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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종가기행 22] 서애 류성룡-- 형님 겸암 류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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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1-23 10:00 조회1,37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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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菴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對應 자세

1)

薛錫圭*

 

目    次

 

 

 

 

 

 

Ⅰ. 序論

Ⅱ.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認識

Ⅲ. 柳雲龍의 現實對應 자세 

Ⅳ. 結論




Ⅰ. 序論

謙菴 柳雲龍(1539~1601)은 柳成龍의 형이자 李滉의 핵심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황이 은퇴하여 제자양성을 위해 陶山書堂을 열자 아버지의 권유로 곧바로 그를 찾아가 학문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河回와 陶山을 오가며 이황에게서 실제 수학한 기간은 10년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수학기간은 류성룡이 몇 개월에 지나지 않는 등 여타 제자들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퇴계학파 내부에서 동생 류성룡을 비롯해 月川 趙穆․鶴峯 金誠一이 각기 系派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 계파를 형성하지 못했다.

유운룡이 자신의 계파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그의 학문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은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啓蒙傳疑󰡕․󰡔理學通錄󰡕 등 이황의 저술편찬에 참여해 직접 스승의 학문을 정리하고 계승할 정도로 남다른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학문적 요인이 아닌 자신의 현실판단에 따른 선택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사실 이황이 사망한 이후 학파 내부의 계파형성에 따른 분화양상은 학문적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인식과 出處觀의 차이에서 야기되고 있었다.1) 그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계파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그의 역할이 학파의 분화조짐을 차단하는데 있었던 때문으로 풀이될 수 있다. 퇴계학파가 내부적 분화양상을 극복하고 正體性을 확립하며 조선후기 士林의 학풍을 주도함과 동시에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는 점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그의 역할은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거기에는 그가 학파의 결속을 추진할 수 있었던 독자적인 현실인식 체계와 대응자세를 마련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운룡의 학문을 비롯해 그의 현실인식과 현실대응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명한 논고를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사정은 그의 遺稿가 임진왜란의 兵火의 과정에서 일부 散失된데다,2) 그의 사망 후 류성룡에 의해 수집된 것조차도 정리 중 1605년의 폭우로 적지 않게 수몰되어3) 불완전한 상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기인한다. 현재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謙菴集󰡕에 수록된 書簡 및 論著 다수와 年譜 등이 있으나,4) 그의 학문의 내용과 삶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그 외 그에 관한 설화가 단편적으로 전승되고 있기5)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괴리된 측면이 적지 않다.

본고는 그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퇴계학파 내부의 분화 및 결속양상을 柳雲龍의 대응자세를 통해 검토함으로써 그의 역할과 위상을 조명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먼저 제한된 자료에서나마 나타나는 그의 현실대응 자세를 규정하는 인품의 형성과 학문경향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그가 󰡔退溪集󰡕 편찬 등 학파 내부의 갈등과 분화양상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가 퇴계학파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認識

柳雲龍의 字는 而得, 應見이며 號는 謙菴으로 本貫은 豊山이다. 그의 가문의 원래 본관은 文化로 보여지지만 현재 이에 관해 전래하는 문서가 없다고 한다.6) 그리고 그의 가문이 언제부터 풍산에 移居하게 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풍산 류씨의 호적 등 가계기록에 고려시대 조상들이 戶長職을 세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土豪로서 성장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가문은 9대조인 柳伯이 고려 忠烈王 당시 恩賜及第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비로소 현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가문은 6대조 柳從惠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工曺典書를 지낸 이래 仕宦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實職士族으로서의 위상과 함께 풍산의 土姓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屛山書院의 전신인 豊岳書堂이 명종 18년 豊山縣內에 건립되어 學田과 書冊을 하사받았다7)는 기록을 통해서 보아도,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대표적 名家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류종혜가 말년에 豊山縣內에서 河回로 移居한8) 뒤로, 그의 아들 柳洪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家勢를 크게 확대한 것을 계기로 이곳이 이후 그의 가문의 世居地가 되었다.9) 풍산 류씨가 하회에 정착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가 있다.


