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비 원문, 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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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4-04 11:40 조회1,150회 댓글0건본문
原州 金悌甲忠烈碑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行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毅齋金先生忠烈碑
萬曆壬辰之亂東方自剖判以來所未有也兇鋒所向列邑望風奔潰無能禦之者時公守原州奮義雪」
涕募聚兵粮保鴒原城爲死守計以忠義勸勵士民土人姓鄭者素稱驍猛公勗仁事鄭對以賊鋒銳」
甚宜出避乘便圖之未晩也公叱曰奴不足與謀麾而出之仰天嘆曰吾一死決矣乃益修守戰備晝夜躬自巡飭城中恃以無惧賊詗知公固守先遣一使誘令降且脅之公立斬其使以徇軍中人皆股慄莫」
敢仰視衆議以爲明日賊必大擧而來肆其忿莫如避之公曰守土之官去將安之敢言避者斬衆議遂」
定翌朝賊果大至四面矢石雨集城中亦殊死戰日過午矢盡力竭城遂陷軍官吳杭力士也欲背負以」
避公曰平生受 國厚恩臨難豈忍偸生若輩避之亦可也遂朝服坐胡床流矢中背猶不動賊執公迫」
之令拜公植立不屈罵不絶口遂被害少子時伯終始不離側與公同死後夫人李氏亦伏劒而死方有」
娠云吳杭等乘夜入城收得三尸與士人高藁葬于州之酒泉縣賊退始歸葬驪州地後移葬于忠州」
福盛洞城陷前二十日寄子時獻書曰余今復何爲哉只期不失一節而己至是果如其書初守鴒原也」
李判書墍以號召使在原之西界貽公書曰縱欲守土死職奈城孤事急何須來與墍共事驪原之境隨」
勢進退可也公復書陳大義示以必死無貳李公謂人曰此人忠憤如此豈人所移易者耶惜乎其死矣」
嗟嗟不己韓西平浚謙代牧本州報觀察窃念變起以來無一人效死守土者獨前牧使金以死守城至」
於闔門被害而不移其志朝廷嘉其忠節旣 贈正卿之職則葬之際宜有優恤之典請上 聞于朝」
噫公之自守之確於寄子書可見也公之見信於人於李公言可知也公之節義之高於西平報可驗也」
一城之中一日之內父而死忠子而死孝婦而死節是昴發夫婦之雙節卞壺父子之幷死可謂兼之也」
捨命不 渝爲萬世三綱之標準倘所謂臨大節不可奪者非耶倘所謂刑于妻御于家者非耶人貌榮名」
豈有旣乎萬曆戊申故相國完平白沙一松諸公建白㫌表門閭今其里有忠臣孝子烈女之門原人又」
爲之立廟以祠之今 上朝賜額曰忠烈遣禮官致祭公諱悌甲字順初姓金氏安東人爲人魁偉有」
大節簡默好讀書自號毅齋登文科歷敭淸班三按爾道其守原自求補外也叅判時獻其胤也而無嗣」
時寧越郡守尙重卽時伯之孫而爲次嫡者也今左相許積牧使許秩其宅相也秩又爲原州牧繩其遺」
化士民懷之銘曰」
死非難處死則難惟君子捨生取義 當危急視如平素勵忠憤不移終始 臣死忠婦貞子孝扶植萬」
古之綱常 雉岳東峙兮鳳川西流先生之名與之俱長」
□人生員鄭□衡謹摭故老所傳以記巓末因敬書
崇禎丙子後三十五年庚戌三月 日立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충렬비(忠烈碑)
--조선국(朝鮮國)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세자사(世子師)에 증직(贈職)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의 충렬비(忠烈碑)이다.
--만력 임진년(1592)의 난리는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것이다. 왜적들이 가는 곳마다 여러 고을이 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서 모두 무너져 이것을 막아낼 자가 없었다. 대세가 이러한 때에 김공이 원주 목사로 있었는데 의리로 분발하여 슬픔을 딛고 일어나 군사를 규합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아 영원산성에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 계획하고 충성과 의리로 이 고을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이 고을에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날세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이 있어 김공이 이 선비에게 함께 고을을 지키자고 하였더니 정씨가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날카로우니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여도 늦지 않다.”고 하기에 김공이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과는 이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하고 군사를 지휘하여 나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번 죽기를 결심하였다.”고 다짐하였다. 이에 전쟁의 준비를 힘써 갖추고 밤낮없이 성(城)안을 몸소 순찰하니 고을 백성들이 믿고 두려워 함이 없었다. 왜적이 멀리서도 김공이 굳게 지키는 것을 알고 먼저 한사람의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고 또한 협박하였다. 김공은 즉시 사자의 목을 베어 군중들에게 보이니 군사들이 그 위세에 경탄하여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오늘 사자를 죽었으니 내일은 반드시 왜적이 몰려와 그 분풀이를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김공이 “나라를 지키는 관리가 피한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피하자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형하겠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드디어 싸우자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과연 왜적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성을 지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한낮이 지나자 화살이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힘이 장사인 군관 오항(吳杭)이라는 사람이 김공을 업고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김공이 “내 평생동안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왔는데 국난을 당하여 어찌 한 몸만을 살겠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피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등에 화살을 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아니하였다.
