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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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1-07-09 09:51 조회2,062회 댓글0건본문
신라 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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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대 경애왕(景哀王) 때였다. 이때는 이미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세력이 신라를 압도할 때였다.
경애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파죽지세의 기세로 밀고 들어왔다. 왕은 신라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의 군대는 서울을 습격했다.
견훤은 곧장 포석정으로 군대를 몰았다. 경애왕은 그 와중에도 포석정에서 잔치판을 벌이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견훤의 습격을 받은 연회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왕과 왕비는 후궁으로 달아나 숨고, 왕실 인척들과 고관대작들은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적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들 땅바닥을 기면서 노예라도 좋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해 댓다.
견훤은 궁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왕을 찾아 오게 했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두어 명과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협박해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또 견훤은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여러 후궁들을 욕보이게 했다. 그리고는 경애왕의 동생되는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 이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 56대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이 비참하게 죽은 전(前) 왕의 장사를 지낼 때 왕건은 조문사절을 보내 위로했다.
이듬해 봄, 왕건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라벌 근교에 이르자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거기까지 나가서 맞았다. 둘은 서로 예의를 다하여 극진히 대했다.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하늘의 보살핌을 얻지못해 환란이 끊이지 않고, 견훤은 갖은 만행으로 우리나라를 망치니 이한을 어찌하리."
옆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흐느껴 울고 왕건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왕건은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동안에 왕건이나 아래부하들이나 모두 정숙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후에도 왕건은 경순왕에게 사자를 보내 예물을 바치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골고루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이런행동으로 신라 사람들의 환심을 삿음은 물론이다.
경순왕이 즉위한 지도 9년째가 되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국토는 여기저기 모두 남의것이 되어 버리고,도무지 자기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도 없을 만큼 쇠악해져 있었다.
왕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모든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짐이 부덕(不德)하려 나라를 다스린 지 근 십년이 돼가나 점점 쇠약해지기만 하는구려. 백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이 좋을 듯하오.경들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왕건에게 항복하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신하들은 찬반양론이 분분하였다.
그때 태자가 나섰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 이제라도 뜻있는 충성스런 신하들과 힘을 합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뒤 그래도 안된다면 드때 그만둘 일입니다. 어찌 천 년을 이어온 나라의 사직을 이처럼 가볍게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울분네 차서 외치는 태자의 말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그러나 경순왕은 결정을 내렸다.
"태자의 말이 옳다마는.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이미 때늦은 말이다. 아주 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하지도 못해서 어설픈 싸움으로 죄없는 백성들만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하는 일은 나로선 차마 못할 짓이다. 시랑(侍郞) 김봉휴는 즉시 내뜻을 왕건에게 전하도록 하라."
왕은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신라 천 년 역사가 이로써 끝난 것이다.
태자는 통곡하며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개골산(금강산의 다른 이름)으로 들어갔다. 태자의 복장을 벗어 버린 그는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는 거친 삼베옷만을 입었다. 하려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한다.
경순왕의 막내 아들 또한 나라가 멸망하자 그대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항복문서를 받아 즉시 태상(太相) 왕철을 보내 경순왕을 용접토록 했다. 경순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태조 왕건에게 귀순해 왔다. 이때 왕의 행렬이 얼마나 호화롭고 거창했는지 3리가 넘게 뻗쳤고, 구경꾼이 길옆을 가득 메웠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자기의 맏딸 낙랑공주를 주어 아내로 삼게하고 정승벼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던 시종이나 사병들을 모두 그대로 부리게 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경순왕의 토지로 주었다.
태조 왕건은 또 경순왕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지금 왕이 나라를 내게 넘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부디 혼인의 연을 맺어 길이길이 인척간으허 지냅시다."
경순왕은 이 말을 듣고 자기 삼촌 억렴의 딸을 추천했다. 이 딸이 태도의 스물 다섯 왕비 중 하나인 신성왕후(神成王后)김씨다.
