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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서당공(휘 성립) 할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평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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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0-08 10:18 조회1,32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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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시집살이를 통해본 여성의 삶

정 경 숙(강릉대 사학과)

 

1. 들어가기

최근 여성학운동의 성과로 뛰어난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역사적 여성에 대한 발굴과 역사적 재평가가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허난설헌에 대한 연구도 최근 활발하게 진척되고1) 그 현양사업도 크게 진작되고 있다.2)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그 사료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소수 사료에 집중되어 재인용 혹은 재재인용하는 사이에서 사소한 해석상의 문제가 제기될 시점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발전된 양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시급한 단계이다.

특히 시인인 허난설헌의 경우 그 평가가 지나치게 도식화되고 화석화되어 오히려 허난설헌의 이해를 완성시키기도 전에 식상할 위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허균 중심의 사료에 함몰 되어 허난설헌의 평가를 지나치게 가정 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 사적이고 감상적인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인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허난설헌의 도식적 이해의 단편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허난설헌의 세가지 한3)        

첫째, 왜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녔을까?

셋째,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첫째 이것은 통시대적인 혹은 근대주의적 내지 식민주의적 사관을 저변에 깐 평가이며, 그 시대 즉 조선 중기 그것도 임란이전에 살았던, 그리고 대외적으로 항상 왜변에 시달리고 대난이 예측되는 위기의식이 충만되었던 시대 인식이 배제된 인간 이해이다. 나아가서 동서붕당으로 인한 당론이 격화되고 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정의 내분과 제도적 모순으로 인하여 가정 내에 관리인 남편을 안주시키지 못하였던 시대인식을 배제시킨 이해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남녀간의 애정에만 한정시킨 편협한 인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천재 허난설헌을 이해함에 있어 친정4)과 아울러 시댁 그 시댁에는 시어머니 한 분만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대가족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 시대가 양계적 가족공동체가 온전되어 있고, 당론에 의하여 훨씬 폭 넓은 인간관계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랴.

   둘째 허난설헌은 아이를 갖지 못하였는가? 주지하듯이 허난설헌은 10여년의 결혼 생활 중에 무려 세 아이를 임신하여 1녀 1남 그리고 1회 유산 경력이 있었다. 이 정도면 부부관계도 보통 수준은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함께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김성립은 어떤 한을 가졌을까?

   셋째 김성립이라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었다. 허균의 평에만 의지해서 알아볼 염도 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난설헌은 국내외에 알려진 문인이다. 친정 오라버니의 초역사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아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만하면 16세기 조선 여인의 사회적 지위는 세계적일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여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김성립이란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본고에서는 초당에서 태어나 서울 건천동에서 성장한 후 14-15세에 결혼하여 28세에 요절하기까지의 성인으로서의 허난설헌의 삶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흔히 재예가 뛰어난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질시 때문에 난설헌의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설에 대한 근거도 허균의 몇 줄의 글에 근거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는 역적 집안의 딸이었으므로 자살의 길을 강요당하였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과연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는 어떠하였을까?


2.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본 가족관계

1) 시댁 가족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1562-1592)은 안동김문 書雲觀正公派 11세손이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7세 希壽(愁然齋, 별시문과, 사가독서, 대사헌 무오사화 후 김종직의 신원을 상소), 8세 魯 (東皐, 문과, 사가독서, 직제학 김안로를 논척하다가 유배, 퇴계의 백씨인 李瀣와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 9세 弘度((1524-1557) 南峯, 문과 장원급제, 문인화가, 典翰, 영의정추증, 윤원형 탄핵으로 甲山 유배중 卒), 10세 瞻((1542-1584) 荷堂, 문과급제, 校理, 퇴계문하에서 수학, 율곡을 논하다가 지례현감으로 좌천 임소에서 졸))과, ?((1547-1615) 夢村, 알성문과 급제, 사가독서, 輔國領中樞府使) 11세 誠立(1562-1592, 西堂, 문과급제, 홍문관 著作, 31세 임란시 전사), 正立((1579-1648, 평창군수), 12세 振((1603-1688) 증광문과 이조참의, 부제학. 駱峯. 생부 정립. 성립의 아우인 정립의 3자중 제1남을 양자로 들임, 후처인 남양홍씨 역시 생자녀 하지 못한 듯함. 김성립의 묘비명에는 無育 으로 되어 있음.)을 이어오는 가계 구성원의 일원이다. 5) 즉 법제상, 족보상 振은 허난설헌의 양자로서 아들로 간주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이다. 그의 후손들은 허난설헌을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난설헌은 14-15세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金瞻의 아들인 金誠立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은 같은 시기에 사가독서 하는 등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6) 즉 난설헌은 동인가계에서 동인가계의 이웃집으로 출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친정은 오늘날의 오장동에 위치하였고, 시아버지의 집은 남소문 앞에 있었다. 그리고 친정의 정치적 비운은 시댁의 정치적 비운과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實錄』에서 허봉, 김첨의 형제, 송응개의 형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발견된다. 이들 세가문은 허난설헌의 혼인으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더욱 돈독하여졌다.


