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경순왕에서 김방경할아버지까지(고맙...)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1-07-09 10:16 조회2,196회 댓글0건

본문

심층 분석 감사합니다

그러나 경순왕이 20세정도(?)에 등극 하여 10년을 재위 했을것같으니 905년정도에 나시고충렬공 1212년에 나시니 그 년도는 307년이고 8대로 나누면 38.3정도이니...

한대가 좀 긴것 같고 그 중간 할배들 문헌 미약이 한 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가르침 있으시길... 대부님! 건강 하시길...

-----------------------------------------------------------------



김주회 wrote:

>

>경순왕 - 김은열 - 김숙승 - 김일긍 - 김이청 - 김의화 - 김민성 - 김효인 - 김방경

>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신라를 넘겨주고 왕건과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인 유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큰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김방경께서 태어나신 1212년 사이는 277년으로 30년으로 나누면 9,2가 됩니다. 김방경 할아버지께서 경순왕의 9세손이 되시니 연도계산에는 무리는 없는 듯 합니다.

>

>정중 종친께서 의문을 제기하신 것처럼 김숙승부터 김의화까지는 史料나 묘소 등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또 경순왕의 자녀에 대해서는 서로 틀린 각양각색의 자료가 난무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 안동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김숙승에서 김민성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

>

>⊙ 김숙승(金叔承)

>공부시랑 평장사, ○自公 始封安東 (공으로부터 비로소 안동에 봉해졌다.)

>

>

>⊙ 김일긍(金日兢)

>금자광록대부 상서 우복야 삼한공신 태사 대광, ○朝鮮氏族統譜云安東金氏始祖日兢是訛傳 (조선씨족통보에 안동김씨시조는 일긍이라고 하는 것은 와전된 것이다.)

>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께서 16세에 음보로 관계에 진출하신 것은 김일긍께서 삼한공신에 책봉되신 것에 기인한다고 한다.

>

>

>⊙김이청(金利請)

>상락군 一云 안동태수, ○公居古寧卽安東也 輿地勝覽本府人物記 世載名德 受籍安東 自公始 (공은 고령즉 안동에 거주하였고 여지승람 본부인물기에 世載名德 受籍安東은<※해석이 잘 안됨>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

>⊙김의화(金義和)

>추봉 위위사주부 一云 예부시랑

>

>※김의화는 위위사주부(예부시랑)에, 김민성는 상서복야에, 김효인은 금자광록대부 삼한벽상공신 등에 추봉되었는데 이는 김방경께서 높은 벼슬에 오른신 관계로 3대추증의 예에 따른 것인 듯 하다

>

>

>⊙김민성(金敏成)

>문과 한림직사관겸장치서령 추봉 상서복야 묘 안동부서一息화림촌

>

>※고려사에 "김방경이 낳자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자랐었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들어 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방경 할아버지께서 어릴 때 조부의 교육하에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

>※김민성 할아버지께서 문과에 급제하시고, 1남 김효공, 2남 김효인이 문제에 급제함으로써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

>

>

>김민성 할아버지는 5남 (김효공, 김효인, 김효구, 김효수, 김효조) 1녀(윤신에 출가)를 두셨는데

>

>⊙1남 김효공(金孝恭)

>개명敞 고려희종조 문과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시文簡

>○公性溫和 無 於人 臨終語其姪方慶等 辭禮葬事 見麗史及勝覽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다른이에게 오만하지 않았다. 임종시에 조카 방경등에게 예장으로 하지 말하고 하였다. 여사와 승람에 기록이 있다.)

>

>⊙2남은 김효인(金孝印) 할아버지이고, ⊙3남 김효구(金孝 )는 同正을 지내시고 1남 金惟善 (검교감 군기감)을 두었고, ⊙4남 김효수(金孝綬)는 상락백 밀직부사를 지내시고 1남 金天錫을 두었으며, ⊙5남 김효조(金孝組)는 좌정승 상락후를 지내시고 1남 金天弼을 두었다. ⊙1女는 윤신(尹莘)에게 출가하였다.

>

>

>

>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서 개인적인 생각을 많이 가미하였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세요. 金孝印 할아버지에 관련된 내용은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다음에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고려사 등에 기록된 金孝恭(金敞)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올려 보겠습니다.

>

>

><디지털 한국학(http://www.koreandb.net/)>

>김창(金敞)

>?∼1256(고종 4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효공(孝恭).

>희종 때에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병부우승(兵部右丞)이 되었다. 고종 때에 최우(崔瑀)에게 등용되어 정방에서 전선(銓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이때 이부·병부의 선발에 응한 자가 무려 수백명이었지만 한번 보고 그 이름을 다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우의 지시대로만 따른다는 비난도 받았다.

>1237년에 대복시사로서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었으며, 1242년에는 추밀원부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홍지경(洪之慶) 등 진사를 선발하였다.

>그뒤 추밀원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최씨 집권자의 신임을 얻어 오랫동안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진퇴를 분명히 하여 육십이 되어서 재상이 될 정도로 청렴하였다.

>1256년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申千湜〉

>

>

>

><고려사 권 제102 열전 제15>

>김창(金敞)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리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으로 있다가 여러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으로 임명되었다.

>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에 두고 전선(인재선발) 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 병부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최이)의 손을 빌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

>고종 때에 추밀원부사로 임명되었다가 문하평장사로 승진되었다.

>

>김창은 세도 집에 아부하여 오랜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 자리에 올라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

>고종43년(1256년)에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판리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림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 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