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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의령 기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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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2 08:36 조회1,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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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에서>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   1295년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2. <고려사절요>에서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 12월에 중찬 ●김방경이 퇴직하기를 청하니, '추충정난 정원공신 ★상락공(推忠靖難定遠功臣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을미 21년(1295), 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 ●김방경(金方慶)에게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3.<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에서

충렬공 金方慶 48---충렬공의 만년 13 (연구논문3)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김방경 무고사건은 김방경의 권력성장과 관련되었다. 당시 김방경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막강하였다.

---이때 방경은 중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일을 맡은 외에도 또 호두금부를 받고 원수가 되니 권세가 온 나라를 좌우하고, 그의 전답과 장원이 없는 데가 없었으며, 부하 장사들은 날마다 그의 문에 모여 들고 세력에 붙어 위엄을 빙자하는 자가 중앙과 지방에 횡행하였지만 금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19, 충렬왕3년12월)---

그는 국내적으로 최고직인 첨의중찬에 올랐고, 원으로부터는 호두금패를 받은 원수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막강한 권력장악에 대해 반대세력의 견제가 나왔던 것이다.

<중략>

1281년 제2차 일본정벌로 실패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조인규의 참소를 받았다. 조인규는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김방경을 참소하였고, 이에 김방경은 순마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곧 풀려났지만 그는 다시 사직을 원하였고 마침내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 그가 첨의령, 상락군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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