公(柳從惠)은 처음 풍산현 내에서 살았다. 뒤에 현의 서쪽 10여 리의 花山 아래 河回村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곳은 산수의 경치가 좋았다. 이 때 공의 친구인 典書 裵尙恭이 또한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오자 공이 맞이하여 함께 살면서 田地와 農幕을 나누어주었다... 裵公의 아들 吏曺正郞 素와 그의 사위 權雍도 이곳에서 계속하여 살았다. 우리 高祖(柳沼)가 또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돌아와 살았다. 류씨 자손이 이로 인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풍산의 舊居에는 公의 孫婿 金三友가 살았다.10)

류운룡은 1539년(중종 34) 柳仲郢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류중영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중종 35년 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황해도관찰사 및 禮曺參議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망한 뒤에는 豊山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평소 사람을 대할 때는 온후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公務의 경우 不義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반드시 是非를 가려 옳다고 믿으면 그대로 시행하고야 마는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11)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을 배경으로 부정․비리를 일삼는 勳戚세력에 정면 대응하고, 尹元衡과 대립하여 소신을 꺾지 않다 파직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당시 勳戚政權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던 李滉과 曺植 모두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명종 10년(1555) 乙卯倭變이 일어날 당시 그가 경상도의 방어를 위해 巡察使 從事官으로 파견되어 각종 조치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자, 이를 전해들은 曺植은 왜구를 토벌하고 국위를 선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은 그 뿐이라12)며 그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父親 柳公綽의 墓碣을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이황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그는 이황이 편찬한 󰡔朱子書節要󰡕의 板刻을 도맡는 한편, 그것의 目錄을 간행하고 인물들의 出處도 포함할 것을 권유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막역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열자 자신의 두 아들인 운룡․성룡 형제에게 神明과 같은 훌륭한 분이라13) 극찬하며 제자로서 받들어 모실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류운룡이 처음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16세 되던 해인 명종 9년(1554)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수시로 이황을 찾아가 󰡔大學󰡕을 비롯해 󰡔詩經󰡕․󰡔近思錄󰡕․󰡔史記󰡕 등 經書 및 性理書와 歷史書를 두루 배웠는데, 그가 문하에서 배운 기간이 10년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나 스승을 찾아뵙기 어려울 경우에는 편지로 질의하는 등 학문적 검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24세 되던 해 동생 류성룡과 함께 이황의 書齋에서 몇 달간 머물며 공부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요체란 성현의 言行을 통해 자신의 心身을 연마하는데 있는 것으로 字句의 해석에 매몰되어서는 안될 것임을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를 평생동안 尊信하고자 결심하기도 했다.14) 그가 南致利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릇 학자라 일컫는 자들이 言語가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문장이 해박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결국에는 流俗의 무리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먼저 성현을 따르겠다는 큰 뜻을 세우지 않고 虛僞와 無實에 힘을 쏟기 때문이라15) 규정하며 마음을 수렴하는 공부가 眞實과 實用에 이르는 첩경임을 강조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류운룡은 스스로도 자신의 교만함과 인색함이 사람들을 멀리하도록 했다16)고 실토할 정도로 젊었을 당시에는 직선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盧景任은 그의 기질을 剛毅․明敏한 것으로17) 규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 류성룡도


형님은 天性이 깨끗하고 절개가 있었다. 善을 좋아하고 惡을 미워했다. 사람을 대할 때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뜻에 맞지 않는다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는 친구들 사이에 너무 고상하고 강직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道義의 문에 들어가 연마하고 詩書의 가르침에 몰입함으로써 和平과 溫厚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어울려 종일토록 마시고 먹으며 담소를 나누면서 피곤함을 잊을 정도였다.18)


