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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택(金澤) 사위 성세장(成世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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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8-01-26 19:45 조회1,38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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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9 작성일 2007-12-26 조회수 5
담당실과 정보통신과 작성자 신상백 연락처 031-310-2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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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판(身言書判)의 청백리 성세장(成世章, 1506~1583)

20071226200322.jpg조선 중기의 공신ㆍ문신. 자는 중회(仲晦)ㆍ경회(景晦),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감찰 성희문(成希文)의 아들이나 증이조판서 성희적(成希赤)에게 입양되었다. 김안 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선생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식년시 갑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에 제수되었다. 이어 시강원 설서를 거쳐 이듬해(1541)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38세에 춘추관 기주관을 지냈다. 40세 때(1545)에는 임금을 시위한 공로로 원종 훈(原從勳)에 오르고, 지평으로 있을 때 최보한(崔輔漢)을 탄핵하는 등 기강확립에 힘썼다. 41세에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43세에 사재감 정으로 춘추관 편수감을 겸대하여 『중종실 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사인ㆍ집의ㆍ경기도 암행어사ㆍ직제학ㆍ도승지 ㆍ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53세 되던 해(1558)에 대사헌으로 윤원형(尹元衡)ㆍ이양(李樑) 등 외척을 견제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ㆍ예조참판ㆍ한성좌윤 등을 지내고, 58세에 함경감 사를 역임했다.

이 무렵 한성부 판윤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68세에 등극부사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예조 판서ㆍ호조판서에 이어 2년 뒤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내고 74세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부인 상주 김씨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20071226200322-(1).jpg성품이 간정(簡靜)하고 풍모가 맑고 단정하였으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튼 담소도 없었으며, 언어는 항상 충심, 신의가 있어 비속한 언사는 입에 담질 않았다. 재 물에 항상 무관심하고 검소했으며, 여색(女色)과 오락 같은 번화한 일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네 분의 임금을 섬겨 모두에게 우대를 받아 때로는 낙루한 옷깃을 적시기도 해 누추 상소한 일이 있었지만, 혹 좋은 옷이 생기면 곧 태워버렸다. 또 관직에 재임 중에는 공사가 분명하여 이기ㆍ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데 대한 잘못을 통렬히 논박하기까지 했다. 언론이 강개하여 조정의 모든 요속들의 기운을 움직였고, 실없이 누구를 비방하거나 칭송함 이 없고, 변란을 당할 때나 역경에 임해서는 근본 의지에 굽힘이 없이 충성으로 일관했다.

묘는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에 있다. 선생의 행장(行狀)은 사복시 정(司僕侍正) 지제교(知 製敎) 성락(成洛)이 지었으며, 지석(墓誌石)은 좌의정(左議政)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선생 의 지석은 1990년 4월 15일 미산동 구시미에서 창녕 성씨 묘역을 정비하던 중 발견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처음부터 이곳 구시미에 있던 것은 아니며 몇 차례 이장을 거친 후 현재 위 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원래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에 안장했는데, 광무4년(1900) 금촌리 일대가 왕릉지 (王陵地)에 편입되자 현 시흥시 안현동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와 창녕 성 씨 문중이 이곳을 매각하면서 창녕 성씨 선산인 미산동 구시미로 다시 이장하게 된 것이다. 이 지석은 1990년 창녕 성씨 후손들이 묘비를 다시 세울 때 묘비 밑에서 발견되었다. 이번에 발견된 지석은 가로 19.1cm, 세로 21cm 크기의 지석 총 22개인데, 선생의 지석(14개 총 길이 2.72m)과 선생의 부인 안동 김씨 지석 8개(4개씩 2조, 총 길이 76cm)였다. 일부 깨진 지석도 있으나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해 지문(誌文) 판독에는 어려움이 없다. 청화백자(靑華白磁)를 네모나게 구워 만들었으며, 선생이 죽은 다음해인 1584년에 제작한 것이다.

20071226200322-(2).jpg그런데 선생의 지석은 22매라는 지석 매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표제문(表題文), 내용, 명 (銘), 지은이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먼저 표제문을 보면, 선생의 경우 "유명조선국자헌 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사성공묘지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事成公 墓誌銘)"이라고 표제문을 썼고, 부인의 경우는 "정부인안동김씨묘지(貞夫人安東金氏墓誌)"라 는 제목을 달았다. 지문 내용으로는 이름, 선대가계, 출생, 출생지, 관력, 행적, 고인의 등을 차례로 적고 마지막에 지은이와 명(銘)을 달았다.

특히 선생의 생전 행적과 관력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귀영(金貴榮)이 지문을 지었으며, 명(銘)은 외조부 강초당(姜草堂)이 정선객관(旌善客館) 현판에 게재했던 시를 빌어와 달았다. 글씨를 쓴 인물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 았으며 글자체는 해서체를 사용하였다. 선생의 지석에는 번호가 없지만, 부인의 것에는 지석순서에 따라 지석 상단 중앙에 '일(一)ㆍ이(二)ㆍ삼(三)ㆍ사(四)'라는 번호를 달고 있다. 현재 창년 성씨 15대 종손인 성일제(成一濟)가 선생과 부인의 지석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는 성순제(成順濟)ㆍ성용제(成龍濟) 형제와 함께 미산동에 거주하면서 선산을 돌보고 있다.

【참고문헌】『중종실록』, 『인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국사대사전』, 『시흥군지』상, 『경기인물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12>, 『창 산유록』, 『창녕성씨문효공파보』, 『시흥의 인물과 행적』, 『신현동지』, 「성세장행장」, 「성세장묘지명」, 「시흥시보」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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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세장(成世章) More Info.
       중종(中宗)35년(1540년), 식년시(式年試) 갑과3(甲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06년, 병인
  자(字)   경회(景晦)
  호(號)   사암(思庵)
  본관(本貫)   창녕(昌寧)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청백리(淸白吏)
>>> 가족사항
  부(父)   성희공(成希恭)
  생부(生父)   성희문(成希文)
  조부(祖父)   성완(成玩)
  증조부(曾祖父)   성효연(成孝淵)
  외조부(外祖父)   윤세신(尹世臣)
  처부(妻父)   김언필,김택(金彦弼,金澤)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1(신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참찬&(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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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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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망우당(곽재우)은 상산인(商山人) 김행지(金行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김행지는 부제학(副提學) 김언필(金彦弼)의 아들로 남명 선생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