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경순왕 본기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1-07-09 09:48 조회2,141회 댓글0건

본문







56대 경순왕(敬順王) 본기





927년에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부(傅)로 문성대왕의 예손이고 이찬 효종의 아들이고 모는 계아 태후인데, 견훤이 그를 즉위시킨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군신과 더불어 통곡하며, 경애라 시호하고 남산해목령(경주)에 장사하니 고려 태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하였다.



원년(927) 11월에 왕은 선고(先考)를 추존하여 신흥대왕이라 하고 모를 왕태후로 하였다. 12월에 견훤에 대목군(칠곡인동)에 침입하여 전야(田野)에 쌓인 곡식을 다 태워 버렸다.



2년(928) 정월에 고려의 장군 김사은 초팔성(합천 초계)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5월에 강주(진주) 장릉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에 지진이 있었다. 8월에 견훤은 장군관흔에게 명하여 양산에 축성하므로 고려 태종은 명지성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격퇴시키었다. 견훤은 대야성(합천) 밑으로 진격하여 군사를 나누어 보내어 대목군(칠곡인동)의 벼를 베었다. 10월에 견훤은 무곡성(군위)을 함락시켰다.



3년(929)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마후라를 고구려에 출판하였다.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의성)을 공격하므로 고려장군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니 고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이를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치게 하였다. 10월에 견훤이 가은현(문경가은)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930) 정월에 재암성(청송)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므로 태조는 이를 후례로 대접하고 상부(상부)라 칭하였다.

처음 태조는 신라와 통호하고자 하여 선필을 인도하였는데, 이때 항복하였으므로 그 공이 있음을 생각하고 또한 모든 일이 노숙한 까닭으느총포(寵褒)하였다.

태조는 견훤과 고창군(안동) 병산밑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는데, 참살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그리고 그 영안(안동 임하), 직명(안동 일직), 송생(청송) 등 30여군, 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는 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승리한 것을 알리니, 왕은 이를 사례하고 아울러 서로 한번 모일 것을 청하였다. 9월에 국동에 연해주 군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5년(931) 2월고려 태조는 50여기를 거느리고 경기에 이르러 배알할 것을청하므로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권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란이 일어나게 하고 견훤이 불행을 자행하여 우리 국가를 침해하니 얼마나 분통한지 모르겠다.”

하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는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도 또한 울면서 왕을 위로하였다.

그로부터 태조는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니 왕은 혈성까지 이르러 전송하고 당제 유렴을 인질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그런데 태조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바르므로 민가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았다. 이에 도인사녀(都人士女)들은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일에 견훤이 왔을 때는 표호(豹虎)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은 왕공(태조)이 이르렀을 때는 부모를 보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신을 신라로 파견하여 왕에게는 금채안마(錦綵鞍馬)를 보내고 관료와 장병들에게는 포백(布帛)을 보내왔다.



6년(932)에 5월에 지진이 있었다. 4월에 집사시랑 김불(金불??)을 정사로 사빈경 이유(李儒)를 부사로 삼아 후당으로 파견하여 예물하였다.



7년(933)에 후당 명종이 사신을 고려로 파견하여 사명(賜命)하였다.



8년(934) 9월에 노인성(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충남 홍성) 계의 30여군?현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년(935) 10월에 왕은 사방의 강토를 거의다 남에게 빼앗겨 국세가 고약(孤弱)하여 능히 자안(自安)하기 어렵게 되자 군신들과 더불어 그 대책을 논의 하기로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자고 하였는데 군신들은 의논하기를 혹은 이를 옳다하고 혹은 이를 옳지 않다고 하였다.



왕자는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이니 미땅히 충신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이를 의논함이 옳을 것이어늘 어찌 1천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으리요”

하자 왕은 말하기를

“고약하고 위험함이 이와 같아서 형세는 능히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왕 강하지도 못하고 또한 약하지도 못하니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글을 갖추어 고려 태조에게 청강(請降)하니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이별하고 곧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의지하며 집을 짓고 마의 초식으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는 왕서를 받고 대상왕철(大相王鐵) 등을 보내어 이를 영접하였다.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에게 귀부하는데, 향차보마(香車寶馬)가 30여리에 연하고 도로는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은 담을 둘러 싼 것 같았다.

