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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에 협장한 분묘는 최소 5기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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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4 16:49 조회1,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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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 九月 十四日 (인조 4년 1626년 음력 9월 14일)

晴, 以監司之行, 以志輩爲其墓憂憫, 門親不可退坐, 伯兒催食, 由縣內仍向陵洞, 汝熙及墋皆徃加飛君, 則先早朝行, 以志歷路暫過此, 而實以病患乘晩追徃, 昏黑○亨及而實來, 聞其大略, 時讓會其姓族金景建 三嘉縣監 金孝建等五六人, 張其威勢, 翰林兄墳, 則姑待京中公文, 尙州兄墳, 先令移出, 聞來駭嘆, 奈何奈何, 讓也見曾祖碣文, 麾斥之曰, 豈可以此爲格乎, 其意實欲並動曾祖墓也, 痛惋莫甚, 仍與而實挑灯相議, 適時讓抵書見訊, 汝熙亦至.

○-중략-

○是日時讓之在陵洞也稍久, 謂以志曰, 此碣文, 吾當持去, 且曰某公墓當不遷動, 外言雖如此, 中心未可測, 京中權要處, 渠實囑起, 而佯爲不然, 托以綾原 尹昉諸宰及金自點輩, 無非渠之故也.

맑음. 감사(김시양)의 행차 때문에 이지(김광계) 등은 그 묘(김해 묘)를 걱정스러워했다. 집안 친척들은 어쩔 수 없다며 물러나 앉았다. 큰아이가 먹기를 재촉했다. 현내를 거쳐 곧바로 능동으로 향했다. 여희와 참(김령의 4촌 동생)이 함께 가비군(가비곡에 사는 광산김씨 예안파로 김령의 친척)에게 갔더니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지(김광계)가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 이실(김확 :  김해의 6촌 동생 김전의 손자)은 병 때문에 저녁 무렵 뒤따라왔다. 캄캄하게 어두워져서 요형(○亨 : 김령의 아들)과 이실이 왔다. 그 대략을 들으니 김시양이 그 성족 김경건, 삼가현감 김효건 등 5~6인을 모아 위세를 펴려 하였다고 한다. 내한 형 묘는 서울의 공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상주 형 묘는 먼저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는 령(令)이 내렸다. 들려오는 소리가 놀랍고 한탄스럽다. 아, 어찌 하랴, 어찌 하랴. 김시양이 증조부 묘갈문을 보고는 손짓으로 부르더니 말하기를 “어찌 이것이 옳은 법식이냐?” 하였다고 한다. 그 뜻이 실제로는 증조부의 묘도 함께 움직이려는 것이니 고통스럽고 놀랍기가 막심하다. 이에 이실과 함께 등잔불을 돋우며 상의하여 김시양에게 가서 반박하는 글로 따지기로 하였다. 여희도 왔다.

-중략-

이 날 김시양이 능동에 있다가 곧바로 이지에게 “이 묘갈문은 마땅히 내가 가져간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 모공(김효로)의 묘는 이장할 수 없다고 한 외언(外言 : 외부의 말, 즉 방백이 관할하는 이외 지역에서 온 말, 여기서는 중앙관청에서 온 명령)은 비록 이와 같았지만, 그 속마음(中心)은 가히 예측하기 어렵다. 서울의 권세를 쥔 요처의 우두머리들에게 실제로는 거듭 부탁을 해 놓고는 겉으로만 거짓으로 그렇지 않은 척한 것이다. 능원군(구굉)과 윤방 등 여러 대신 및 김자점 등은 그 우두머리들과 연고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상 두 일기 내용으로 보아 충렬공 묘소 뒤에는 김효로 부부의 묘 2기를 비롯해 앞과 옆에 김해, 김령이 상주 형이라 부르는 사람, 권용경의 조부 등 최소한 5기가 협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과거시험에 관한 것으로 충렬공 묘소와 관계가 없는 부분입니다. 오역이 많으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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