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묘비문(벽오유고본) - '김탁'은 '김기'의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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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5-16 18:25 조회1,563회 댓글1건본문
參奉金圻 生員金坪 以外裔居墓下 與姓孫參奉慶建曁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 기미대보 201쪽
참봉 김기(參奉金圻)와 생원 김평(金坪)은 외후손으로서 묘하에 살면서 성손인 참봉 김경건(參奉金慶建)과 더불어 근방에 사는 여러 자손들이 다른 비석으로서 바꾸고 또한 봉식도 더하기로 계획하여 - 기미대보 202쪽
- 언제서부터인가 오자가 발생했나 봅니다. 기미대보에는 올바로 되어 있습니다. 벽오유고의 이 구절이 계암일록과 매원일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기나 김평 모두 광김 예안파이며, 당시 영천에 거주하시던 휘 경건 할아버지께서 큰 역할을 하신 것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기(金圻) 김부인의 아들이다. 자는 지숙(止叔). 오천 북쪽 언덕에다가 서실을 짓고서 호를 삼았다. 평생 바깥일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힘썼고, 시례(詩禮)에 마음을 쏟았다. 큰집에서 재산을 나눌 때에도 많이 가지려 하지 않았고 개끗한 마음으로 욕심을 적게 하니 눈 위에 비치는 달과 같은 깨끗한 마음을 지녔다. 착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마주 보고 엄중하게 책망을 하였다. 세상에서 남과 만남에 있어서는 절대로 위세와 재산으로서 교만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가난함으로써 천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월천 선생께서 그를 퍽 중하게 여겨 특별히 뽑아 도산서원의 원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퇴계선생문집』 및 수적(手迹)을 펴내어 세상에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뒤늦게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은혜에 감사하고 사퇴한 뒤 돌아왔다. 도산서원 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였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이 지은 전기에 이르기를,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기(圻), 자는 지숙(止叔)이다. 참된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하였고, 큰형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였으며, 깨끗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고, 집안 사람들의 가업을 일삼지 않았다. 수석 사이에 서실을 짓고서 북애(北厓)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경사를 두루 보면서 배고픔을 참았으며, 문을 닫고 죽조차 거의 계속 먹지 못하였으나 그곳에 처함에 편안한 듯하였다. 늘그막에 이르러 참봉에 제수되니 왕명을 받고서 드디어 돌아왔다. 57세에 이르러 졸하니 친구들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 했다. 대암(大菴)은 현풍(玄風)에 산다. 학행(學行)으로 관리의 추천에 응하여 정랑을 지냈다. - 국역 선성지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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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金坪) : 김부신(金富信)의 아들. 성품이 독실하여 일찍 사림의 총망을 입었다. 삼도(三道)의 소수(疎首)가 되어 오현(五賢)의 문묘 배향을 청한 적이 있다. 호는 극재(克齋). - 국역 선성지 226쪽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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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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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 묘비문 오자 판단에 큰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벽오유고, 묘비, 족보 이 세 가지의 원문을 분석중인 시간입니다.
가장 확실한 원문으로 판단하고 있는 <벽오유고> 속에도 오자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오자의 범위가 어디까지일런지, 이것도 문제입니다.
매원일기, 계암일록의 발견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살펴주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