경순왕은 그 뒤 40여 년을 더 살고 978년 고려 경종 3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며 고려 왕조에 끼친 공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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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대 경애왕(景哀王) 때였다. 이때는 이미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세력이 신라를 압도할 때였다.
경애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파죽지세의 기세로 밀고 들어왔다. 왕은 신라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의 군대는 서울을 습격했다.
견훤은 곧장 포석정으로 군대를 몰았다. 경애왕은 그 와중에도 포석정에서 잔치판을 벌이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견훤의 습격을 받은 연회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왕과 왕비는 후궁으로 달아나 숨고, 왕실 인척들과 고관대작들은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적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들 땅바닥을 기면서 노예라도 좋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해 댓다.
견훤은 궁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왕을 찾아 오게 했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두어 명과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협박해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또 견훤은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여러 후궁들을 욕보이게 했다. 그리고는 경애왕의 동생되는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 이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 56대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이 비참하게 죽은 전(前) 왕의 장사를 지낼 때 왕건은 조문사절을 보내 위로했다.
이듬해 봄, 왕건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라벌 근교에 이르자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거기까지 나가서 맞았다. 둘은 서로 예의를 다하여 극진히 대했다.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하늘의 보살핌을 얻지못해 환란이 끊이지 않고, 견훤은 갖은 만행으로 우리나라를 망치니 이한을 어찌하리."
옆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흐느껴 울고 왕건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왕건은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동안에 왕건이나 아래부하들이나 모두 정숙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후에도 왕건은 경순왕에게 사자를 보내 예물을 바치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골고루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이런행동으로 신라 사람들의 환심을 삿음은 물론이다.
경순왕이 즉위한 지도 9년째가 되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국토는 여기저기 모두 남의것이 되어 버리고,도무지 자기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도 없을 만큼 쇠악해져 있었다.
왕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모든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짐이 부덕(不德)하려 나라를 다스린 지 근 십년이 돼가나 점점 쇠약해지기만 하는구려. 백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이 좋을 듯하오.경들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왕건에게 항복하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신하들은 찬반양론이 분분하였다.
그때 태자가 나섰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 이제라도 뜻있는 충성스런 신하들과 힘을 합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뒤 그래도 안된다면 드때 그만둘 일입니다. 어찌 천 년을 이어온 나라의 사직을 이처럼 가볍게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울분네 차서 외치는 태자의 말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그러나 경순왕은 결정을 내렸다.
"태자의 말이 옳다마는.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이미 때늦은 말이다. 아주 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하지도 못해서 어설픈 싸움으로 죄없는 백성들만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하는 일은 나로선 차마 못할 짓이다. 시랑(侍郞) 김봉휴는 즉시 내뜻을 왕건에게 전하도록 하라."
왕은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신라 천 년 역사가 이로써 끝난 것이다.
태자는 통곡하며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개골산(금강산의 다른 이름)으로 들어갔다. 태자의 복장을 벗어 버린 그는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는 거친 삼베옷만을 입었다. 하려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한다.
경순왕의 막내 아들 또한 나라가 멸망하자 그대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항복문서를 받아 즉시 태상(太相) 왕철을 보내 경순왕을 용접토록 했다. 경순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태조 왕건에게 귀순해 왔다. 이때 왕의 행렬이 얼마나 호화롭고 거창했는지 3리가 넘게 뻗쳤고, 구경꾼이 길옆을 가득 메웠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자기의 맏딸 낙랑공주를 주어 아내로 삼게하고 정승벼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던 시종이나 사병들을 모두 그대로 부리게 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경순왕의 토지로 주었다.
태조 왕건은 또 경순왕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지금 왕이 나라를 내게 넘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부디 혼인의 연을 맺어 길이길이 인척간으허 지냅시다."
경순왕은 이 말을 듣고 자기 삼촌 억렴의 딸을 추천했다. 이 딸이 태도의 스물 다섯 왕비 중 하나인 신성왕후(神成王后)김씨다.
경순왕은 그 뒤 40여 년을 더 살고 978년 고려 경종 3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며 고려 왕조에 끼친 공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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