2) 시어머니와의 관계

   시어머니 송씨는 이조판서 宋驥壽(1507-1581)의 5녀이었다. 송기수는 을사사화시 사림이 제거되기 직전에 사람들이 “형인 인수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결국 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탄을 받았다.1573년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4조를 섬기며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하였다 하여 지탄을 받았다.7) 또한 송기수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사림보다는 훈구파에 속하는 인물로 주자학주의자로 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시어머니 송씨의 시아버지인 김홍도는 을사사화시 피화되어 갑산에 유배된 후 그 유배지에서 객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시댁에서의 송씨의 입지가 세평처럼 ‘현모양처주의’에 입각해서 며느리를 박대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시어머니 친정의 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世忠   -     麒壽  -     應漑  -     敬祿      -  錫夢    - 之明이다.

        (문, 군수)  (문, 이조판서)(문, 대사간)  (현감)        (감찰)  

   10세 世忠(1468-1498))의 처(1471-1551))  남편에게 부묘됨. 1남 3녀로 처음 기재된 딸은 閔仁에게 출가하였고, 자녀관계는 기재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縣監을 지낸 鄭耆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기재된 바는 다음과 같다.

        子 鄭思重

        女 朴應賢

        子 鄭思盆

        女 申?

        子 鄭思元

   즉 출가한 딸의 시댁의 본관을 기재하지 않았고, 딸의 출생 순서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외손의 벼슬명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세 번째는 丁應斗(文, 貳相)에게 출가하여 3남4녀를 두었다. 기재순서는 다음과 같다.

        子 丁胤祚 (? ?)

        女 尹仁涵 (參判)

        子 丁胤禧 (監司)

        女 權鵬   (文 牧使)

        女 李堯臣 (郡守)

        子 丁胤福 (副提學?)

        女 趙瑞龍

   이 경우 역시 본관을 기재하지 않고 있다. 외손의 기재는 낳은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11세인 麒壽(1507-1581)의 처(1510-1583))는 대사헌 蔡枕의 딸로, 應漑, 應泂, 應洵의 3남과 6녀를 두었다. 一女는 韓克昌(벼슬 典簿) 二女는 都事 申承緖에게 출가하였다. 5녀는 金瞻(文 校理)에게 그리고 6녀는 兪對修에게 출가하였다.

한극창은 5남3녀를 두었다.  그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子 韓?, (監察)

        子  연 (文 博士)

        女 尹壽民 (文 參判)

        子 진 (進士)

        女 강개 (郡守)

        자 한용 (佐郞)

        자 한익

이녀의 자녀는

        女 任應基(生員)

        女 李應福(坡原 都正)

        子 申欽(文, 領相 諡 文貞公)

        子 申鑑 (文 參判)

즉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다.

3녀와 4녀의 경우는 전혀 기재사항이 없다. 추측컨대 출가전 사망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10세 세충의 첫째 기재녀인 민인의 처의 경우는 출가후 미자녀인 것으로 보여지므로 이 경우는 출가전 사망인 것으로 보인다.

