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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직제학공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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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1-02 11:21 조회1,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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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訓大夫內資判事寶文閣直提學 安東金公塡之墓碑銘幷序

公의 諱는 塡이요 本貫은 安東이시다. 新羅 敬順大王의 後裔로 高麗朝의 平章事 諱 叔承은 始祖이시고 出將入相으로 揚名한 上洛郡 開國公 宣忠協謀定難 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인 諡號 忠烈公 諱 方慶은 五代祖이시다 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 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典法判書 上將軍 諱 愃의 玄孫이시고 匡靖大夫 密直司事 寶文閣大提學 諡號 忠肅公 諱 承用의 曾孫이시며 上洛君에 襲封된 評理公 諱 厚의 孫子이시고 麗末 忠賢으로 雅號 康隱 遂安郡事 贈吏曹參判 이신 諱 七陽의 二子이시다. 母는 郡夫人 金氏로 奉常禮儀摠郞 用珍의 따님이시다. 公은 高麗朝 禑王 八年 (一三八二)에 出生하여 一四一四年 (太宗 十四) 進士試를 거쳐 同年 文科에 及第하시어 一四二四年(世宗 六) 禮曹佐郞 同十一年(一四二九) 靈巖府使 同十六年(一四三四) 禮曹正郞 同二十三年(一四四一) 司宰監正 同二十四年(一四四二) 司憲執義를 거쳐 藝文館直提學 通訓大夫 內資判事 寶文閣直提學을 歷任하시다. 公의 父親 康隱公은 稼亭 李先生을 師事하고 牧隱 李先生 圃隱 鄭先生과 再從인 惕若齋 諱 九容과 더불어 性理學을 講論하고 道義 相交하였으며 高麗가 亡하고 李成桂가 登極하여 累次불렀으나 不事二君의 굳은 忠節로 不應하고 康津 先塋下에 隱居하며 두 아드님에게 訓戒하기를 나는 前朝의 世臣으로서 비록 나라와 더불어 絶命하지 못했으나 너희들은 새 임금을 忠誠으로 도우라 하시니 公은 아우 墩과 함께 親命을 恭遜히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시다 公의 아우 墩도 一四一七年(太宗 十七) 文科에 及第하여 長興府使 集賢殿直提學 都承旨 仁順府尹 을 歷任한 賢臣으로 簡儀臺 報漏閣과 甲寅字를 製作하는 等 뛰어난 天文學者요 發明家로서 世宗의 寵愛를 받았으며 一四四O年(世宗 二十二)에 卒하시니 임금이 賜祭를 내리시다 또한 公은 孝誠이 至極하셨는데 兄弟가 모두 老母를 모시기 위하여 外職을 請하시매 世宗大王께서 孝誠에 感服하여 米豆 各 十石과 醯 醬 各一缸씩 下賜하시고 公은 靈巖府使로 아우 墩은 長興府使로 除授하였으나 그 才能의 뛰어남을 아끼어 任期前에 公은 禮曹正郞으로 아우는 集賢殿直提學으로 拔擢하고 老母를 漢陽으로 모셔서 보살피도록 하는 恪別한 寵愛를 받으시다. 公은 항상 詩禮로서 根本을 삼고 政事業務에는 淸廉과 勤實로서 盡力하시며 淸白 正直으로 處世하고 私私로이 權勢를 濫用하지 않으니 뭇 사람의 稱頌을 받으시다. 流配者를 불쌍히 여기어 上疏하여 放免하게 하시니 그 恩惠에 感謝하는 사람이 많았다. 朝鮮朝 世宗二十九年 (一四四七) 六月에 全南 康津에서 逝世하시니 享年 六十六歲이시다. 配 淑人 光州盧氏는 順和의 德을 갖추신 분으로 아드님 諱 三老를 훌륭히 길러 兎山縣監을 지내고. 縣監公의 配位는 延日鄭氏로 府使 孝完의 따님이며 祖는 烏川府院君 諱 鎭이다. 縣監公이 二男三女를 두었으니 長男 坤은 武科及第 하여 鐵原府使를 歷任하고 次男 堣는 長興庫 主簿를 지내다. 長女는 牧隱先生의 曾孫이요, 判中樞府事 李季甸의 아들인 吏曹判書 李封에게 出嫁하고, 次女는 丹陽 禹麟孫에게 三女는 同樞 延安 金愷臣에게 出嫁하다. 長男 鐵原府使 諱 坤이 二男一女를 두었으니 長男은 生員公 允粹요 次男은 慈山都護府使 允精이며 一女는 玄風 郭季元에게 出嫁하다. 次男 長興庫主簿 諱 堣는 二男 五女를 두었는데 長男 淵溪 允剛은 六臣殉節때 坡州 玉石洞에 隱居하여 號를 玉洞處士로 改稱하고 後學을 啓導하였으며 次男은 允毅로 無後하다  墓所는 처음 驪州의 白羊山麓에 모셨으나 壬辰亂 以後로 後孫들의 不敏으로 因하여 失傳되자 一九六五年 坡州 延豊里에 設壇하고 一九七三年에 十九代孫 重會의 屬文으로 壇碣을 竪立하다 一九八O年 以後 直提學公 門中에서 墓所를 찾기위해 驪州 白羊山의 失傳 墓域을 數次 踏査하고 發掘調査하다가 二OO五年 十月 公의 遺品 貫子銀製裝飾品 棺釘 等이 副葬되어 있는 公의 墓所를 다시 찾게되니 二OO五年 十一月三十日 門中의 宗親들이 合議하여 遷墓를 서둘러 坡州 延豊里에 配位 光州盧氏 墓所 寅坐에 緬奉하고 典儀를 갖추어 靈界 幽宅을 마련하기로 決定하고 後孫들이 나에게 찾아와 懇曲히 碑文을 請하기에 그 先祖에 對해 昭詳히 알지 못하지만  拒絶하지 못하고 그 大略을 밝혀 記錄하다. 이에 銘하기를


安東金氏 名門巨族

代代로 큰 人物 큰 벼슬

世宗 聖君朝에 꽃 피워

高麗忠賢 康隱公 父命을 받들어

兄弟 모두 寵臣으로

兄 塡은 內資判事 寶文閣直提學

弟 墩은 集賢殿直提學 仁順府尹

名臣 學者로 揚名하시고

兄弟가 다투어 外職을 請하여

九旬 老母를 奉養하시니

어지신 世宗大王 感服하시어

米 豆 醯 醬 고루 下賜하시고

漢陽으로 率家시켜

더 큰 벼슬 내리시니

兄弟의 孝心과

뛰어난 才能

世宗實錄 處處에 記錄되었으니

石碑보다 言碑가 뚜렸한 데

흙더미 失傳이 무슨 問題리

그러니 後孫들이

至極精誠으로 失傳墓 發現하여 治山하니

其祖其孫이라

그 아름다움이

永世不忘하리


                  檀紀四三四O(二OO七)年 丙戌 五月   日

                              

                               文學博士   陳泰夏  謹撰

                                   海淸   孫敬植  謹書

                         直提學公 墓碑建立委員會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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