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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능원군 구굉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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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7-01-21 20:35 조회1,44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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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굉신도비(具宏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660년(현종1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225cm, 너비 98cm, 두께 30cm
출토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군장리 산 93번지 (능성구씨 묘역 내)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군장리 산 93번지 (능성구씨 묘역 내)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俊吉) / 미상

1660년(현종 1년)에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된 구굉의 신도비이다. 구굉(1577∼1642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할아버지는 감찰(監察) 순(淳), 아버지는 좌찬성 사맹(思孟), 어머니는 증 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여동생이 인헌왕후(仁獻王后 : 元宗妃)이다. 어려서 김장생(金長生)에게 학문을 배웠다. 1608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해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1619년(광해군 11년)에 장연현감(長淵縣監)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에 항거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성공하고,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 후 형조판서 ·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莩摠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찬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켰으며, 좌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비문(碑文)을 남겼으며 효종(孝宗)의 묘소인 영릉(寧陵)의 영릉지문(寧陵誌文)을 지은 송시열(1607~1689년)이다. 서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병조판서 · 좌참찬(左參贊)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宋時烈)을 지지하였고, 특히 글씨를 잘 써 사대부들의 비석에 수많은 글씨를 남긴 송준길(1606~1672년)이다. 전액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전서(篆書)와 주서(蟬書 : 漢字의 옛 字體의 하나. 보통 大篆이라고 한다)에 뛰어났다. 그의 전서는 당나라의 이양빙(李陽冰)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조선 후기에 흔히 사용된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비신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지만, 직경 5~10cm 인 탄흔 자국이 7개가 있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공(公) 선대(先代)의 가계도와 간략한 소개이며, 광해군의 폭정과 폐모살제(廢母殺弟)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또 1617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서(李曙)·신경진(申景所), 조카 인후(仁譽)와 함께 관서 지방으로 가서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에 김류(金濫)·이귀(李貴)·이서 등과 합류해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중반부에는 이괄(李适)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반드시 역모할 것을 예견하고 임금에게 아뢰어 대비하게 했으며, 공주로 임금을 호종했다. 1629년(인조 7년)에 인헌왕후가 죽자 장사를 주관해 정헌(正憲)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강도(江都)로 가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1629년 삼도통제사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31년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인목왕후의 산릉(山陵) 및 창경궁의 수선(修繕)을 맡아서 일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공조판서로서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경기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지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에는 공(公)의 성품과 후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다.

 

 

구굉신도비(具宏神道碑)

조선국 분충찬모립기명윤 정사공신 보국숭록대부 능성부원군 겸판의금부사 병조판서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충목 구공신도비명과 서문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성균관제주 송시열(宋時烈) 지음.

정헌대부 행사헌부대사헌 겸겅균관제주 송준길(宋浚吉) 글씨.

가선대부 병조참판 이정영(李正英) 전서(篆書).

전에 광해군이 혼미하고 학정을 일삼아 동기를 살해하고 모후를 유폐하며 해를 끼치므로 백성들이 하늘에 호소하게 되었다. 하늘도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이미 돌아보는 명을 내렸으나 백성들은 그 정해진 방향을 알지 못했다. 바로 그때 능성부원군 구굉이 하늘의 명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과 모사 등과 더불어 3월에 인조대왕을 추대하여 창덕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모후를 다시 세우고 광해군의 폐정을 모두 개혁하자 인륜이 다시 밝아지고 종사가 안정을 되찾았다. 주역에 있는 “용이 밭에 있으니 그 이로움이 대인을 만나는 데에 있다”는 말은 공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공이 어렸을 적에 어떤 사람이 꿈에 ‘공이 용을 타고 해를 운반하며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 때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고들 했다.

공의 자는 인보(仁甫)이고 호는 군산(群山)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백과 도량이 있었으므로 아버지 문의공(文懿公)이 공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는 큰 인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공이 어느 날 병이 들어 거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어 식구들은 속수무책으로 둘러앉아 울고만 있는데 홀연히 붉은 광채가 방에 가득하더니 공이 급히 몸을 뒤척이다 일어나므로 부모가 더욱 기이하게 생각했다.

19살 되던 을미년에 형을 따라 중국을 관광했고, 22살이던 무술년에는 감목관이 되고 무겸선전관, 도총부도사가 되었다. 갑진년에 부친상을 당했고, 정미년에는 양성현감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고창현감과 직책을 바꿨다가 무과에 급제해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기미년에는 장연현감이 되었고 임술년에 모친이 별세했다.

전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나서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고 있을 때 공이 친구인 이서(李曙)와 앉아 말했다. “사람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으니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이런 때에 어찌 천명을 받을 사람이 없겠는가?”공이 그렇다고 응수한 뒤 인조대왕의 봉호를 거론하며 “이 분이야말로 그 사람이다.”고 했다. 마침내 공은 이서와 표종형인 신경진(申景禛), 형의 아들 인후와 의논한 뒤 모두 관서로 달려가 당시 체찰사로 있던 장만(張晩)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장만도 많은 인재를 얻어 놓고 있었다. 하루는 백상루(百祥樓)에 올라가 담소 끝에 슬쩍 모의에 대해 고하니 장공도 의로운 일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위험을 생각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떠나왔다.