   5녀는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에게 출가한 여성으로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경우이다. 그 자녀출생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子 金誠立(文 正字)

        女 李慶全(判書)

        子 金正立(郡守)

        女 朴燉

이 역시 출생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은진 송씨의 족보는 김정립이 임진왜란시 홀로된 두 누이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다는 기사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6녀의  자녀 서술순서는 다음과 같다.

        女 李감(文 判決事)

        女 李尙信(參判)

        女 金善餘(文 察訪)

        子 兪景曾

        子 兪學曾

        女 洪奧

이상에서 살펴본 바 딸의 자녀 즉 외손에 대한 기재 양식은 낳은 순서 대로 혹은 생존한 대로 서술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딸의 경우는 사망으로 인한 결원이 없으면 순서를 기재하지 않고 순서대로 기재하였으며, 결원의 경우 서열을 숫자로 표시하여 결원이 있음을 감지케 하였다.

   13세 敬祚의 경우는 2남 3녀중 1녀는 무기재의 경우이고, 제2녀의 기술 양식(여, 자, 자, 자, 여의 3남2녀)도 태어난 순서이고, 제3녀의 경우(여, 여, 자, 자, 여의 3녀 2남)) 14 세 錫夢의 경우의 3남2녀로 제1녀는 무기재이고 제2녀는 자녀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15세 之明의 경우는 3남5녀로서  제1녀와 제5녀가 출가하였으나 자녀관계는 미기재이다.  이상은 嘉靖(1522-1566)에서부터 崇禎(1628-1644)년간까지의 기록이다. 즉 임난을 전후한 시기까지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태어난 순서에 따른 기재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입양이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통혼관계에서만 확인 한 것이나, 기수 주변의 직 . 방계에서도 입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동 김씨의 경우 김성립이 양자를 들인 것에 비해 은진 송씨는 근친내에 입양이 없는 것에서 시어머니가 주자학적 여성관 소지자임을 입증하기는 힘들다.


3)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김성립에 대하여 ‘28세 되던 해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정팔품 홍문관저작에 그친 것을 보면,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닌 듯 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것 역시 허균의 『성옹지소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상에 文理는 부족해도 능히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은 경사에 대하여 읽도록 하면 제대로 혀도 못 놀리지만, 科文은 주요점을 맞추어서 논책은 여러 번 높은 등수에 올랐다?

   김성립의 문장 솜씨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진다. 『實錄』과 안동김문에 그의 글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시 보다는 文과 논리적인 서술에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는 바대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정서와 취향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김성립의 성품에 대하여 『東史』에 전하는 글을 살펴보자.

    “선조때 장안의 선비들이 벗을 모아 무리를 만들어서 일부러 미친짓을 하면서 괴상한 말을 만들고, 동서로 뛰어다니면서 울고 하며 서로 간에 묻기를 ‘무엇이 우숩고 무엇이 슬퍼 우는가?’하다가 큰 소리로 스스로 대답하기를 ‘문무대신이 사람같지 못하니 우습고, 우는 것은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이 슬퍼서 운다.’고 하였다. 한 때 이름하기를 登登曲이라 했는데, 이렇게 부르짖는 우두머리는 鄭孝誠, 白雲民, 柳克新, 金斗男, 李慶全, 金誠立, 鄭協 등이었는데 얼마 안가서 壬辰의 亂이 있었다.”

위의 글을 보면 당대의 정치와 잦은 왜변에 대한 관심이 높고, 감정이 격하고 표현이 거칠었던 것으로도 보여진다.

  한편 다음의 묘비명을 보면 정서적인 측면도 보인다.8)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김성립이 아둔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는 ‘28세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9) 그렇다면 주변 인물들의 급제 연령을 살펴보자.