고 하여 그가 처음에는 가치분별에 투철한 이분법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류운룡의 젊은 시절 剛毅直方의 강고한 자세는 천부적인 성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善․惡의 가치분별을 통해 君子지배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己卯士林 이래 사림들의 보편적 성향을 계승하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가 南致利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고한 인품을 갖추고자 노력했으나, 타성적 성격에다 잦은 질병과 집안의 우환 등으로 강인하고 과감한 기백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19)며 초조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도 그 같은 그의 의욕적인 자세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류성룡도 전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하며 인품의 감화를 받게 되면서 스스로 기질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황이 유운룡 형제에게 학문의 힘으로 氣質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지만, 학문을 통해 篤行할 경우 어느 정도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20) 설명한 것도 그의 경직된 기질의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이황의 전반적인 인품은 剛과 柔를 겸비하면서도 내면으로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하되 외형상으로는 포용적인 外柔內剛의 탄력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품은 현실인식과 出處義理를 규정하는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理․氣를 상대적이면서도 가치우열의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는 그의 理氣隨乘論的 세계관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는 理․氣를 대립적 관계로 규정하는 理氣分對論을 토대로 善․惡의 확연한 분별을 지향하며 剛毅 일변도의 자세를 견지한 南冥 曺植(1501~1572)의 그것과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차별적 경향이 결과적으로 退溪學派와 南冥學派가 동질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분열하게 되는 주된 요인이 될21) 정도로, 이황의 탄력적인 인품과 현실대응 자세는 학파적 성격을 규정하는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그의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에 입각한 현실대응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도덕과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구현을 지향하면서도 방법상에 있어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는 점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원칙과 현실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어디에 비중을 두고 처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제자들의 자율적 판단의 몫이었던 것이다. 뒤에도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의 사망 후 官僚지향의 柳成龍系와 處士지향의 趙穆系가 불화를 빚게 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는 것이었다. 이황의 탄력적인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는 류운룡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지만, 특히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科擧에만 집착하여 부귀영달에만 관심이 있다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며, 經世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오로지 심성함양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할 것임을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모처자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것을 보면 학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동요하기 마련이라며 학문과 현실의 간격에서 오는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자신도 젊었을 때 진정한 道를 구하고자 했지만 늦게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실토하면서, 정신이 어지럽고 흐려진다는 이유로 부모처자의 굶주림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佛家에서 人倫을 단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22)며 道를 구하는 방법에 있어 탄력성을 부여하도록 가르쳤다.

나아가 이황은 그에게 향촌에 머물며 학문연마에 정진하는 것과 관직에 나아가 經世에 참여하는 것은 가치구분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行․止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23) 현실판단에 따른 탄력적 삶의 방식을 그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류운룡에게 󰡔近思錄󰡕과 함께 자신이 저술한 󰡔朱子書節要󰡕 등 性理書를 읽도록 당부하는 한편, 理氣說은 微妙하여 갑자기 깨닫기는 어렵지만 오래도록 반복하여 사유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24)며 자신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류운룡이 剛毅 일변도의 경직된 사고와 자세에서 벗어나 剛柔를 겸비한 복합적이고 탄력적인 인품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李植이 그가 젊었을 때에는 剛介한 뜻을 갖고 힘써 행하여 지나치게 모난 듯했으나, 중년 이후로는 和遜한 편으로 기울어 기질이 일변하였다25)고 평가하게 되는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그의 전반적 성품은 화합을 도모하면서도 더러운 것과 함께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면서도 激濁揚淸의 자세를 갖지 않았다26)거나, 剛毅와 溫柔를 兼有하면서27) 그것을 體․用으로 삼았다28)고 규정될 정도로 복합적인 것으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科擧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薦擧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그 같은 복합적 인품에 근거한 탄력적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류운룡의 그러한 ‘體剛用柔’를 근간으로 한 복합적 성품은 그가 국가관에 있어 확고한 가치분별과 함께 처신에 있어 정확한 사리분별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예컨대 그는 仁同縣監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吉再의 墓를 수축하는 한편, 그를 제향한 吳山書院을 건립하고는 夷齊廟 앞에 있던 ‘砥柱中流’의 글자를 모사하여 그 앞에 세우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는 吉再의 추숭사업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주도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운룡이 선생보다 수백 년 뒤에 태어나 摳衣執鞭은 못하였지만 나태와 신병을 무릅쓰고 남의 눈치도 개의치 않으며 밤낮 없이 노력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선생은 몸소 道를 이루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도록 가르쳤다. 그 스스로 높은 벼슬을 탐내지 않았으며 義理를 길러 高麗가 망할 때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富貴를 탐내지 않고 不義에 결코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 정신이 금석을 뚫고 절개는 日月같이 밝았다. 그리하여 風俗을 바로잡고 民心을 장려한 공로가 태산같아 그것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29)


