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晩翠堂金公墓碣銘(만취당김사원공묘갈명)-金國會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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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8-02-28 22:48 조회1,276회 댓글3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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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樊巖先生集卷之五十二(번암선생집권지오십이) 墓碣銘(묘갈명) 晩翠堂金公墓碣銘(만취당김사원공묘갈명) *원문 및 이미지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公諱士元。初字景龎。後改景仁。金本安東上洛人。高麗忠烈公方慶之後也。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다. 초자는 경방(景龎)이었으나 뒤에 경인(景仁)으로 고쳤다. 김공은 본시 안동 상락인 고려 충렬공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五世而至子瞻。我恭定王。以前朝名臣後。授之官。挈妻子家聞韶之沙村。子孫仍居焉。 5세 자첨(子瞻)에 이르러, 우리 공정왕(역주 : 정종)이 이전 고려왕조 명신의 후예라 하여 벼슬을 내렸다. 처자를 거느리고 문소(聞韶 : 의성)에서 사촌(沙村 : 안동)으로 이사하여 자손이 거처하게 되었다. 孫克諧官北評事。以淸名著於世。至國子進士光粹。遊太學。見燕山主無道。拂袖歸。隱居求志。世稱松隱先生。士林立祠以享。寔曾大父也。 (자첨의) 손자 극해(克諧)는 벼슬이 북평사(北評事)로 청렴함으로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자감 진사였던 광수(光粹)에 이르러서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다가 연산군의 무도함을 만나 소매를 거두고 귀향하여 은거하며 뜻을 구하니 세상에서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불렀다. 大父溏參奉。父世佑引儀。妣義城金氏。萬謙之女也。 대부 당(溏)은 참봉(參奉)이었고, 아버지 세우(世佑)는 인의(引儀)를 지냈다.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만겸(萬謙)의 따님이다. 公以嘉靖己亥生。卒於萬曆辛丑。壽六十有三。 공은 가정 기해년에 출생하여 만력 신축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시다. 初公年二十二。謁退陶老先生請受業。先生書贈武夷觀善齋詩曰。君能喩吾此意否。 공의 나이 22세에 도산에 물러나신 노선생(退陶老先生 곧 역주 : 퇴계 이황)을 뵙고 수업을 청하였다. 선생이 무이관선재시(武夷觀善齋詩 : 주자의 작품)를 쓰고는 “자네가 내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물었다. 嘗與及門諸公。從先生遊淸涼蓮臺寺。詩以和。自是四五年之間。棲滿月庵。又棲蓮臺。已又棲月瀾庵。讀書輒籤標質疑。有得疾書以記。葢與之麗澤者。艮齋李公德弘。趙公起伯也。 일찍이 동문의 여러 분과 어울렸는데, 선생을 따라 청량연대사(淸涼蓮臺寺)에 놀러갔다가 시를 화답하였다. 그 뒤로 4-5년간 만월암(滿月庵)에 살았고 또 연대사(蓮臺寺)에 살다가 다시 또 월란암(月瀾庵)에 살았다. 글을 읽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책갈피를 하였기에 재빠르게 기록할 수 있었다. 대개 함께 공부한 이는 간재 이덕홍(李德弘) 공, 조기백(趙起伯) 공 등이다. 艮齋嘗與琴公蘭秀。議構學舍陶山, 以容負笈者。書邀公。公卽具資力往。先生曰。無庸。吾不要煩張。事遂已。 간재 이덕홍이 일찍이 금란수(琴蘭秀) 공과 함께 도산에 학사를 열어 문도를 들이고자 할 때 편지로 공을 초청하니, 공이 즉시로 자비를 갖춰 달려갔다. 퇴계선생이 말씀하셨다. “쓸데없는 일이다. 나는 번다하게 하기를 원치 않노라.”하여 (퇴계를 모시고 학사를 여는) 일을 그만두었다. 公性慈仁。幼與羣兒遊。見烏鳶噪。往視之。凍死者橫道側。立解衣以覆。見貧匱者。必請父母周之。 공의 성품이 자애롭고 인애하셨다.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까마귀와 소리개가 시끄럽게 우는 것을 보고 달려가 보니, 얼어죽은 이가 길가에 나뒹굴어 있자 바로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가난한 이를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도와주었다. 服松隱公義方之訓。事親盡其孝。遇親戚鄕黨。恭敬禮讓。人無不愛服。及事老先生。遂輟擧子業。專精篤學。探賾陰陽五行之原。具問目質諸先生。先生條答之。仍言苦思深求。反爲學者病。以爲戒。 