그 뒤 신경진은 가산별장이 되고 인후는 진도군수가 되었는데 유독 이서만 장단군수가 되어 경기도 근처에 있게 되었다. 공은 여막에서 상제를 다 마치지 못하고 날마다 모의를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때 모의한다는 말이 누설되어 사태를 짐작하기 어렵게 되었으나 공은 두려워하지 않고 호걸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 때 우후 조옥건(趙玉乾)이 조정의 명으로 충청도의 병력을 인솔하여 수원에 주둔하게 되었다. 공은 평소 조옥건과 좋은 사이였으므로 조옥건에게 수원부사를 쳐 죽이고 그 수하 병력을 합류시켜 거사하도록 종용했으나 조옥건이 불응했다. 계해년에 드디어 김류(金鎏), 이귀(李貴) 등 유명한 사람들과 장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하늘이 내린 처벌을 감행했다. 공은 이때 수훈을 세웠으나 상중에 있는 몸이었므로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에 녹훈되고 가의대부로서 능성군의 호를 받은 뒤 상차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왕의 흥할 때는 아무리 천명을 받았더라도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을 내보내 일을 주선하게 한 뒤에야 일이 성공하기 마련이니 하늘과 사람이 합하여 응하는 묘한 이치를 의심할 수 없다.”

이괄(李适)이 평안병사가 되었는데, 공은 그가 반역할 것을 짐작하고 조용히 왕에게 처리하도록 아뢰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상제를 끝내지 않았으나 관직에 나와 왕의 남행을 따라 공주까지 갔다. 적당들이 평정된 뒤 공은 자헌대부로 승진되었고 갑자년에는 지중추부사, 을축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병인년 인헌왕후가 승하하자 흥경원(興慶園)으로 옮기고 장릉(章陵: 인조의 아버지 원종)을 합장하는 일을 공이 전담했으므로 그 공로로 정헌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정묘년에 난이 일어나 대가를 호종하여 강화로 갔다 돌아온 뒤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기사년에는 삼도통제사 겸경상우수사가 되었으며, 신미년에는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인목왕후의 산릉과 창경궁의 보수를 주관한 공로와 훈공을 겸했으므로 숭록대부를 거쳐 보국대부가 더해졌고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병자년 난리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이어할 때 공은 공조판서로서 기보병을 거느리고 남한성을 지키며 적을 죽이고 잡은 공로가 있었으므로 난리가 끝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공이 역임한 관직은 형조판서 세 번, 공조판서는 네 번, 병조판서 두 번이고, 별직으로는 오위도총부도총관, 판의금부사, 비변사, 훈련원, 장악원의 관직을 맡았고 말과 무기고 등도 관장했다. 정축년 이후로는 항상 훈련원, 어영청, 포도청, 총융청, 4국의 대장을 겸직했는데 숙위군이 포함된 관서였다.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고 은혜롭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장병들의 환심을 얻었다.

공이 형조에 있을 때 여러 왕자와 공주의 집안사람들이 사고를 친 경우 무마를 청탁해 왔지만 공은 모두 법대로 처단하고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귀족과 세도가들이 자취를 감췄다. 어떤 사람이 세력을 믿고 남의 자식을 뺏어다가 기르면서, “모월 모일에 어느 노비가 낳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송사를 냈으나 오랫동안 끌면서 처결이 나지 않았다. 공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 아이의 어미가 살아 있느냐?” 그가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공은 “그러면 쉬운 일이다”고 하며 즉시 그 어미를 불렀다. 그 아이와 비슷한 또래 5,6명을 모아서 그 아이와 한 군데 있게 한 후 어미를 들여보내니 그 아이가 곧장 달려가 제 어미 품에 안겼다. 공이 모자를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니 사람들이 듣고 시원하게 여겼다.

공은 행실이 매우 간결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솔직한 것을 임무로 삼아 진실했다. 성의를 다해 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으며, 친족 중에 고아가 있거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위무하고 길러 결혼시켜주고 살길을 마련해 주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나 군직에 있을 때는 은혜와 믿음을 위주로 했다. 세자의 외삼촌으로서 동생인 인헌왕후가 운이 열리는 경사를 누리고 있었으나 왕후전에 출입하지 않았고 조정에 몸담은 지 40년 동안 오직 청렴 근신하여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도 잘했고 끝도 잘 맺어 이름난 신하가 되었다.