적이 쳐들어와 김공을 붙잡고 절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김공은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 왜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작은 아들 시백(時伯)도 처음부터 끝까지 김공을 모시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김공과 함께 죽었고 부인 이씨도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는데 이때 부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밤을 틈타 오항(吳杭) 등이 성안에 들어가 세분의 시신을 거두어 가지고 고현(高峴)이라는 선비와 함께 주천현(酒泉縣)에 임시로 장사(葬事)를 지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여주(驪州)에 다시 장사를 지냈다
(옮긴이 주(註) : 선조 27년(1594) 충주 홍복동(洪福洞)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는 다른 기록으로 확인을 요함)가 뒤에 충주 복성동(福城盛)으로 이장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20일전에 큰 아들 시헌(時獻)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내가 이제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커다란 절개를 잃지 아니하면 그 뿐이다.”라고 하더니 그 글과 같이 김공은 대의에 순응하였다.
--처음에 영원산성을 지킬 때에 판서(判書) 이기(李墍)가 호소사(號召使)로서 원주의 서쪽 지경에 있으면서 공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비록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지켜 직분을 다하고자 하나 성은 외롭고 형세는 급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모름지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나와 같이 함께 협력하다가 여주와 원주 지경의 왜적의 형세를 보아 나가던지 물러서던지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김공이 다시 답서를 보내어 말하고 반드시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글을 본 이공(李公)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충성심과 왜적에 대한 분노가 이와 같으니 타인이 어찌 그 충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깝구나. 그 죽음이여.”라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이 원주 목사로 와서 관찰사에게 아뢰기를 “생각컨대 왜란이 일어난 뒤로 죽음으로써 국토를 지킨 자가 없는데 전에 목사로 있던 김공이 홀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다가 온 집안이 망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으나 그 뜻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서 이미 정경(正卿)의 직첨을 주었으니 장사 지낼 때에 있어서도 그것에 합당한 대접이 있어야 하겠기에 이 일을 임금께 이뢰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아. 슬프다. 김공이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는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 볼 수 있고, 김공이 다른 사람에게 보인 신뢰는 이공에게 한 말로서 알 수 있다. 김공의 절의가 높은 것은 서평 함준겸의 보고에 증험할 수 있다. 한 성안에서 하룻동안에 아버지는 충성으로 죽고, 아들은 효도에 죽고, 부인은 절의로 죽었으니 이것은 중국 송나라 조묘발(趙昴發) 부부의 쌍절개와 중국 진나라 변곤 부자가 함께 죽은 것을 겸하였다 하겠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만세토록 삼강(三綱)의 표준이 되었으니 아마 이른바 큰 절개에 임해서 빼앗을 수 없는 자가 아닌가. 아마도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일가를 다스리는 자가 아닌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는데 어찌 다함이 있으랴.
--만력 무신년(1608)에 옛 정승 완평(完平). 백사(白沙). 일송(一松)이 김공이 출생한 마을에 정표문려(旌表門閭)를 세우도록 건의를 하여 이제 그 마을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이 서있고, 원주 사람들이 또 김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이제 나라에서 ‘충렬사(忠烈祠)’라는 액호(額號)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공의 이름은 제갑(悌甲)이요, 자는 순초(順初), 성은 김(金)씨니 안동(安東)사람이다. 사람됨이 뛰어나고 절개가 굳고 말이 적고 과묵하며 책읽기를 좋아하며 스스로 의재(毅齋)라고 호(號)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역임하고, 세 번씩이나 두 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고 원주 목사가 된 것은 스스로 외직(外職)을 구하였던데서 연유한 것이다. 참판인 시헌(時獻)은 그의 맏아들로 후사(後嗣)가 없고, 현재 영월군수 상중(尙重)은 시백(時伯)의 손자이니 김공의 둘째 아들의 맏이다. 지금 좌의정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許秩)은 모두 김공의 외손으로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김공이 끼친 교화를 이었다. 선비와 백성들이 김공을 기려 명(銘)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
--원주 사람 생원 정석형(鄭錫衡)은 삼가 옛 어른들이 전하는 바를 모아서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경건하게 쓴다. 숭정 병자년 뒤 35년(1670)인 경술년 3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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