은공 송의방(松義方)의 가르침을 따라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고, 친척이나 고향분을 만나면 공경하고 겸양하니 아끼고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퇴계선생을 섬김에 이르러서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공부에 매진하니, 음양 오행의 원리를 깊이 탐색하여 문목(問目 : 질문 목차)을 갖춰 선생께 질의하면 선생은 조목조목 답하시고는, 이어서 “너무 괴롭게 생각하고 깊이 구하는 것이 도리어 학자의 병통이 되니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嘗入山攻苦病甚。先生躬自檢藥方以示。又戒曰。古人爲學。雖曰勤苦。何至生病貽父母憂乎。及先生下世。門人疑所服。公曰。古禮師不服。不可以義起。遂以黑笠素衣帶從事。三年不與宴樂。 일찍이 입산하여 공부를 괴롭게 하니 병이 깊어졌다. (퇴계) 선생이 몸소 약방을 찾아 보이며 또 경계하셨다. “옛분들이 공부를 부지런히 괴롭게 하라고 하였으나, 어찌 병이 나서 부모를 근심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겠는가”선생이 돌아가심에 미쳐서 문인이 상복에 의문을 가지자, 공이 말하였다. “고례에도 스승에는 복을 입지 않았으나 의리상 그만둘 수는 없다.” 마침내 검은 삿갓에 흰 옷, 허리띠를 하고 일하며 3년을 연락에 참여하지 않았다. 庚辰壬午。荐罹艱。與二弟廬墓終三年。 경진 임오년에 연거푸 부모상을 만나니 두 동생과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壬辰島夷之訌。嶺南諸義將。起義兵討賊。推金公垓爲大將。以公爲義城齊整將。發半道。會大將卒于軍。遂罷歸。 임진년 섬 오랑캐 난리에 영남의 여러 의장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칠 때에 김해(金垓) 공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고, 공을 의성제정장(義城齊整將)으로 삼으니, 반도를 출발하여 군에서 대장을 만나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當是時。鋒鏑餓羸者。聞公有急人義。襁至焉。公受之無倦色。有婦女至。詔家人接待。或以饘或以穀。所全活甚衆。人有籍土田臧獲以謝。公笑却之曰。吾豈望報者耶。 이때에 베인 사람, 활맞은 사람, 굶주린 사람은 공이 인의에 우선한다는 말을 듣고 붙따랐다. 공이 이들을 맞이하되 게으른 빛이 없었다. 부녀자가 오면 집사람을 불러 접대하기를 죽이나 곡식으로 하니 온전히 산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개중에 논밭에서 수확한 것으로 사례하고자 하면 공이 웃으며 물리치고 말하였다. “내 어찌 보답을 바란 것이겠소?” 先是。公家居禔躬讀書。餘力課農。値歲歉。以稍贏者。假貸艱食。有貧無以償者。焚其券。人號爲金氏義倉云。 이보다 앞서 공이 집에서 독서를 할 때 여가에 농사를 점검하여 흉년을 만나면 농사를 망친 이에게 구휼미를 빌려주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문서를 태워버리니 사람들이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 불렀다 한다. 宅西有萬年松。松隱公所取號。公亦扁所居室曰晩翠。取呂氏約。增損爲洞䂓。行之數十年。村俗爲之敦。 집 서쪽에 만년송이 있으니 송은공(역주 : 증조부 휘 光粹) 이 자호한 것이다. 공 역시 한 쪽에 방을 만들어 만취(晩翠)라 자호하였다. 여씨향약을 취하여 가감하여 동규(洞䂓)를 만드니 수십 년을 행함에 마을 풍속이 도탑게 되었다. 初娶英陽南氏。典籍崧之女。生一男四女。男濬直長。婿典籍權克明,士人金之善,權得善,安昌。 공이 처음에 영양남씨(英陽南氏) 전적(典籍)벼슬 南崧(남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준(濬)은 직장(直長)이고, 사위는 전적(典籍) 권극명(權克明),사인(士人) 김지선(金之善),권득선(權得善),안창(安昌)이다. 再娶一直任氏。生一女適李執可。 두 번째 일직임씨(一直任氏)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이집가(李執可)에게 시집갔다. 三娶安東權氏亦一女。適趙綱。 세 번째로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어 또 1녀를 낳았으니, 조강(趙綱)에게 시집갔다. 直長五男二女。男尙瑗護軍,尙琦,尙珏,尙玭,尙璘。婿文博,李朝鳴並進士。 직장(큰 아들 준)은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상원(尙瑗)은 호군(護軍)이고, 나머지 상기(尙琦),상각(尙珏),상빈(尙玭),상린(尙璘)이고, 사위는 문박(文博),이조명(李朝鳴)은 나란히 진사(進士)이다. 曾玄及外孫蕃以昌。不可悉錄。今昆孫上舍宗德。以學行著稱士林。三弟或出入侍從。或陞上庠。皆不愧爲名祖孫也。 증손 현손과 외손들이 번창하나 다 기록할 수 없고, 곤손(昆孫)인 상사(上舍)벼슬 종덕(宗德)은 학행(學行)으로 사림에게 칭송받는다. 