이는 그가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忠義의 길을 걸었던 吉再를 자신의 삶의 자세를 규정하는 모범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守令으로서의 단순한 치적을 의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같은 사실은 그의 范仲淹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는 범중엄이 지방관으로서 浙西지방을 다스릴 때 吳中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여러 寺刹에 권고하여 대토목 공사를 일으켜 구제한 것은 功만 있는 것일 뿐 방법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군자란 업무처리에 있어 반드시 義理를 따져 光明正大해야지 功利에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으로, 救民이 급하다는 이유로 의리를 살피지 않을 경우 일시의 공이 있더라도 그것은 존중받을 수 없다30)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군자의 조건으로 학문의 공이 중요한 것으로 그 자질은 별개의 문제라 규정하며, 범중엄의 오류는 결과적으로 학문의 공이 부족하여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평가는 원칙과 도리가 전제된 포용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그의 體剛用柔의 복합적 성품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류운룡의 그러한 體剛用柔的 성품은 氣質과 出處觀에 있어 일정한 차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던 退溪學派와 南冥學派 모두에게 호감을 얻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曺植의 핵심제자들인 吳健을 비롯해31) 金宇顒 등과 절친하게 교유했던32)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남명학파와 기질적으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던 趙穆을 비롯한 李德弘․琴蘭秀․琴應壎․權好文․金富儀 등 禮安士林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긴밀하게 유대를 견지하게 되는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15세 연상인 조목에게 편지를 보내 마음이 굳어있고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師友로서 극진하게 대우해 주는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한편,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깊은 신뢰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師友의 道란 交遊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충고하는 가운데 의리를 취하는 것이라 전제한 뒤, 자신의 과오나 의심나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도 薰陶에 감화된 은혜를 백발이 되도록 보답할 것임을 다짐했다.33) 나아가 그는 자신의 편벽된 기질을 고쳐줄 것을 부탁함과34) 동시에 자식들을 제자로 삼아 道德的 感化를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할35) 정도로 權好文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예안사림들과의 폭넓은 교유도 주로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류운룡의 그들과의 교유는 학문연마와 인격감화의 장소인 隴雲精舍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퇴계학의 또 다른 산실이기도 한 淸凉精舍가 있는 淸凉山이 무대가 되기도 했다. 외형상으로는 평탄하고도 완만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속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을 숨기고 있는 청량산의 전반적인 모습은 外柔內剛한 이황의 복합적 성품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36) 이황이 이 산을 ‘吾家山’37)이라 부른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매진하는 한편, 제자들과 함께 자주 이 산 곳곳을 유람하며 많은 詩를 남기기도 했다.38) 이에 따라 제자들도 청량산 유람의 과정을 통해 스승의 인품의 진면목을 확인하며 심신을 연마하고 우의를 다져 나갔다. 선조 3년(1570) 권호문이 혼자 청량산을 유람하는 과정에서 남긴 다음 일기는 류운룡과 예안사림의 각별한 관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저녁에 烏川 後凋堂에 도착하니 주인(金富弼)이 문밖으로 나와 맞아들였다. 그 동생 愼仲(富儀)․惇敍(富倫) 및 柳應見(雲龍)이 먼저 와 있어서 만났다. 서로 끌며 寢堂에 들어가 술잔을 돌리며 마셨다. 밤 三鼓 때 달빛을 밟고 雪月堂으로 향하여 또 술잔을 기울였다. 아울러 紙筆을 펴 각자 떠오르는 감상을 하나씩 詩로 읊도록 했다. 後凋兄이 韻을 부르며 詩를 재촉했다. 내가 먼저 몇 구절 및 古風 한 首를 지으니 모든 사람들이 혹 화답하고 혹은 못했다. 닭이 울 때서야 각기 돌아가 잠을 청했다.39)


