3인,
* ( )는 비안공문중회 이외의 종친
다. 충익공 신도비 건립<해설판 내용>
충익공 하담 김시양선생 신도비(忠翼公 荷潭 金時讓先生 神道碑)
이 신도비는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인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선생의 신도비이다. 1670년(현종11) 8월에 세운 이 비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조경(趙絅. 漢陽人.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역임. 청백리)이 충익공의 아들인 김휘(金徽. 현종때 이조판서 역임)의 요청으로 지었으며, 글씨는 당시 최고의 서예가인 이정영(李正英. 全州人.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역임)이 썼다.
이 비는 최초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앞의 취묵당 옆 도로가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도로의 폐쇄로 197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형적인 조선조의 신도비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이 비는 양질의 화강암과 웅장한 규모, 명문장과 명서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약 3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풍화 마멸된 곳이 전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文臣. 본관은 安東, 초명은 時言, 자는 子中, 호는 荷潭으로 증영의정 金錫의 孫이요, 증좌찬성 金仁甲의 子로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주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161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3) 전라도 도사때 지방향시에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는 모함에 들어 12년간 종성과 영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와 병조의 정랑, 수찬·교리,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팔도도원수·사도체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강화유수,호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643년(인조21)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고 묘는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본 신도비 뒷산 우측에 있다. 회령의 鄕祠에 제향되었으며 1691년(숙종17) 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忠翼公 荷潭先生 遺稿>(8책)가 있다.
2006. 4. 16.
安東金氏 提學公派 比安公門中會
11. 폐회사 (식사 및 소파별 협의).
식사 후 전원 성묘
1)양덕공파 : 신묘원-부호군 통덕랑공 묘소 이안지(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당리)
2)충익공파 : 괴산읍 능촌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