숭정(崇禎) 임오년 향년 66세로 11월 3일에 사망했다. 공이 병으로 누워있을 때 일관(日官)이 왕에게 “장성(將星)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떨어졌으니 조짐이 오랜 장수에게 불리합니다.”고 보고했다. 왕은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공의 부음을 듣고 왕은 합문까지 걸음을 옮기면서 애통해 했고 부의품을 내렸으며 영의정에 증직했고 충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서리들이나 선비들, 부곡의 백성들까지 모두 통곡하며 슬퍼하여 흰 두건을 쓰고 혼령을 전송했다.

구씨는 능성(綾城)에 적을 두고 있고 고려 때부터 족보가 있다. 존유(存裕)라는 인물이 가장 현달했고 조선조에 들어 와서 고조 수영(壽永)은 정국(靖國)의 공훈으로 능천군에 봉해졌다. 능천군은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 염(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증조부 희경(希璟)은 현령이었고, 조부 순(淳)은 감찰을 지냈다. 아버지 사맹(思孟)은 관직이 찬성에 이르렀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의공이다.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증영의정 화국(華國)의 딸이다.

인헌왕후의 형제 4명 중 공은 막내이다. 부인 조씨(趙氏)는 사의 정(玎)의 딸인데 가계는 순창인이다. 공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에 봉해졌고 63세로 정축년 4월 1일 사망했다. 양주 팔곡산(楊州八谷山) 부간(負艮)의 언덕에 장사지냈고 공은 그 오른쪽에 안장했다.

공의 1남 인기(仁墍)는 능풍군으로서 한성부좌윤으로 경기도의 보병을 총괄하여 공의 직책을 계승했다. 두 딸이 감찰 이립신(李立身)과 진주군 유구에게 출가했다. 능풍군과 진주군은 공을 따라 반정에 참여했다. 서출소생 인전(仁廛)은 통정대부로 군수이고, 인식(仁墅)은 첨지이며 인□는 사과이다.

능풍군의 아들 일(鎰)은 진사로 현감이 되었다. 진주군은 5남을 두었는데 명성(命性)은 선전관이고 명재(命才)는 참봉이며, 나머지는 명철(哲命), 명준(命俊), 명웅(命雄)이다. 다섯 사위는 윤이겸(尹以謙), 안탁(安琢), 이제하(李齊夏), 윤필성(尹弼星), 이계인데 ..는 진사시에서 장원을 했다. 인전의 아들은 익(釴)이고 인□의 사위는 이재화(李再華)이며 두 딸은 어리다. 현감의 3남은 수정(守禎), 지정(志禎), 상정(尙禎)이고, 2녀는 어리다.

공이 어려서 사계 김장생선생으로부터 수학했는데 선생이 심히 소중하게 여겼다. 나와는 같은 문하생이어서 공은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도덕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이러한 연고로 능풍군이 공의 비명을 내게 부탁하게 된 것이다. 명왈(銘曰),

능성의 구씨는 고려 때부터 시작해

많은 공경대부 훌륭한 인척으로

나란히 날아오르니 이조에서 기록하여

공에 이르러서는 궁중의 자손 되었네

공의 부친 찬성공 우뚝 솟아났고

모습은 훤칠하고 마음은 곧았으며

어릴 땐 유현 모시고 말년엔 병가를 밟아

만부를 당할 영웅 성조의 남아였네

하늘의 뜻으로 왕후의 오빠 되고

성주가 태어나 왕이 덕을 돌아보니

성주는 내 조카라 해를 안고 승천하여

궁중에 임하니 구중이 맑아졌네

공훈은 짝 없으나 공은 겸양했는데

총재에 올라 놀라네 왕이 외숙이라 하며

왕실이 미령하여 울타리로 삼으니

한성판윤에 오르고 남한의 병졸도 맡았네

공조와 형조의 판서로 난을 당해 남행에 따라가

피를 마시고 성에 임하니 병사는 목숨을 내놓았네

해 바뀌고 난리 끝나니 공사가 모두 뒤집히자

공은 본병의 총수 되어 하루 종일 수고하고

밤중에도 근심하니 머리 희고 몸 말랐네

이 때문에 이름 날리고 여한 없이 세상 끝내

저 무성한 후손들 아들이며 조카들

사위들도 공신이라 사람들은 거짓 많으나

공은 오직 충성이라 미워하는 사람 없고

사람들은 금옥 좋아하나 공은 탐하지 않으니

고명을 따를 사람 없네 왕이 죽음을 애도하고

사람들이 덕을 품으니 큰 슬픔 또한 영화라

산과 강에 맹세하고 제기에 이름 새겨

천만년을 전하리라 무성한 효자들이

남긴 자취 드러내고자 이곳에 비를 세우니

훈척이고 공신이며 명장의 가문임을 비춰 명을 썼네

숭정(崇禎) 기원 경자년 8월 일 세움.

 

<자료출처 :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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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구굉의 혈연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계암일록에 '옛 벗'이라 했으니 휘 시양 할아버지 문집을 꼼꼼히 찾아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