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권무당기 보충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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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2-16 09:29 조회1,196회 댓글0건본문
권무당기 보충해설(勸武堂記補充解說)
勸武堂記는 金永綬 興海郡守의 自筆 懸板으로, 金永綬 郡守가 勸武堂記를 쓴 年代는 英祖39年(癸未1763)이다. 勸武堂(亭)의 창건 년대가 영조37년(辛巳1761)으로, 勸武堂을 創建하고 2年 後에 勸武堂記를 썼다.
김군수는 “勸武堂記” 에 기록하기를 [興海는 바다와 접한 神靈한 고을로 勸武의 行政을 더욱 疎忽히 할수 없다]라고 적었다.
즉 바다를 이용한 倭賊의 침입을 경계하는 뜻으로 권무당의 主된 창건 목적을 한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또 권무당의 창건목적을 표시한 것은 어떤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勸武堂記의 上記 句節이 유일하다.
흥해는 바다를 접한 邊方으로 관군이 있었으나 數的으로 매우 劣勢여서 왜적에게 주도권을 상실한 관군은 상징적일 뿐이었다. 왜적들이 사흘이 멀다고 배를 타고 쳐들어 와 곡식을 빼앗고 농사에 없어선 안될 소(牛)를 잡아가고 고분거리지 안는다고 구타와 심지어 살상을 일삼는 고통에서 왜적의 침입에 능히 대처를 못하는 실정에서 고을은 날로 피폐되었음을 유추해 본다.
이를 본 김 군수는 무관 목민관으로써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을 것이고 용서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倭軍도 아닌 倭賊에게 말이다. 김 군수는 어느 누구의 힘을 바라지 않고 그 스스로 내가 맡은 고을은 내가 지킨다는 무관특유의 氣槪를 보이고 있다. 오직 武力에는 武力뿐임을 强調하고 郡城(현, 城內里齊南軒)의 남쪽들에 勸武堂을 創建하고 고을 靑年들을 불러모아 그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강도 높은 武術敎育으로 精銳官軍을 능가하는 강력한 민병으로 훈련을 시켰다. 상징적인 관군만의 힘으로 감당키 어려웠던 지역방어를 강력히 훈련된 고을 청년들과 힘을 합해 고을 경계에 나서게 되니 그제서야 흥해 고을에는 왜적이 얼씬도 못하였고 고을은 안정을 찾았다는 설화도 있지 않은가? 또 각 마을에는 학당을 설치하고 訓導를 배치하여 백성들의 學問敎育에도 心血을 기울이고 이어 公平課稅로 백성들의 怨聲을 解消시켰고 고을 百姓들과 진지한 議論을 하는 등 그 시대에 이미 民主的인 牧民官 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무정을 창건하고 낙성식을 하던날 궁사모두를 모으고 “나는 이제 조그만 일을 시작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며 무술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무술훈련에 무한히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 註
1) 舊, 興海邑誌와 朝鮮寰與勝覽 等 이 地方文獻의 淸白吏에
◉. 金永綬 郡守를 비롯하여
◉. 兪膺煥 郡守(夫射者六藝之懸板~郡守兪公膺煥善政去思碑의 主人公)
◉. 李應權 郡守(賞射畓結役矯捄記懸板~郡守李公應權善政碑의 主人公)
◉. 成大中 郡守(興海九堤記績碑建立당시의 군수)等 勸武堂 活性에 心血을 기울인 그 時代의 郡守들의 銜字가 羅列되어 있고
2) 弓道場의 명칭을 勸武堂으로 命名한 것은!!
(1)文獻에는 大闕내에 勸武軍官 이라는 武官이 약간 명이 있었으며 役割은 大闕內 將卒들의 무술훈련을 指導하였음.
(2)金永綬 郡守가 弓道場의 名稱을 勸武堂(亭)으로 命名한 것은 자신이 武 官이었기에 위와 같은 來歷에 緣由하고 있다.
傳하는 說에 의하면 光復當時 까지도 歷史事件들을 기록한 많은 冊子들이 있었다고 하나 6. 25戰禍를 겪으며 그 冊子들은 간 곳 없이 사라졌으니 역사추적 업무에는 하늘의 구름잡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이도 歷史事件을 記錄한 3基의 碑와 4扁의 懸板이 간신히 脈을 엮어 주고 있어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또 本 지역에서도 “文”의 역사는 비교적 잘 다듬어 지는 반면 唯一한 “武”의 역사는 관리가 소홀하기만 합니다.
本人이 冊을 쓰기로 마음을 굳힌 理由도 이와 有關합니다.
역사적으로 “文尊武卑” 思想에 陶醉되어 武官이 천대받던 시대의 國家는 外侵으로부터 몸살을 했고 武官의 士氣가 충천한 때는 國家가 예외 없이 平和로워 졌다는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筆者-
<필자는 포항의 鄕校에 계시는 李正業 先生이 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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