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朽淺先生集 황종해(黃宗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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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1-26 10:38 조회1,370회 댓글0건본문
황 종 해(黃 宗 海)
1579년(선조 12년)에 태어나서 1642년(인조 20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회덕이고 호는 후천이다. 아버지는 덕휴이고 아들을 훌륭
하게 기른 분이다. 그는 24세 때 한강 정구를 사사하여 심성의
학문을 연마하였다. 목천에 서원이 없는 것을 탄식하여 후배의
강학처를 제공하고저 도동서원을 세웠다. 목천의 제일의 유학자
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며, 순조 때에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그
의 문집이 지급까지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현동(縣東) 삼성동
(三省洞)에 있다.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으로 황덕휴(黃德休)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자 양호(兩湖) 유생(儒生)들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정인홍의 전횡을 논박하였고,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였으며, 1618년 연산(連山)으로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 예학(禮學)을 강의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유(張維)의 천거를 받아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628년(인조 6)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 欽) 등의 천거로 영릉참봉(英陵參奉)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사 상
그는 장현광(張顯光)·김장생·조익(趙翼)·김득신(金得臣) 등과 서신 왕래하였고,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 서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회덕황씨
황종해(黃宗海)는 황덕휴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3)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1613년(광해군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1618년(광해군10) 연산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1628년(인조6)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그의 아들 황유(黃裕)는 태종의 부마로 회천위에 봉해졌다. 후천(朽淺) 황종해는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덕휴(德休)의 아들로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꼐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인조반정 후에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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