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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대동인물고(12)-김뉴,김부민,김성목,김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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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7-03-19 23:28 조회1,49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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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寧金氏 本貫및 始祖의 由來

 

김녕김씨의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네째 아들인 은열(殷說)(大安君)의 칠세손(七世孫)이

며, 동정공(同正公) 봉기(鳳麒)의 아들로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시며, 경순왕(敬順王)의 팔세손(八世孫)이요, 시조

(始祖) 대보공(大輔公)의 三十五世孫이시다. 수성군(隨城君) 휘 품언(諱 稟言)의 현손(玄孫)이요. 중서령 문정공 휘 순보

(中書令 文正公 諱 順輔)의 증손(曾孫)이시다.


공(公)은 고려 인종 원년(高麗 仁宗 元年(1123)) 때 한림원(翰林院)에 오르신 뒤 병부시랑동북면병마사(兵部侍郞 東北面

兵馬使)를 역임하시면서 많은 치적(治績)을 남기셨고, 인종십삼년(仁宗十三年(1123)) 묘청ㆍ조광(妙淸 趙匡)등이 서경

(西京)에서 난(亂)을 일으킬 때 공(公)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妙淸)의 난(亂)을 평정(平定)

하신 공(功)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시어 정당문학(政堂文學)광록대부 평장사(光祿大夫 平章事)에 오르셨으며, 금

주군(金州君)을 훈봉(勳封)하시었다. 그 후 삼년간이나 계속해 오던 국란(國亂)을 평정하시니, 왕은 공(公)을 높이 칭찬하시며, 식읍천호(食邑千戶)를 下賜하시고 상락군(上洛君:尙州)으로 이봉(移封)되시었으니, 이 어른이 우리의 봉관조(封貫祖)이시다. 배는 부부인 개성왕(配府夫人 開城王)氏이며, 묘는 개성 송악산(墓開城松嶽山)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

되었다.


관조(貫祖)께서 봉군(封君) 받으신 금주(金州)는, 성종 십사년(成宗 十四年:995)에서 원종 십일년(元宗 十一年:1270) 사

이에만 써 왔고, 그 후 다시 김녕(金寧) 또는 분성(盆城)으로 고쳤다가 충선왕 이년(忠宣王 二年:1310) 부터는 김해(金海)

로만 써왔기 때문에 우리의 본관(本貫)을 김해(金海) 혹은 분성(盆城)으로 써 왔던 것이다.


한편 시조(始祖)가 전연 다른 가락국 수로왕 후예(駕洛國 首露王 後裔)들도 같은 김해(金海)로 본관을 써왔기 때문에 선

김(先金)이라 일렀고, 김녕군(金寧君)의 후손인 우리 종문(宗門)은 후김(後金)이라 불러 구분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선김(先金)이라 이르던 수로왕 후예들과, 경순왕(敬順王) 후손인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들 사이에는 같은 본관(本貫)을

쓴 관계로 여러가지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 김녕 종문(金寧 宗門)에서는 헌종기유(憲宗己

酉:1849)와 고종 갑신년(高宗 甲申年:1884)에 두 차례나 정부에 청원(請願)하여 당시 예조(禮曹)의 비준(批準)을 받아 본

관(本貫)을 김녕(金寧)으로 쓰게 된 것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흥(時興)의 아들 향(珦:원정공)이 고려 인종(仁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병부의 으뜸 벼슬, 정3품)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

 

랐으며, 그의 동생 순(珣)은 사헌부지평(司憲部持平)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추증되었다.


향(珦)의 증손 귀갑(貴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순

절(殉節)하였다.


공민왕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한 정병(挺丙)은 향(珦)의 5세손으로 1316년(공민왕 10)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으며, 광저(光儲)는 현(峴)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사법부의 으뜸 벼슬ㆍ종2

품)에 이르렀다.

 

.................후략............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궁금했던 의문이 대부님 노고 덕에 해결되었습니다. 김부민은 김珦이며, 김향은 김녕김씨라는 사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감사합니다.
김녕김씨도 '상락'이라는 군호를 받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