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역사속의 영남 사람들=김도현--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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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6:33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독립투사 일대기]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의 항일투쟁과 순국 | |
번호 : 230 글쓴이 : nahan |
조회 : 69 스크랩 : 0 날짜 : 2007.01.30 19:42 |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의 항일 투쟁과 도해(蹈海) 순국
벽산 김도현 선생은 1852년에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1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김씨(金寧金氏)이며 자(字)는 명옥(明玉)이고 호(號)는 벽산(碧山)이다. 부친은 참봉 김성하(金性河)이고 모친은 한양조씨 조언호(趙彦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담대하였다. 조부인 괴암(槐巖) 김하술(金夏述)로부터 유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특히 <춘추(春秋)>에 깊이 침잠하였다. 이후 각지의 석학들을 찾아 토론을 나누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으며 중년 무렵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을 만나 퇴계 선생의 도학과 대의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 깊이 감동하여 사제(師弟)의 연을 맺었다.
1882년 임오년(壬午年)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간신들의 발호를 보고 개탄하며 향리로 돌아와 다시는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
1894년 종숙 청헌(靑軒) 김성수(金性洙) 등 일가 친척과 함께 인근 동리의 장정을 모아 상청 뒷산 검각산에 검산성을 수축하고 진법훈련과 총포 훈련을 실시하며 의병 봉기를 준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왜적에 의해 시해되고 전국적으로 단발령이 시행되자, 벽산 선생은 이를 한탄하며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1896년 음력 1월 5일, 류시연(柳時淵) 등과 청량산(淸凉山)에서 항일 의병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후 봉화, 영주, 안동을 점령하고 낙동강 영호루 앞 백사장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영양, 진보, 청송, 영덕, 영해 등지를 순회하며 의병의 기세를 떨쳤다. 음력 2월초, 예안에서 스승인 향산 이만도 선생의 의진과 합진하고 중군장에 취임하였다. 연합의진의 선봉대로 상주 태봉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 십여명을 사살하였다. 음력 2월 19일, 왜군의 방화로 안동이 불바다가 되었다. 음력 2월-3월, 진보의 의병장 방산(舫山) 허훈(許薰: 왕산 허위의 큰형)과 연합의진을 구성하였다. 음력 3월초, 안동 김도화(金道和) 의진에 참여하여 왜적 소탕에 매진하였다. 음력 3월말, 강릉 의병장 민용호(閔龍鎬)와 합진하고 선봉장을 맡았다. 음력 3월말, 강릉 대공산성과 삼척 갈야산 전투에서 왜적 100 여명을 사살하였다. 의병 진영도 큰 피해를 입어 연합의진이 해체되었다. 음력 4월말, 영양으로 귀환하여 검산성을 수리하고 다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음력 5월초, 벽산 선생의 고향인 상청마을을 침략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음력 5월 12일, 영양군 입암면 사부고개 전투에서 의병 십여명이 전사하였다. 음력 5월말, 영양읍 진마골 전투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았으나 분전하여 이를 물리쳤다. 음력 5월말-6월초, 영양, 울진, 영해, 영덕 등지를 돌며 의진을 수습하였다. 음력 6월 4일, 김하락(金河洛) 의진을 구원하러 영덕으로 출병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의병장 김하락 상처를 입고 호호대에서 강물에 투신 순국하였다. 음력 6월 초, 영덕에서 패퇴한 김하락 의진의 장병들을 수습하여 영양 수비대 공격을 모의하고 진격했으나 아깝게 실패하였다. 음력 6월 중순-9월간, 전국 의진이 모두 해산하였으나, 벽산 김도현 의진만 홀로 분전하며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등지를 돌며 의기를 북돋우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음력 9월 9일 상황이 불리하여 부득이 영양군 청기면 구매리 여미골에서 의진을 잠시 해산하였다.
1903년, 오읍 도집강에 취임하여 관의 감시를 피하면서 합법적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비밀리에 다시 포수 50-60 명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 강제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중업(李中業), 류창식(柳昌植), 이주호(李周鎬), 김상종(金象鍾), 조병희(趙秉禧) 등과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상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음력 12월 영양으로 귀환하여 도산서원에 의병 봉기 통문을 발송하고, 자신은 영양 읍에서 평소 양성해온 포수 50-60 여명을 주축으로 각 면의 동지들을 모아 제2차 의병 투쟁을 시작하였다.
1906년 음력 4월, 고종황제가 벽산 김도현에게 비밀리에 밀지와 삼인검을 하사하고 의병 봉기 촉구하였다.
1907년 음력 2월, 의병 봉기 혐의로 체포되어 대구 감옥으로 이송. 모진 고문으로 괴질에 걸렸다.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09년, 송사 조인석 등과 영양 객관에 영흥학교를 개교하고 교육 구국의 신념을 실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되자 항의 순국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므로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였다. 음력 8월 스승인 향산 이만도가 단식으로 일제 강점에 항의하다는 소식을 듣고 예안으로 달려가 하루 밤낮을 모시며 조만간 스승의 뒤를 따를 것을 맹세하였다.
1914년, 부친 참봉공이 세상을 뜨셨다. 장례 절차를 마친 후 동해 대진 산수암으로 가서 일제 강점에 항의하고, 죽어가는 선비들의 기개를 다시 일으키고, 또 죽어서도 일제의 백성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결국에는 일제 침략을 막는 구국의 수호신이 되기 위하여 향년 63세를 일기로 동해바다에 투신 순국하였다.
1915년, 벽산의 문경지우인 만원(晩원) 김병식(金秉植)을 주축으로 대진 산수암에 벽산 선생 도해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파괴하여 바다에 던져버렸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
1954년 음력 11월 [도해비(蹈海碑)]를 복구하였다.
1958년, [벽산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 벽산 김도현 선생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벽산 김도현 선생은 당시 일반적인 양반 의병장들과는 달리 직접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사선을 넘나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또 당시 병신년 의진 중에서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항전하였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동해에 던져 일제 침략을 막는 수호신이 되고자 하였다. 삶과 죽음을 모두 항일 투쟁에 바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벽산 김도현 선생은 철저한 민중 중심의 의병 투쟁을 고수하여 이후 이러한 전통이 이 지역 의병장 신돌석 장군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지금도 영덕군 영해읍 대진리 산수암에 가면 벽산 김도현 선생의 도해비가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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