   허엽(1517-1580)은 1546년 30세로 식년문과에 갑과 급제한 것을 위시하여, 허봉(1551-1588)은  1572년 22세로 친시문과에 병과 급제, 허성은 36세에 병과 급제, 허균(1569-1618)은 1594년 26세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사돈인 시어머니의 친정아버지인 송기수(1507-1581)도 1534년 28세에 문과 병과 급제 하였고, 아들인 宋應漑(?-1588)는 허봉의 친구로 급제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1565년(27세 이상)에 홍문관 정자 .저작을 지냈으므로 급제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아우인 應泂(1539-1592)은 음보를 거쳐 1572년 34세로 문과 병과 급제를 하였다. 참고로 율곡 이이(1536-1584)는 23세에 별시에서 장원하였으며, 퇴계 이황(1501- 1570)은 28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과거시험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28세 병과 급제는 평균적인 인재 내지 관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급제 후 김성립이 홍문관에 임용된 것은 그의 학덕이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별칭되는 청요직으로서 그 관원이 되려면 知製敎가 될만한 문장과 경연관이 될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하였으며 우선 홍문록에 선발되어야 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홍문관, 이조, 정부(조당)의 투표를 통하여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홍문관원의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주의, 낙점된 사람으로 충원하게 되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홍문관을 위시한 언론 삼사에서는 과거 등재자가 발표되면 제일 먼저 필요한 인원을 우선적으로 선발할 권리가 주어진다. 따라서 홍문관 정자로의 임용은 가장 우수한 인재임을 뜻하며 가문의 광영을 의미하는 것이다.10)

   芝峯 李睡光(1563-1628)은 거의 동년배인 김성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30세 임진왜란시 경상도방어사 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하고, 의주에서 北道宣諭御使로 지내다가 김성립의 순국을 듣고 지은 만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김군은 나의 착한 벗, 그 높은 기개에 재주도 절륜했네

        젊어서는 서로서로 도와왔으니 그 정은 형제같이 친하였어도

        문예는 세상에서 절륜하였고 출발은 청운이 화창했는데

        어찌하여 조물주는 시기를 해서 머나먼 길 천리마 발을 막았나

        임진년에 해적들이 몰아왔을 때 나는 영남병막에 부임해가고

        그대는 때마침 假記注12)이었네

        승정원에 마주서서 하던 이야기 이 어찌 한번 이별 알았으리오

          ....

        아이도 없는데다 수도 못하였으니, 이런 이치 이해하기 아주 어렵네

   안동김씨 문중에서의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발생한 허균에 인한 세평에 크게 좌우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허난설헌의 사망날자와 연령까지 기재하였을뿐 아니라 조선 말기 헌종 철종 년간에 16세손 秀敦의 청으로 양촌허씨 許傳에게 김성립의 묘비명문을 부탁하여 남긴 글이 전한다.13)

   서당공이 몸소 순국하였으니 그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국사에 일성같이 찬란하게 나타나 있으니, 가히 천추에 빛날 것이니 비록 묘도에 비명이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명이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겠는가.구태여 말한다면 세상에는 연고와 어려움이 많아서 그러할 것이다. 공의 7세손 수돈이 변변치 못한 나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묘소에   아직 행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없다는 것이 자손의 한이라. 우리 祖?는 자네의 선조이신 초당선생의 끝에 따님 蘭雪齋이라. 나의 조상의 사실과 행적은 자네가 아니고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崇政大夫 吏曹判書 義禁府使 知經筵 春秋館使 同知成均館使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經筵日講官 陽川 許傳 撰

   위의 글로 미루어보아 안동김문은 19세기 이후 집권세력의 변동하기까지 김성립의 묘비도 세우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고와 어려움이 많았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허난설헌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대단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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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아저씨, 원본 글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 전화 받고 html 태그명령어를 살펴봤더니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text파일이나 html editor 프로그램 또는 나모웹에디터, 매크로미디어 같은 프로그램으로 html 파일을 만들면 태그명령어가 짧아집니다.
아래한글 같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글을 복사해서 붙이면 우리 게시판에 '비교적' 잘 붙습니다. 이때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특유의 태그명령어가 생성되는데, 그 태그명령어가 아주 길어집니다.
이 논문의 태그명령어를 살펴봤더니 아래한글 특유의 태그명령어들이 각 행마다 붙어 있습니다.
정확히 몇 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홈 게시판에 적을 수 있는 글자 수는 제한돼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옮겨지지 않는 거지요.
아래한글이 아니라 text파일이나 html editor 프로그램 또는 나모웹에디터, 매크로미디어 같은 프로그램으로 작성했으면 이 정도 글은 한 번에 옮겨졌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