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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눌암(김찬)선조님 자료 -2-묘갈명을 지은 용주(龍洲) 조경(趙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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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3-15 09:42 조회1,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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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 용주 조경선생은 눌암(김찬)선조님의 사위입니다.  묘소는 포천에 있으며 본관은 한양조씨로서 우리 김문과는

통혼을 많이 한 집안입니다.

 

눌암선조님의 묘지명도 사위인 용주선생께서 지으셨습니다.

 

조경(趙絅)2
1586(선조 19)∼1669(현종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며,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 東槎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경 영정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李範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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