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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주석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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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6 01:55 조회1,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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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형 장례는 임진왜란 후에 있었는데 : 근시재 김해(金垓)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조직해 왜군을 공격하다가 1593년 말에 경주 진중(陣中)에서 향년 39세로 몰하였다. 이 해 11월 경오일에 지례촌의 충렬공 묘소 바로 앞에 장례를 치렀다.(註⑥번 및 김해 묘지명 참조)

김해(金垓) 묘지명(墓誌銘)

이현일(李玄逸) 지음
 근시재 선생(近始齋先生) 김공(金公 : 김해)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93년이 되었다. 어느 날 선생의 손자 성균관 진사[國子上庠] 김면(金愐)이 가문에 전래한 문적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의 선덕(先德)과 의행(誼行)으로 볼 때 묘지(墓誌)가 있어야 할 터인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안정되지 않아 장례를 치를 때 미처 만들지 못하고 그럭저럭 미루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국 실추하여 유명간(幽明間)에 죄를 짓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빨리 묘소에 묘지를 묻어 후세에 알리고 싶었으나, 세대가 멀어질수록 아는 사람이 더욱더 드물어져 묘지명을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오직 그대는 가정에서 익히 들어 왔으므로 반드시 우리 할아버지의 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묘지명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내가 일어나 절하고 사례한 다음 말하기를, “나의 선친(先親)이 일찍이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공의 고모는 바로 나의 어머님이십니다. 선친이 비록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친히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어진 아들들과 노닐면서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을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다행히 중한 인척으로 가호를 받았으므로 여느 사람보다도 더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나, 오늘날의 일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 늦게 태어나 학문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문장도 비루하니, 어떻게 선새의 덕행(德行)을 말하여 먼 후세에까지 전하여 보일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백배(百拜)하고 사양합니다.”라고 하니, 상사군(上舍君)이 거듭 대의(大義)로 책망하였다. 이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가문에 전래한 문적에서 간추리고 들은 바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사적을 서술한다.
 삼가 살펴보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실로 신라(新羅)의 왕자(王子)의 후손이다. 신라가 쇠퇴하자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광주(光州)로 피신하였는데, 이분이 시조가 된 것이다. 고려(高麗) 때에는 김길(金吉)이란 분이 태조(太祖)를 보필해 공로를 세워 품계가 대광(大匡)에 올라 사공(司空)이 되었고, 그 뒤 대대로 광주에 살면서 여러 대 동안 태보(台輔)가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지음성현사(知陰城縣事)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김회(金淮)란 분이 비로소 안동(安東)에서 살았고 그의 아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김효로(金孝盧)가 또다시 예안(禮安)으로 옮기었다. 이조참판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연(金緣)을 낳고, 관찰사가 성균관 생원 김부의(金富儀)를 낳았다. 김부의가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 : 이황)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고 권씨(勸氏 : 권습 勸習)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2월 모일(某日)에 선생을 낳았는데, 휘(諱)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선생이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큰어머니 하씨(河氏)에게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헌칠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장성하자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등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탁월하게 일찍 성취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므로 여러 유명한 분들이 너나없이 탄복하며 허여하였고, 심지어는 나이와 지위를 잊으면서 사귀었다. 이보다 앞서 관찰공(觀察公 : 김연)이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후조당(後凋堂) 김부필(金富弼)이 선생의 백부(伯父)였다. 후조당이 아들이 없어서 선생을 어루만지며 아들처럼 여기었는데, 선생은 살아서 효도를 다하고 죽어서 3년간 심상(心喪)을 입었다. 만력(萬曆)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만 집에 돌아와 영전(靈前)에 전(奠)을 드리고 삼년상이 끝나도록 외부의 일을 보지 않았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추천을 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이 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여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전직되었다. 이 해 겨울에 사원(史院)의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태운 사건으로 인해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정여립(鄭汝立)의 역변(逆變)이 있어 모함당하여 의금부에서 심리(審理)를 받다가 어떤 재상의 말로 인해 사건이 무마되어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 세상을 사절한 채 조정의 시비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고 3,4년간 재야에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 한 달 안에 삼도(三都)가 함락되자 선생이 나라의 비상한 변을 통분한 나머지 향병(鄕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목숨을 버리고 의거(義擧)에 나서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학봉(鶴峰) 김 선생(金先生 : 김성일 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 도내(道內)에 격문(檄文)을 발송하였는데, 선생이 답하기를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임금이 피난가자 신민(臣民)들이 매우 애통하여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 궁벽한 고장에는 필묵(筆墨)만 일삼고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여 빈 주먹만 불끈 쥐고 있으니,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충의(忠義)의 근성으로 복수의 뜻이 간절하여 천지에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치려고 합니다.” 