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신륵사와 모재 우거_계암일록에서
페이지 정보
김윤식 작성일07-03-22 12:34 조회1,471회 댓글0건본문
신륵사와 모재 우거_계암일록에서
◆溪巖日錄 一 / 乙巳 二月 一日
神勒寺, 即甓寺也, 自前朝號爲巨刹, 余乙酉甞過此, 朝與伯溫輩, 登東臺, 崖壁峻立, 長流走其下, 臺上有浮圖宏巨僧云, 懶翁遊此寺, 得道成佛, 藏其舍利于此, 有神龍出自江中, 爭取舍利, 至今岩上留其跡, 其言誕妄不足信也, 巨塔之北, 有石碑, 神勒寺大莊閣記, 麗代所立也, 舊法堂前, 亦有塔, 各爲雲龍之狀, 窮極巧妙, 寺後有石鍾如瓮, 僧云, 藏瀨翁頭骨, 前有長明燈, 刻石爲殿宇, 人形龍甲, 雖木刻工妙, 殆未及此, 左有石碑, 撰牧隱李穡, 書韓脩, 碑後列刻舍施人姓名, 自朝士及婦女, 下至凡庶, 昭昭然可考, 嗚呼使此碑, 爲忠孝賢德功業之記事, 則將永垂不朽, 而顧以無用之費, 貴賤男女, 無不畢載, 可見麗代崇異敎之至也, 碑文甚淸妙, 牧隱亦間世人也, 豈非循流俗之趨也耶, 覽畢登舟, 風色甚寒, 酌一盃過驪江, 即驪州前也, 江廣可一二里, 隔岸家屋, 人影往來, 景物倍勝於興元倉矣, 過海潭至二十灘, 灘淺而甚廣, 至梨浦村落在水左, 慕齋先生所居也, 過婆娑城, 頃年所築, 今棄廢不守, 朝廷之爲虛事, 亦可一嘆也, 至西任灘, 灘上甚廣, 灘下爲深潭, 過般若灘, 波濤迅躍, 激打船舫, 過楊根郡至大灘泊舟, 寒風終日, 至暮尤緊, 宿灘上村.
신륵사는 곧 벽사다. 고려조부터 거찰로 이름났는데, 나는 을유년에 이곳에 들러 관람했었다. 아침에 백온 등과 함께 동대에 올랐다. 동대는 깎아지른 높은 곳에 서 있는데 그 아래로 긴 강이 흐른다. 동대 위에는 거대한 부도가 있다. 스님이 이르길 “나옹 화상이 이 절에 머물다가 득도하여 성불하였기에 그 사리를 이곳에 보장하였다. 신룡이 강 복판에서 나와 사리를 쟁취하려고 싸웠는데, 지금도 바위 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말이 생겨난 것은 허망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큰 탑 북쪽에 신륵사 대장각기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세운 것이다. 옛 법당 앞에도 탑이 있는데 각각 운룡의 형상을 새긴 것이 교묘하기가 극에 달했다.
절 뒤에는 항아리처럼 생긴 돌종이 있다. 스님이 이르길 나옹 화상의 두개골 사리를 보장했다고 한다. 그 앞에 장명등이 있는데 돌에 궁궐 전각과 같은 화려한 집의 지붕을 새기고 사람의 형체에 용갑을 조각했으니, 나무에 새긴다 한들 이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왼쪽에 목은 이색이 짓고, 한수가 글씨를 쓴 비석이 있다. 비석 뒷면에는 나옹 화상의 사리를 수습할 당시 시주를 한 사람들의 성명이 적혀 있다. 조정에 출사한 선비와 부녀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인에 이르기까지 확연하여 상고할 수 있다.
오호, 이 비석으로 하여 충효 현덕 공업의 기록이 영원히 이어져서 썩어 없어지지 않도록 한 것인데, 돌아보건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신분의 귀천과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고려시대에 이교(불교)를 숭배한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알 만하다. 비문이 극히 청묘하니 목은은 역시 세상에 드러난 인물이다. 급속히 변하는 세상 풍속을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절 구경을 마치고 배에 오르니 바람 기운이 너무 차갑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여강을 지나자 곧 여주(읍치) 앞이다. 강폭이 가히 1~2리나 되고, 강 언덕 집들에 사람 그림자가 오락가락하니 흥원창의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
바다 같은 해담을 지나 이십탄에 다다르자 수심은 얕으나 강폭은 훨씬 넓어졌다. 여강 왼쪽에 있는 이포에 이르니 모재 김안국 선생이 살던 곳이다.
파사성을 지났다. 파사성은 근래에 쌓았는데(신라 때 축성, 임란 때 증수), 지금은 버려 둔 채 폐기하여 지키지 않으니 조정의 허망된 일이 또한 한탄스럽다.
서쪽으로 임탄에 이르니 위쪽이 더욱 넓고, 임탄 아래로 깊은 담을 이루고 있다. 반야탄을 지나자 파도가 더욱 빠르게 뛰어올라 거센 물결이 배를 격렬하게 때린다. 양근군을 지나 대탄에 도착해 정박했다. 차가운 바람이 하루종일 불더니 날이 지자 더 심해져서 대탄 위 촌락에서 묵었다. - <계암일록 1 : 을사년 2월 1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