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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박회무(仲植)와 김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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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8-02-13 23:49 조회1,560회 댓글3건

본문

박회무(朴檜茂)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미상
본관 반남(潘南)
중식(仲植)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활동분야 의사
박회무(朴檜茂)에 대하여

박회무(朴檜茂)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목사 승임(承任)의 손자이다.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중후한 성품을 지녀 노성인(老成人)의 기품을 지녔으며,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소를 올려 화의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또 소를 올려 시정(時政)과 서북관방의 허술함을 논하고 선정양병(選丁養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山泉書院>

 

소 재 지 영주시 문정리(文亭里) 창건년대 1779년(正祖 3) 창건자 야성송씨문중(冶城宋氏門中) 봉안위 생원(生員) 송석충(宋碩忠) 적 요 1774년에 송석충을 봉안하는 별묘를 창건하여 증참의 장수 희(贈參議 狀壽禧) 부윤 오운(府尹 吳澐) 도사 박회무(都事 朴檜茂) 진사 박종무(進士 朴從茂)은 한천서원(寒泉書院)으 로 분안(分安)되고 생원 송석충을 단향으로 봉안한다.

 

위 내용으로 보아 산천서원의 소재지 영천은 영주의 오기로 보인다

 

 

제목 :   충렬공 묘소에 근접한 김해의 묘소 이장관련 일기 소개(1)  
 작성자 :  김항용 
     조회수 : 108     2007-01-15 11:07:50

 

...............................전략.......................................

3. 일기 내용

 1)1608년(선조41). 2월 29일

<溪巖日錄> 一 . 戊甲. 二月. 十九日

 風, 午聞野火自西北延于此里後山, 令奴輩撲減(減)之, 午後徃見判生二兄于中間溪橋, 以志伯仲李士安皆會, 以志出示朴仲植書, 京中金繼道 金時獻, 以翰林兄墳域, 挾上洛公葬會議, 將欲呈官, 刻日移葬, 而此亦有中間挑起者, 仲植意, 則指金景建也, 盖吾曾王父墳, 與上洛同原, 而上洛居前, 上洛於王父, 爲七代外祖也, 事具先生所撰碣文, 王父之葬, 已將百許年, 每歲節日, 具饌先祭, 上洛碑石, 歲久仆破, 頃於壬寅, 言于監司 李時發, 李亦上洛外派, 遂協力改竪, 上洛姓孫雖衆, 各在異處, 邈不相聞, 墓所亦不知顯於世者亦多矣, 未聞有展省而來者, 徃在辛卯秋, 敬差 金公昉, 過先大夫, 以金公上洛裔, 言其墳所, 金甚喜, 遂徃展掃, 咨歎而去, 翰林兄之葬, 則在亂後, 而在上洛之前, 亦未聞, 有橫詰者今如是, 可慮. 


 <계암일록>1. 戊申(戊甲은 戊申의 오기로 보임. 1608년 선조41). 2월 29일

 바람 불다. 낮에 들으니 들불이 나서 서북쪽에서 이 마을 뒷산까지 이어졌다 한다. 종들을 시켜 끄게 하였다.

 오후에 중간의 계곡 다리에서 판, 생 두 형님을 만나다. 이지(以志)의 큰형 작은형 이사안이 함께 모였다. 이지가 박중식의 서찰을 내보여 주었는데, ‘서울의 김계도(익*주1) 김시헌(제)이 한림형(김해)의 묘소가 상락공(충렬공-김방경)의 묘역에 끼어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만나서 이를 의논 하는데 장차 관청에 소송하여 기일을 잡아 이장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중간에서 도발하여 일으키는 자가 있는데 중식의 생각에는 김경건이라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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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충렬공 묘소에 근접한 김해의 묘소 이장관련 일기 소개(3)  
 작성자 :  김항용 
     조회수 : 117     2007-01-17 09:19:10  

 3) <梅園日記> 十. 丙寅. 十四日

 聞方伯自安東來, 奠上洛之墓, 爾·以直先往, 余與汝熙兄繼往, 到知禮齋舍, 移時方伯乃來, 余輩入見叙寒暄畢, 言刧遷塋墓之事, 聲色俱厲, 余輩不能措一辭, 唯唯而已, 行祭後, 又獨招我, 又入見, 從容狎坐, 論辨移日, 喩以不可勒遷之意, 終乃解釋云, 勒遷本非吾意, 京居同姓之論, 如此云云, 三嘉 縣監 金孝建·榮川人金景建諸人, 以上洛子孫, 助奠于方伯, 到家則安德 李奉事慶生氏, 率二子來余家, 二子以試場擧子來矣.

 

  <매원일기>10.  1626(인조4)년 9월 14일

 듣건대, 방백(김시양)이 안동에서 와서 상락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직(直-名)에게는 먼저 가라고 말하고 나와 汝熙, 형은 함께 이어서 갔다. 지례의 재실에 도착하여 잠깐 있으니 방백이 바로 왔다. 우리들이 들어가 뵙고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니 선대의 묘를 강제로 옮기는 건을 말하는데 목소리와 표정이 엄하였다. 우리들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예, 예만 할 뿐이었다.

 제사를 봉행한 후 또한 나를 홀로 부르기에 들어가니 조용히 가까이 앉히기에 나는 세월이 흐른 그동안의 과정을 사리에 맞게 따지면서 강제로 이장하지 못할 뜻을 밝히자 끝내는 이해하겠다고 말하면서 ‘강제로 이장하라는 것은 본래 내 뜻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동성 일가들의 여론이 이렇다’며 운운하였다. 삼가 현감인 김효건, 영천인 김경건 등은 상락공(김방경)의 자손으로 방백을 도와 제사를 올렸다. 집에 도착하니 안덕, 이봉사 경상씨 등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내 집에 왔다. 두 아들은 과거시험 보려고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또 새롭습니다.
以志伯仲李士安皆會
‘이지(김광계)’가 종손으로 독자인데, 출계 관계가 있므로 이 문장은 자료를 보강해서 해석해야 할 부분인 듯합니다.
'以 道'는 우리 홈에 글을 적으면 이상하게 '爾 '로 바뀝니다.
그래서 &lt;爾 以直先往 , 余與汝熙兄繼往&gt;의 원래 글은 &lt;以 道以直先往, 余與汝熙兄繼往&gt;입니다.
그리고 ‘이도’는 ‘김광보’, ‘이직’은 ‘김광악’의 자(字)이고, '汝熙兄'은 매원(김광계, 字=이지)과 혈연관계가 있는 연장자입니다. 따라서 '汝熙兄'은 '여희'와 '형'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汝熙兄'은 ‘黃氏’로 광김 예안파가 아닙니다.
&lt;이도(김광보)와 이직(김광악)이 먼저 가고, 나는 여희 형과 함께 뒤따라갔다.&gt;로 새겨야 할 듯합니다.
‘판, 생 두 형님’은 ‘판사 형과 생원 형’을 가리키는데 아직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좀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대부님 여러 모로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박중식=박회무에 대한 정보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원이 일기에서 '백형' 또는 '중형'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 매원일기를 통해 '아우, 三弟, 四弟'라는 말을 썼는데, '四弟'는 누굴 말하는지 모르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비교적 일찍 사망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다시 살펴보니 영주는 영천의 속현으로 돼있군요
아무튼 박중식과 김경건 선조는 영주에 같이 거주하지 않았을가 짐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