세 동생은 간혹 임금을 시종하고 관직에 나아가고 학문에 정진하니 모두 이름난 조상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도다. 嗚呼。公歿二百年。文籍蕩佚。所著大學質疑,語錄解諸書。亦皆不傳。此後學所共歎惜。 아! 공이 가신지 200년 문적이 망실되어 지으신 <대학질의(大學質疑)> <어록해제서(語錄解諸書)>가 모두 전하지 않으니 후학이 함께 탄식할 바이다. 然公嘗曰。士子處世。不可非義干祿。惟盡力於本分。庶幾寡過。况愼言行勤讀書務農桑三事。師敎所存。敢不勉諸。葢師門指授之訣。要約平實。人皆可以勉而行之。而爲聖爲賢之基。未必不藉於是矣。 하지만 공이 일찍히 말씀하였다. “선비가 처세함에 의가 아니면 녹을 구하지 말라. 다만 본분에 진력하면 거의 허물을 줄일 수 있다. 더욱이 愼言行․勤讀書․務農桑 세 가지는 가르침이 남았으니 감히 힘쓰지 않으랴. 대개 스승의 문하에 전수한 비결은 요약되고 평탄 신실하여 사람들이 모두 힘써 행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현이 되는 기초가 여기에서 바탕을 두지 않음이 없다. 公之平日佩紳而躬行者。要不外是而居焉。後之學者以之得。公亦以之自勉。則雖謂之不學。吾不信也。公葬在馬山負坎之原。實義城縣之北也。 공이 평소에 예복을 갖추고 몸소 실천한 것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학들이 이로써 얻을 지라. 공 역시 이로써 힘썼으니 배우지 아니했다 한들 나는 믿지 못하노라. 공은 마산(馬山) 부감(負坎)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실상 의성현(義城縣)의 북쪽이다. 銘曰。명문에 이른다. 松隱肖孫。송은공 빼닮은 자손 退陶門徒。퇴계 선생 문도로세 有齋藏修。서재 숨어 수양하니 古松之隅。묵은 솔의 옆이로세 知我者稀。날 아는이 적다한들 卷懷何傷。품은 회포 상할손가 貽厥令裔。빼어난 자손에 미쳐 有斐聲光。명성 영광 빛나리라 儒林學堂(hanja4u.com.ne.kr) 主人 金國會 拙譯 2008.02.28 *김사원(金士元 ; 1539~160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경상도 의성·점곡(點谷)·사촌(沙村)에 살았고, 증조부는 일사(逸士) 광수(光粹)이다. 1560년(명종 15)에 이황(李滉)에게 음양오행설을 배웠다. 벼슬에 나간일이 없고 부호군을 지내며 학문에 진력하였다. 천성이 인자하여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사림(士林)의 추대로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이 되어 두 동생 김사형(金士亨), 김사정(金士貞)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보내 창의(倡義)토록 하였다. 도의상교(道義相交)는 이덕홍(李德弘), 금난수(琴蘭秀)등이며 「신언행(愼言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으로 하였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김사원 각주 출처 :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퇴계학맥편 |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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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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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국회님 번역 감사합니다.
아울러 이곳에 옮겨주신 영윤님 또 감사합니다.
홈 도평의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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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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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역문 일부 검토 / 수정하였습니다. 유림학당에 수정본으로 올려두었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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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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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맙고 감사한 마음 한량없습니다.두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