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육우당 참고자료 - 매원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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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7-11-25 18:36 조회1,363회 댓글3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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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닷샛날 관북(關北) 지방에서 여강(驪江)의 집으로 돌아와 표숙(表叔)에게 드린 절구 한 수 정사년 |
변방 산하 두루 밟고 빗발 속에 돌아오니 / 雨脚關山踏遍歸
고향 동산 시골 길 모두 의의 하여라 / 鄕園村路摠依依
평소 주고받은 소유 형제의 말 / 少游兄弟平生語
쇠한 나이 될 것 없이 지금 시비 판명됐네 / 不待衰年判是非
[주D-002]평소 …… 말 : 명리(名利)를 추구할 것 없이 고향에서 한유(閑悠)하게 사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남정(南征)할 적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독한 장기(瘴氣)로 고생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나의 큰 뜻을 애처로워하면서 그저 의식 걱정 없이 고향의 선산을 지키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였는데, 지금 소유가 평소에 하던 말대로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큰 재는 푸른 하늘 숫돌 갈아 날 세우고 / 大嶺磨靑天 작은 재는 푸른 구름 어루만지며 노니나니 / 小嶺磨靑雲 구름이나 하늘이나 다 같이 끝없는 것 / 雲天俱不極 뭇 산이 어떻게 이 사이에 끼이리요 / 衆山焉能群 위대하도다 조물(造物)의 위력이여 / 大哉造化力 남쪽과 북쪽 지방 여기에서 갈리누나 / 南北此區分 후래가 원방(遠方)을 회유하려고 / 後來尙柔遠 부지런히 길을 뚫어 잘 닦아 놓았나니 / 開鑿事已勤 두 고개가 높다고 이제 누가 말하리요 / 誰云二嶺高 뒷동산 언덕처럼 예사로 다니게 되었어라 / 履之如陵墳 하늘에 올라가고 구름 밟고 가는 이 길 / 昇天與躡雲 날마다 분분하게 오고 가는 수레와 말 / 車馬日紛紛 진귀한 토산품들 가득 실어나르고 / 輿琛輸土貢 오랑캐 무찌르러 병사들 줄곧 넘나드네 / 荷戈指虜氛 쉴 틈 없이 괜히 바쁜 청유막(靑油幕)의 이 몸 역시 / 棲棲靑油士 한 해에 두 차례나 치달리게 되었는데 / 一歲再馳奔 올 때에는 넘치는 물 서로 치고 받는 통에 / 來時潦豗蹙 산사태로 길이 막혀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 堛塞胸如焚 갈 때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또 몰아쳐서 / 去又衝大雪 손이며 발이 부르트며 꽁꽁 얼어붙었더라 / 寒急手足皸 수레 돌려 돌아가고 마부 재촉했던 옛일 / 回車與叱馭 어버이와 임금님을 각자 생각했었는데 / 向爲親與君 슬프다 나는야 효자도 충신도 다 못된 채 / 嗟余兩無補 그저 육신만 고달프게 하는구나 / 秪以勞骸筋 뒷수레 타는 이들에게 탄식하며 들려 준들 / 歎息謂後乘 위로하는 한 노래를 뉘에게 다시 들으리요 / 勞歌誰更聞 [주C-001]이령가(二嶺歌) : 함경도 단천(端川)의 마천령(摩天嶺)과 마운령(摩雲嶺)을 노래한 것이다. [주D-001]후래(後來) : 그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우수한 후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D-002]청유막(靑油幕) : 군사 참모부를 가리킨다. 이때 택당이 북평사(北評事)로 종사관(從事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수레 …… 옛일 : 한(漢) 나라 왕양(王陽)과 왕존(王尊)이 서로 앞뒤로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는데, 왕양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구절판(九折阪)을 넘을 때 “어버이가 주신 소중한 이 몸을 받들고서 어떻게 자주 이 고개를 넘어다닐 수 있겠는가.” 하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서 돌아갔고, 왕존은 이와 반대로 “왕양은 효자(孝子)이지만 나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면서 마부를 재촉하여 급히 넘어갔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6 王尊傳》 [주D-004]뒷수레 타는 이들 : 임금의 수레 뒤를 따르는 종신(從臣)이라는 뜻으로, 즉 조정 안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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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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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감사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택당 선생에 대해 찾아보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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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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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위의 여강(驪江)은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여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육우당 하고의 관계는 무리이며 이端川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혼선만 드렸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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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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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별 말씀 다하십니다.
제가 올린 것도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봅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보면 귀중한 열쇠도 나오겠지요.
대부님햏 쵝오!!!!!!!!!! (요즘 유행어 써 봤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