하였다. 8월에 진군(進軍)하여 안동(安東)에 도착하자 여러 고을의 의병이 선생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빈객(賓客)을 부서(部署)로 편성하고 용궁(龍宮)ㆍ함창(咸昌)의 지경으로 진을 옮겨 기회를 보아 적병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정월에 명(明)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왜적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므로, 선생이 형세를 틈타 공격하여 적병의 머리를 상당히 많이 베고 이어 적병을 쫓아 남하하여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회합(會合)하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아들은 어린 데다가 형제마저 없는 것을 생각한 나머지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처리한 다음, 곧바로 군영(軍營)으로 달려와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환이 나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온 군중(軍中)이 친척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고 원근의 알고 모른 사람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갔다.”고 하였다. 이 해 11월 경오일(庚午日)에 고을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소와 같은 묘원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을미년 가을에 임금이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에 순절한 선생의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衣郞)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상락공의 후손으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부임한 자가 있어 강제로 선생의 묘소를 옮기라고 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임시 재실(齋室)의 뒤쪽 산기슭에다 안치해 놓았다. 그때 마침 나라 안에 전쟁이 나 묘지를 택하여 안장하지 못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거음곡(居音谷) 신좌 을향(申坐乙向)의 자리로 이장(移葬)하였는데, 때는 12월 아무날이었고, 그 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풍수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그 날짜는 4월 24일이라고 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정신이 빼어나고 명랑하였으며 행동이 근엄하였다. 그 학문은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의 정대한 길을 얻었다.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정성을 쏟아 조상을 받들었다. 가정을 벋도로 다스려 안팎이 정연하였다. 백부(伯父)와 백모(伯母)를 부모처럼 섬기고 두 집안의 일을 돌보아 은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는 등 사람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종족과 화목하고 향리에 겸양하는 도리를 다하여 길사에 축하하고 흉사에 조문하는 예절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궁핍한 사람을 도와 줄 때도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일찍이 한 필의 말을 내주어 궁한 친구의 급한 일을 도아 주었으며, 주고받는 것을 살펴서 하고 대답을 신중히 하였다. 사람의 작은 허물은 포용하고 사람의 선행을 이야기하기 좋아하였으며, 사람과 사귈 때 구차하게 하지 않고 오래도록 공경하였다. 분지당(賁趾堂) 남치리(南致利),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송소(松巢) 권우(權宇),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존재(存齋) 곽준(郭駿)과 도의(道義)의 벗을 삼아 책상을 마주 대하여 글을 논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번갈아 닦고 다듬는 유익한 바가 아님이 없었다. 거처하는 남쪽에다 조그만 서재를 지어 놓고 ‘근시재(近始齋)’란 편액을 건 다음 날마다 그 속에서 독서하면서 성경(聖經)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고 예서(禮書)를 널리 상고하여 요지의 귀추(歸趨)와 상이점을 연구하고 역대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가 하면 천문(天文),지지(地誌), 병모(兵謀), 사율(師律), 의방(醫方), 복서(卜筮)의 설(說)까지도 모두 원류(源流)를 섭렵하여 대체를 알았다. 학자들이 찾아와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 각자의 재주에 다라 말해 주되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퇴도(退陶)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 나머지 여운(餘韻)을 다스리고 실추된 실마리를 찾아 유학(儒學)을 흥기시키려고 뜻을 가졌으나 어려운 세상을 만나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후학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이보다 앞서 퇴도 선생이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변론을 저술하였는데, 근세에 대유(大儒)로 일컬어진 사람이 이(理)와 기(氣)는 호발(互發)함이 없다는 설(說)을 제창하여 ‘이(理)가 발로되면 기(氣)가 따르고 기(氣)가 발로되면 이(理)가 탄다’는 퇴도 선생의 말을 비난하자, 선생이 그에 대한 반박의 설을 지어 변론하였다. 그 내용에 “천지 사방에 가득 차고 고금에 유행하는 것은 이기(理氣)뿐이다. 사람의 일신(一身)은 이기(理氣)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단(四端)이 발로할 때 비록 기(氣)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理)가 주(主)가 되므로 ‘이(理)가 발로하면 기(氣)가 따른다.’고 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 발로할 때 비록 이(理)가 비록 이(理)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氣)가 주(主)가 되므로 ‘기(氣)가 발로하면 이(理)가 탄다’고 한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학자로 하여금 이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은 데에 나아가 이기가 서로 혼잡되지 않은 묘리를 찾아내어 준칙(準則)을 삼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 일종의 의논이 이와 반대로 이기를 하나로 합쳐서 보고자 ‘이(理)가 발로하면 기(氣)가 따른다’는 퇴도 선생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퇴도 선생의 설이 실로 주자(朱子)의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나온 줄을 모른 것이니, 퇴도 선생을 비난한 것은 바로 주자를 비난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견식의 참됨과 사특한 말을 그치게 한 공로를 근세의 선비들이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글을 지을 때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평범 온아하고 지향하는 뜻이 명백하여 시를 지을 때 혼후(渾厚)하고 담담하여 그 사람됨과 비슷하였다. 평생 저술한 것이 대부분 병화(兵火) 중에 산실되고 몇 권만 집에 간직되어 있다.