태조는 교외로 나와 왕을 맞아 위로하고 궁동의 갑제1구를 주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 아내를 삼고 12월에는 정승공을 봉하니 그 위는 태자의 위였다. 또 녹1천석을 주고 시종원장도 모두 등용하고 신라를 고쳐 경주러 하고 왕의 식읍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신라가 강부할 때 태조는 심히 기뻐하여 후례로써 대접하며 사자를 시켜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왕은 나라를 과인에게 내주니 그 은혜가 큽니다. 원컨대 우리 종실과 혼인을 맺어 여원히 구남(舅남) 의를 즐기며 합니다.”

하니 왕은 이에 대답하기를

“우리 백부 억겸(億겸)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있었는데, 그의 딸이 덕용이 쌍미하니 그가 아니면 내정을 정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자 태조는 드디어 그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곧 고려 선종의 선고로서 안종으로 추봉하였고, 경종허니 대왕은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으며, 곧 정승공을 봉하여 상부령(尙父令)으로 삼았다.



공은 대송흥국(大宋興國) 4년(978) 무인에 이르러 돌아가시므로 경순(또는 효애라고도 함)이라 시호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때부터 이때까지를 3대로 나누어서 처음부터 진덕왕 때까지 28왕을 상대라고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 때까지의 8왕을 중대라 이르고,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 한다.

논컨데,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로부터 낳다 하고 김씨는 하늘에서 금괘에 넣어 내려보냈다 하고, 혹은 금차에 실려 보냈다 함이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는 일이나 세속이 서로 전하고 전하여 실사로 되고 말았다.



왕의 정화연간(政和年間)에 우리(고려) 조정에서 상서이자량(尙書李資諒)을 송으로 파견하여 조공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부식(臣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고 수행하여 우신관이란 곳에 가서 여선(女仙)의상을 모신 일당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왕보(館伴學士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公)등은 이를 아는가?”

하고 말을 이어

“옛날에 어던 제실(帝室)에 여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없이 아이를 배어 사람들의 의심받은자 되자 곧 배를 타고 진한에 이르러서 아들을 낳는데, 이가 해동의 시주가 되고 제녀(帝女)는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었다고 하는바 이것이 곧 그 상이라.”

하였다.

나는 또 대송국신사왕양(大宋國信使王襄)의 지은 동신성모(東神聖母)문에

“실현(실賢)이 나라를 창시하였다”

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 동신(東神)이란 곧 선도산신의 성자임을 알 수 있으나, 그러나 이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고사를 생각해 보면 왕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위함에는 검소하고 남을 위하여 관후하고 관제를 마련함에는 간략하고 행정을 함에는 간편하여야 하며 지성으로써 중국을 섬겨 제항조빙(梯航朝聘)의 사신이 상속부절하며 항상 자제를 파견하여 입조숙위(入朝宿衛)하며 국학에 입학하여 강습하였다.

이로써 성현의 풍속과 정화(政化)를 승습(承襲)하였으며 홍황(鴻荒)의 풍속을 개혁하여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

또한 왕사의 위영을 의지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그 지역의 군을 취하였으니 가히 성대(盛代)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불법을 받들어 그 폐해를 알지 못하고 여항(閭港)에는 탑묘(塔廟)가 벌려서고 평민들은 사찰로 도망하여 중이되며 병농은 점점 줄어들고 국가는 날로 쇠약해 졌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고 또한 망하지 아니하랴.

이런 때 경애왕은 더욱 황음탐락하였으며 좌우 궁인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출유하여 주연을 베풀고 놀면서 견훤이 침입하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대저 이런 것이 “문외에 한금호(韓擒虎)하고 누두(樓頭)에 장려화(張麗華)라”

는 말과 다름 없을 것이다.



경순왕이 태조(고려)에게 귀명한 것은 비록 마지못하며 한 것 같으나 이는 또한 가상(嘉尙)함이 옳겠다.

만약 그가 역전사수(力戰死守)하며 왕사(고려)에게 항거하다가 힘이 굴하고 세가궁함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박멸되고 무고한 백성들이 참해를 입었을 것인데, 생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귀부(歸附)하였으니 그는 조정에 공이 있었고 백성들에게 심히 큰 덕이 있었다.



옛날에 전(錢)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에 바친 것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이라 일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더 지나침이 있는 것이다.

우리(고려)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이 또한 번연하여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거니와 그후 왕통을 계승한 사람이 모두 그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의 갚음이 아니겠는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