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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당시의 정황(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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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12-07 23:11 조회1,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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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년

김방경은 충렬왕과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1296년 충렬왕과 함께 원나라에..., 1297년 충렬왕이 김방경의 집에...), 세자(*훗날 충선왕)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아들 김흔, 김순을 비롯하여 조인규(*둘째 흔이의 사돈), 홍규, 박전지(*처조카), 이진(*1300년 김방경 묘지명 찬), 이승휴(*동안거사집에 김방경 글 있음) 등이 세자의 후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맏아들 영공(令公, *둘째 김흔을 이름이다. 장자 김선은 이미 죽었으므로 이때는 둘째 김흔이 맏아들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은 월편(越篇, *부월斧鉞 : 출정하는 대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띤 군관(軍官)에게 왕이 정벌(征伐)과 중형(重刑)의 모든 권한을 주는 뜻으로, 금·은빛 칠을 해서 내려주던 도끼. 의장(儀仗)으로 쓰기도 했다.)을 계승했고, 막내아들(*김순)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특히, 막내 김순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38세) 겨울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자, 뽑힌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크게 잔치를 열자 □□□□ 선비와 조야(朝野)에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선공(*김방경)을 지극히 영화롭게 한 효도이다. 그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하였다. 병신년(충렬왕 22, 1296, 39세)에 세자사인(世子舍人, *세자 충선왕을 가르치는 관청의 한 벼슬)을 겸하게 된다.


급기야 1295년 8월에는 충렬왕과 세자 부자간 권력쟁탈전이 벌어져 세자가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게 된다.


세자(*후의 충선왕)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충렬왕)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김방경을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고,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를 내리면서 궤장연을 열고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려 주게 된 것이다.


이때, 영공(令公, *도첨의령 김방경)이 안집사(安集使, *1295년 말 강릉도안렴사인데 누구인지는 미상)를 시켜서 강릉도 삼척에 은거하고 있던 이승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집사가 1295년 11월 12일에 이승휴에게 전했는데,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후의 충선왕)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충렬왕)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 고 하였다.


이승휴가 글을 받고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병서(旦暮賦幷序)라 하고 바쳤는데, ‘갑자기 글을 쓰면서 요지까지 붙인 글’이다.



부월 [斧鉞]

금부(金斧), 황월(黃鉞)이라고도 한다. 출정하는 대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띤 군관(軍官)에게 왕이 정벌(征伐)과 중형(重刑)의 뜻으로 주었다. 금·은빛 칠을 해 의장(儀仗)으로 쓰기도 했다.


궤ː장(杖)

1.안석(案席)과 지팡이.

2.조선 시대에, 궤장연(杖宴)에서 임금이 내리던 안석과 지팡이.


단모(旦暮)

새벽녘과 해질녘. 아침과 저녁. 단석(旦夕). 조석(朝夕).

賦(부) 

(1) 한시(漢詩) 의 육의(六義) 의 하나, 감상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 읊은 글

(2) 한문체의 하나, 글귀 끝에 운을 달고 대(對) 를 맞추어 짓는 글.

(3) 과문(科文) 의 하나, 여섯 글자로 하나의 글귀를 만들어 지음.


序(서) 

(1) 사적(事蹟) 의 요지(要旨) 를 쓰는 문장의 한 체. (2) '서문(序文) '의 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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