 단인(端人) 이씨(李氏)는 관향이 진성(眞城)인데, 할아버지는 이의(李漪)이고 아버지는 이재(李宰)이다. 퇴계 선생의 종손녀(從孫女)로서 유순하고 정숙하여 선생의 배필이 되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향년 42세로 선생보다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처음 장례를 치를 때부터 그 뒤 세 번 이장(移葬)할 때까지 모두 같은 자리에 묻혔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김광계(金光繼)는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선비의 덕행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김광실(金光實)이고, 셋째 아들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김광보(金光輔)이고, 넷째 아들은 김광악(金光岳)이다. 큰딸은 찰방(察訪) 박회무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인(士人) 유암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나의 선친 이시명에게 시집왔는데, 선친은 일찍이 능서랑을 지냈다. 동몽 교관은 아들이 없어 김광실의 아들 김염을 후사로 삼았다. 김광실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초, 김여, 김염, 김선, 김빙이고 딸은 사인(士人) 권계, 권익훈, 이민표에게 시집갔다. 생원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면은 진사이고 둘째 아들은 김이이고 셋째 아들은 김근이다. 큰E라은 사인 정시태에게, 둘째 딸은 생원 변지두에게, 셋째 딸은 사인(士人) 조병에게, 넷째 딸은 금이석에게, 다섯째 딸은 이홍지에게, 여섯째 딸은 권경에게 시집갔다. 김광악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장, 김영, 김성이고 딸은 사인(士人) 김인, 생원 채익하, 사인(士人) 강명에게 시집갔다. 찰방은 1남 박요를 두었다. 유암은 아들이 없고 1녀만 낳아 사인(士人) 정억에게 시집갔다. 나의 어머니는 일찍 죽고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참봉 이상일이고 딸은 사인(士人) 여국헌에게 시집갔다. 김염은 또 아들이 없어 김선의 아들 김순의를 후사로 삼았다. 안팎의 손자, 증손, 현손 남녀는 90여 명이다.
 아!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한 바가 독실하였으니, 하늘이 수명을 더 주어 대업(大業)을 끝마치도록 하였을 경우 조정에 나아가 백성에게 미친 혜택과 물러나 후세에 끼친 다행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년(盛年)에 세상을 떠나 조금도 펼쳐 보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소유한 것을 미루어보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잊고 나약한 것을 일으키며 유도(儒道)를 보호하고 사특한 말을 배척한 공로가 있으니, 또한 끝내 불행한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선생께서는 성실하고 단아했도다. 지조가 엄하였는가 하면 실천에도 독실하였도다. 신중한 효도였고 꿋꿋한 충성이었도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였고 학설의 공도 있었도다. 옛날에 차분한 시서(詩書) 법도 있었도다. 강개하게 전쟁에 나서니 그 모습이 씩씩했도다. 또한 학설을 저술하여 사특한 말을 막았도다. 선배에게 빛이 났었고 오늘날에 혜택을 입혔도다. 시종이 한결같으니 유감과 부끄러움 없도다. 명을 지어 밝히어 후세에 알리도다.
 ▲<국역 국조인물고> 150~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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