이러한 류운룡의 예안사림과의 교유는 남명학파나 그들이 지닌 원칙론적 사고가 갖는 善․惡의 이분법적 자세를 일정하게 순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權好文에게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할 경우 草野에 머물러야 하겠지만 事案이 합당한 지의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한 번 가버린 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40) 是非는 분명하게 가릴 필요는 있지만 그것이 결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자세는 학파 내부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접점에 위치하게 되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류운룡의 면모는 이황의 장례를 둘러싼 제자들의 견해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禮葬을 사양하라는 이황의 遺言에 따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遺族 및 대다수 제자들과, 조정의 명령을 받고 禮葬에 따라 성대하게 치르려는 加定官 金就礪와의 입장 차에서 비롯되었다. 김취려는 이황을 가장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했던 것으로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족과 제자들의 견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장례절차에서부터 石物을 조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사안마다 견해차가 노출되었고, 급기야 유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울음을 터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를 보다못한 류운룡이 나서 김취려에게 禮法에 따르되 스승의 遺志를 존중하여 평소 가르침대로 장례를 치르도록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禮葬 자체가 非禮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일은 유족과 제자들의 公論을 들어보고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강조했다.41) 이러한 그의 주장에 의해 결국 김취려가 물러서게 되었고, 모든 일은 이황의 遺言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황의 장례를 둘러싼 그 같은 학파 내부의 갈등은 喪禮 및 祭禮에 대한 학파적 공감대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데 근원적인 원인이 있었다. 물론 사림들의 장례절차 등 제반 儀式은 󰡔禮記󰡕나 󰡔朱子家禮󰡕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그것이 조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으로 조항의 해석에 따른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황도 그 같은 현실적 요구에 따라 단편적인 사안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독자적 해석에 따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 과정에서 古今의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장례 때 세속의 폐습으로 굳어질 것을 우려하여 油蜜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42) 등 화려한 의례를 간소화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의례에 대한 해석과 견해는 종합적으로 정리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고, 그에 따라 학파의 입장을 규정하는 禮說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과제는 자연 그를 계승하는 제자들의 몫으로 넘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류운룡이 상례에 대한 학파 내부의 견해차를 극복하고 이황의 장례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喪禮에 대한 남다른 폭넓은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趙穆이 練服節目을 물어오고 權好文이 碁制節目을 질의해 올 때마다 󰡔禮記󰡕를 비롯해 󰡔朱子家禮󰡕 󰡔瓊山儀禮󰡕 등을 참조하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피력할43) 정도로 禮說에 관한 한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그의 禮說도 “禮의 큰 줄기는 百世라도 변하지 않는다”44)고 하듯이 철저하게 古禮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朱子家禮󰡕가 󰡔禮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禮가 무너진 뒤 새롭게 고쳐진 것인데다 현실적으로 행하기 어려운 것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라며 이를 준수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들을 현실에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모색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도 했다. 예컨대 그는 初喪 때 입는 衰服을 練祭 때까지 입어야 하는 것이 예법상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자신이 경험해 본 결과 최복이 그 동안 헤어지고 떨어져 갈아입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는 점을 들어 난처한 상황에서는 예법도 고칠 필요가 있다45)는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조상을 추모하는 각종 제사를 그림을 곁들여 그 儀節을 소상하게 설명한「追遠雜儀를 저술한46) 것도, 古禮를 준수하면서도 현실적 여건에 맞는 祭禮를 확립하려는 그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고금을 관통하는 유교적 의례에 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家學으로 정착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현종 7년(1666) 왕실의 服喪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宋時烈의 禮說을 辨破한 영남유림 1,100명의 議禮疏를 그의 가문이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疏章과 함께「喪服考證」上․下篇이 첨부되는 등 전례없이 상세한 이 의례소는 南人 禮說의 결정판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47) 이를 작성한 장본인은 류성룡의 손자인 柳元之였고 疏頭로서 이 상소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그의 증손 柳世哲이었던 것이다.48)



