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경기문학기행 / 황진이] (5)-소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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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2-11 09:57 조회1,258회 댓글1건본문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후에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으며,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고, 이해 명종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후에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으며,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고, 이해 명종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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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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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양관 대제학에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 1504~1585)이 찬한 양곡의 신도비명 일부분입니다.
‘성품이 밝고 순수하여 마음과 도량이 바르고 온화하였다. 몸가짐에 무게가 있고 과묵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수졸(守拙)한듯 하였으나, 실제로는 과단성이 있어 스스로 삼가며 범절을 지킴이 독실하였다. 사람들마다 공경해 마지않았다.’
솔내님^^ 책이 나오면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