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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육우당 참고자료 - 매원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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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7-11-25 18:36 조회1,36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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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주신 李端川으로 검색중 가능성이 있는(년대) 인물중 택당 이식(1584-1647)과

 

원 김광계(1580-1646)가 동연대(그 주인을 물으니 이 단천이라고 한다)인물로서  二嶺歌

 

(함경도 단천(端川)의 마천령(摩天嶺)과 마운령(摩雲嶺)을 노래한 것이다.)


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단천에 부임 했을 가능성이 있고 다음의 시로 보아 윤식님이 찾던

 

 그(이단천)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가 하여 올려봅니다

 

 

택당선생 속집(澤堂先生續集)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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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ICN007.gif 시(詩)
정월 초닷샛날 관북(關北) 지방에서 여강(驪江)의 집으로 돌아와 표숙(表叔)에게 드린 절구 한 수 정사년

변방 산하 두루 밟고 빗발 속에 돌아오니 / 雨脚關山踏遍歸
고향 동산 시골 길 모두 의의 하여라 / 鄕園村路摠依依
평소 주고받은 소유 형제의 말 / 少游兄弟平生語
쇠한 나이 될 것 없이 지금 시비 판명됐네 / 不待衰年判是非

[주D-001]의의(依依) : 고향을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변방에 오래 있다가 귀향한 병사의 심경을 읊은 시인 채미(采薇)의 ‘양류의의(楊柳依依)’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평소 …… 말 : 명리(名利)를 추구할 것 없이 고향에서 한유(閑悠)하게 사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남정(南征)할 적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독한 장기(瘴氣)로 고생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나의 큰 뜻을 애처로워하면서 그저 의식 걱정 없이 고향의 선산을 지키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였는데, 지금 소유가 평소에 하던 말대로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택당선생 속집(澤堂先生續集) 제1권 BTN043.gifBTN047.gifBTN044.gif 
MKICN007.gif 시(詩)
이령가(二嶺歌)

큰 재는 푸른 하늘 숫돌 갈아 날 세우고 / 大嶺磨靑天
작은 재는 푸른 구름 어루만지며 노니나니 / 小嶺磨靑雲
구름이나 하늘이나 다 같이 끝없는 것 / 雲天俱不極
뭇 산이 어떻게 이 사이에 끼이리요 / 衆山焉能群
위대하도다 조물(造物)의 위력이여 / 大哉造化力
남쪽과 북쪽 지방 여기에서 갈리누나 / 南北此區分
후래가 원방(遠方)을 회유하려고 / 後來尙柔遠
부지런히 길을 뚫어 잘 닦아 놓았나니 / 開鑿事已勤
두 고개가 높다고 이제 누가 말하리요 / 誰云二嶺高
뒷동산 언덕처럼 예사로 다니게 되었어라 / 履之如陵墳
하늘에 올라가고 구름 밟고 가는 이 길 / 昇天與躡雲
날마다 분분하게 오고 가는 수레와 말 / 車馬日紛紛
진귀한 토산품들 가득 실어나르고 / 輿琛輸土貢
오랑캐 무찌르러 병사들 줄곧 넘나드네 / 荷戈指虜氛
쉴 틈 없이 괜히 바쁜 청유막(靑油幕)의 이 몸 역시 / 棲棲靑油士
한 해에 두 차례나 치달리게 되었는데 / 一歲再馳奔
올 때에는 넘치는 물 서로 치고 받는 통에 / 來時潦豗蹙
산사태로 길이 막혀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 堛塞胸如焚
갈 때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또 몰아쳐서 / 去又衝大雪
손이며 발이 부르트며 꽁꽁 얼어붙었더라 / 寒急手足皸
수레 돌려 돌아가고 마부 재촉했던 옛일 / 回車與叱馭
어버이와 임금님을 각자 생각했었는데 / 向爲親與君
슬프다 나는야 효자도 충신도 다 못된 채 / 嗟余兩無補
그저 육신만 고달프게 하는구나 / 秪以勞骸筋
뒷수레 타는 이들에게 탄식하며 들려 준들 / 歎息謂後乘
위로하는 한 노래를 뉘에게 다시 들으리요 / 勞歌誰更聞

[주C-001]이령가(二嶺歌) : 함경도 단천(端川)의 마천령(摩天嶺)과 마운령(摩雲嶺)을 노래한 것이다.
[주D-001]후래(後來) : 그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우수한 후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2]청유막(靑油幕) : 군사 참모부를 가리킨다. 이때 택당이 북평사(北評事)로 종사관(從事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수레 …… 옛일 : 한(漢) 나라 왕양(王陽)과 왕존(王尊)이 서로 앞뒤로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는데, 왕양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구절판(九折阪)을 넘을 때 “어버이가 주신 소중한 이 몸을 받들고서 어떻게 자주 이 고개를 넘어다닐 수 있겠는가.” 하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서 돌아갔고, 왕존은 이와 반대로 “왕양은 효자(孝子)이지만 나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면서 마부를 재촉하여 급히 넘어갔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6 王尊傳》
[주D-004]뒷수레 타는 이들 : 임금의 수레 뒤를 따르는 종신(從臣)이라는 뜻으로, 즉 조정 안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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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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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감사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택당 선생에 대해 찾아보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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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위의 여강(驪江)은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여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육우당 하고의 관계는 무리이며 이端川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혼선만 드렸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별 말씀 다하십니다.
제가 올린 것도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봅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보면 귀중한 열쇠도 나오겠지요.
대부님햏 쵝오!!!!!!!!!! (요즘 유행어 써 봤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