Ⅲ. 柳雲龍의 現實對應 자세

李滉의 장례를 둘러싼 제자들의 불화는 학파 내부의 집단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배경에 학파적 위상문제에 대한 시각차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각각의 입장에 따른 내부 불화의 여지는 잠복된 형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스승의 學問과 精神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여 거기에 충실함으로써 학파의 내면적 토대를 구축함과 동시에 향촌을 무대로 저변을 확대하며 독자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입장과, 사림세력이 정국주도권을 확보한 이후 학파를 매개로 분열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를 통해 학파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입장의 차이가 일정한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입장차이는 학파 내부의 處士指向型 내지는 官僚指向型 인물들의 분화에 따른 것으로 그들의 현실인식에 따른 대응태도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퇴계학의 심화와 현실적용을 위한 역할분담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지만, 현실인식에 따른 학파 내부의 심대한 갈등을 초래할 여지도 없지 않는 것이었다. 趙穆系와 柳成龍系의 협력과 갈등의 교차는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49)

조목과 류성룡은 다같이 이황의 대표적 제자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인품을 비롯한 학문방법 및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에 있어 현격한 차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목은 陶山書院에 配享될 당시 ‘守志林泉’․‘篤志不懈’50)라 하여 평생동안 지조를 굳건히 지키며 山林으로서의 풍모를 지켰다고 평가될 정도로 內外를 관통하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며 剛毅의 인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류성룡은 온후하면서도 의연하여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을 갖추고, 엄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친근감을 유발했다51)고 하듯이 溫柔한 풍모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의 그 같은 인품상 차이는 학문자세에 있어서도 일정한 견해차를 유발하고 있었다. 특히 조목은 󰡔心經󰡕을 읽기를 좋아해 일생동안 勤苦․受用의 경지로 삼았고 經傳에서 유래한 諸儒의 說을 神明과 같이 믿고 嚴師와 같이 공경하여 晝誦夜讀으로 心을 이해하는 데 힘썼다52)고 할 정도로 心學의 탐구에 매진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이황이 초학자가 학문을 시작하는데 읽어야 할 책으로 󰡔심경󰡕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53)고 가르치며, 스스로도 󰡔心經󰡕을 四書와 󰡔近思錄󰡕의 아래에 두지 않을54) 정도로 그것을 尊信한 데 따른 영향이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거기에는 心이 궁극에 性情을 統攝하듯이 우주와 인성의 원리적 면보다는 근원적 면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이에 반해 柳成龍은 程․朱 이외의 글을 읽지 않는 학자들의 배타적 자세를 비판함과 동시에 󰡔心經󰡕․󰡔近思錄󰡕에만 집착하는 풍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여기에 매진하는 학자의 경우 곧 나태해져 初心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명예를 구하는데 그것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55)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心이 비록 一身의 가운데 있으면서 천하의 이치를 관장하고 우주의 사이에 心의 境界가 아님이 없으나 근본적으로 出入이 없다56)고 주장하듯이, 그것이 성리학의 원론적 측면을 설명할 수 있을 뿐 현실의 다양한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思를 학문의 근본으로 제시하며, 농부가 밭을 경작하는 심정으로 마음의 밭을 경작하고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법이라57)며 思의 실용적 측면을 강조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결국 조목이 성리학의 근원적 이해를 통한 원론적 측면에 매진한 것과는 달리 류성룡은 그것의 활용처를 염두에 둔 經世的 측면을 중시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58) 그러한 그들의 학문적 차이는 두 사람의 出處觀에서 있어서도 견해차를 유발하는 근거가 되었다. 南宋代 학자로 높은 학문적 수준으로 元에서도 발탁된 적이 있는 魯齋 許衡의 인품과 처세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평가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조목은 허형의 사람됨을 논하면서 그가 聰明博學하고 躬行實踐함이 있었으나 元에 벼슬하며 시류와 타협했던 점을 개탄하며 士君子의 出處의 어려움을 토로함으로써59) 상대적으로 出處義理에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려 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許衡이 元에서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옹호하면서, 오히려 周 武王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首陽山에서 餓死한 伯夷의 행위가 반드시 仁이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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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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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취당 선조와 생년 몰년 같은신 어른입니다. 사촌마을 외가에 오시면 친구요 퇴계문하에 동문 수학 하신 분 으로 사료 됩니다.또한 이 어른들의 일화가 사촌마을 어르신들이 자주 언급 하십니다. 외종질(만취당)-존고종숙(겸암,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