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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퇴계문인록 - 몽촌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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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1-09 07:28 조회1,52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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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문(誄文)
삼가 생각건데 선생께서는 타고 나신 자질이 도(道)에 가까워서 스승의 전수(傳授)를 기다리지 않고도 온오(蘊奧)한 진리를 일찍이 탐구하셨습니다. 자나 깨나 수사(洙泗)에 대한 생각이요 염락(濂洛)을 가슴에 복응(服膺)하여 탁연(卓然)한 그 지취(志趣)가 성현(聖賢)을 배울만 하였습니다. 대본(大本)이 이미 확립하여 넉넉하면 벼슬하거니, 장차 그 배양(培養)한 바를 미루어서 크게 세상에 베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임금이>하고프지 않으니 슬프구나 운이 막힌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거두어 안고 본래의 뜻이나 추구함이 나았습니다. 바라보니 저 낙동강 물이 끝이 없이 흘러가거니, 도(道)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를 버리고 어디로 찾아가리오. 산림(山林)에 해가 길어 강학(講學)의 공이 깊어서 오른쪽엔 도서(圖書)요 왼쪽엔 잠규(箴規)라, 매일을 하루같이 공경하여 탐구 하였습니다. 경(敬)을 협지(夾持)하고 이(理)를 궁구(窮究)하니, 두 가지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니 조예(造詣)가 이미 깊어서 수립한 바가 탁연(卓然)하였습니다. 푸른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요 높은 태산(泰山)에 우뚝한 교악(喬嶽)이라, 성스러운 시대의 참된 선비요, 하늘 백성의 먼저 깨달은 자였습니다. 포백(布帛)같은 글이 숙속(菽粟)의 맛이라, 여사(餘事)로 하는 문장이 이 또한 진위(晉魏)의 그것을 초월 하였습니다.
훌륭하구나 선생이시여! 간세(間世)의 기품(氣稟)으로 정출(挺出)하여 배양(培養)이 깊고 축적(蓄積)이 두터워서 참으로 크게 이루었습니다. 풍성(風聲)을 듣고 의리를 사모하여 멀리서부터 배우러 찾아오니, 접응(接應)이 화기(和氣)롭고 교회(敎誨)가 여일(如一)하였습니다. 이끌어 가르쳐서 근본을 세워주니 순리에 따라 질서가 있어서 가리워 우매(愚昧)함을 천발(闡發)해 주었습니다. 정밀하고 심오하고 호대(浩大)하고 광박(廣博)하여 매사(每事)의 응대(應對)에 궁함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아 성학(聖學)이 면면(綿綿)히 이어 오는 한 오리의 털끝과 같았거늘, 선생을 얻어서 비로소 거의 끊어져가던 것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이루고 다시 남을 이루어 주는 것이 이것이 어찌 두 가지의 일이겠습니까? 경전(經傳)을 박흡(博洽)하고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되 털끝처럼 실올처럼 나누고 쪼개어서 언 것이 녹고 얼음이 풀리듯 하였습니다. 자양(紫陽)의 글에 평생의 공력(功力)을 바쳤으니, 번잡을 덜고 강요(綱要)를 추려서 이를 입도(入道)의 표적(標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후인(後人)들이 여기서 얻은 바가 있었으니, 도(道)를 보위(保衛)하여 후세에 전해서 우리 동방(東方)의 유일한 분이 되었습니다. 언덕의 학의 울음이 멀리 울리고 귀인(貴人)의 행차가 깊은 산골로 들어오니, 나아가기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워서 소명(召命)이 있으면 문득 사양 하였습니다. 벼슬을 하거나 그만두거나, 조정에 오래 있거나 빨리 떠나거나 함이 모두 의리(義理)와 시기(時期)의 절당(切當)함을 따라서 하였으니 전원(田園)에서 의리를 마치는 것이 그것이 어찌 기필(期必)한 것이었겠습니까?
‘십도(十圖)’의 그림에서 성학(聖學)을 지적하고 ‘육조(六條)’의 상소(上疏)’에서 치리(治理)를 논하였으니, 간절하고 지성스러워서 오르지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이 중정(中正)하니 그 베품이 응당 넓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이리도 인색하여 철인(哲人)을 그만 세상을 떠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선생이시여! 여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육신을 따라 도(道)가 또한 멸몰(滅沒)하여 우리의 도가 잘못되는 것입니까?
나라에는 주석(柱石)이 없어지고 세상은 시귀(蓍龜)를 잃었습니다. 선생이 살아계시면 사문(斯文)이 부지(扶持)되고 선생이 가시면 사문이 고단(孤單)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어리석은 소자(小子)가 다행으로 가르침을 받았으니, 지난 해의 첫겨울 초하룻날에 남쪽으로 돌아와서 문간을 쓸고 봄바람이 이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선생님께서 소경이요 귀먹어리인 자를 열어서 인도 하셨습니다. 반복하여 순순(諄諄)해서 면려(勉勵)함이 깊고 절실했으니 미련하고 우매(愚昧)함이 비록 고질이 되었지만 역시 경중(敬重)하여 법도(法度)로 삼을 줄 알았습니다. 헤어진 지 그 사이에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직 한달이 채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갑자기 부음(訃音)이 닦치니 가슴을 쓸어 내리며 최절(摧折)하여 통곡(痛哭)합니다.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는데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됩니다. 대들보가 무너졌으니 오당(吾黨)이 장차 어디에 의지합니까? 금옥(金玉)같이 정수(精粹)하고 윤택(潤澤)한 모습을  다시는 뵈올 수가 없습니다. 의문이 있은들 누구에게 물어보며  물어본들 누가 대답을 합니까? 끊어진 통서(統緖)가 망망(茫茫)하기만 하니 마음이 어찌 비감(悲感)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변변치 못한 몸이 또한 자유롭지 못하여 달려가 통곡할 길이 없으니 영원히 가시는 길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며 길이 호곡(號哭)하니 마음만그저 측달(惻怛)할 뿐입니다. 정(情)과 의(義)를 모두 저버렸으니 감한(憾恨)과 참괴(慙愧)가 아울러 몰아 닥칩니다. 천리(千里)에 애사(哀辭)를 봉함(封緘)하여 보내면서 미약한 정성이나마 기탁합니다. 
<문인 생원 김수(門人 生員 金晬)> 출전: 퇴계전서29권

김수 [金晬, 1547~1615] 본관 안동. 자 자앙(子昂). 호 몽촌(夢村). 시호 소의(昭懿). 이황(李滉)의 문인.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홍문관교리(校理)로 있을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주해(注解)하였다. 직제학 ·승지를 거쳐, 1587년 평안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경상도관찰사에 복직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建儲)문제로 남 ·북 2개파로 갈리자 남인이 되었다
1592년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중추부지사(知事)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를 지낸 뒤 중추부 영사(領事)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군 5) 손자 비(秘)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문집에 《몽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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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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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