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주석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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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6 01:52 조회1,279회 댓글0건본문
⑨선생(퇴계 선생)이 지은 묘갈문 :
증(贈)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참판(吏曹參判)겸(兼)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김효로(金孝盧)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효로(孝盧)요 자(字)는 순경(舜卿)이니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高麗)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광존(光存)의 후손(後孫)인데 지성공(知省公) 이하로 대대로 현달(顯達)하였다. 조(祖)의 휘(諱)는 숭지(崇之)니 목청전(穆淸殿) 직(直)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追贈) 받았고, 고(考)의 휘(諱)는 회(淮)니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 받았다. 공(公)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외조(外祖) 경산현령(慶山縣令) 노응(盧膺)에게서 자랐으므로 이름을 효로(孝盧)라 하였고, 그 후로는 종조부(從祖父) 효지(孝之)에게서 양육을 받아서 예안현(禮安縣) 오천(烏川) 마을에서 살았다. 경자(庚子, 1480)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한 후로는 과거(科擧)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결백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 사람들 더불어 사귀되 구차(苟且)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의 결점(缺點)을 보고서도 심하게는 꾸짖지는 않았다. 제사를 받들되 성경(誠敬)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孝悌)를 강조하였다. 가업(家業)은 겨우 구차함을 면할 뿐이고, 넉넉하여 넘치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친구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말할 때에는 반드시 적선(積善)한 다음에야 남은 경사(慶事)가 있다는 말로써 권면(勸勉)하였다. 일찍이 공(公)의 조행(操行)이 탁이(卓異)하였으므로 향천(鄕薦)을 받아 장차 현달(顯達)하게 되었을 터인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공(公)이 경태(景泰) 갑술(甲戌, 단종 2년, 1454)년 11월에 태어나서 중종가정(嘉靖) 갑오(甲午, 중종 29년, 1534) 12월에 하세하니 누린 바 수(壽) 81년이었으며, 이듬해 9월에 고을 서쪽 지례촌(地禮村)에 안장(安葬)하니 고려(高麗) 시중(侍中) 김공(金公) 방경(方慶)의 묘(墓)와 동원(同原)이었는데 공(公)은 곧 시중공(侍中公)의 7대(七代) 외손(外孫-증참판공 5대조 章榮公 휘 진(稹)께서 시중공 金方慶의 외손자임)이다. 임인(壬寅, 1542)에 공의 아들 연(緣)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 받았다. 공(公)이 양성이씨(陽城李氏) 군수(郡守) 지(持)의 딸을 맞이하니 바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순지(純之)의 손녀(孫女)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長子)는 연(緣)이니 기묘(己卯, 1519)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이르렀고, 차자(次子)는 유(綏)로 을유(乙酉, 152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두 딸은 용궁현감(龍宮縣監) 김우(金雨) 훈도(訓導) 금재(琴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관찰공(觀察公)은 창녕조씨(昌寧曹氏)를 맞이하여 이남(二男)을 두어 부필(富弼)과 부의(富儀)인데 모두 생원(生員)이요, 삼녀(三女)는 현감(縣監) 김난종(金蘭宗) 참봉(參奉) 이용(李容) 생원(生員) 박사눌(朴思訥)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생원(生員)은 순천김씨(順天金氏)를 맞아 삼남(三男)을 두었는데, 부인(富仁)은 기유(己酉)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고, 다음은 부신(富信)이요 부륜(富倫)은 생원이요 일녀(一女)는 이빙(李憑)에게 출가하였다. 현감의 오남(五男은 부춘(富春), 수춘(壽春), 귀춘(貴春), 낙춘(樂春),말춘(末春)이요, 일녀(一女)는 안희빈(安喜賓)에게 출가하였으며, 훈도(訓導)의 이남(二男)은 생원(生員) 응협(應夾) 응훈(應壎)이요 이녀(二女)는 참봉(參奉) 이빙(李憑), 이치(李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무신(戊申, 1548) 4월에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가 돌아가니 수(壽)가 91세요 그해 12월에 공(公)의 묘좌(墓左)에 부장(祔葬)하였다. 아! 공(公)과 부인(夫人)이 다 같이 상수(上壽)하였고,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고 준수하여 아름다움을 이어 꽃다운 향기가 연(聯)하여 그 집을 빛나게 하는 이가 계속 태어나므로 먼저 적선한 뒤에 경사가 따른다는 그 말을 지금에 더욱 증험할 수 있게 되노니 세상에 착한 일을 하는 자 또한 그 권하는 바를 알 수 있도다. 명(銘)하여 가로되, 선비가 몸을 닦음이 반드시 세상에 쓰이려 함만은 아니리라. 오직 몸가짐이 개제(愷悌)하니 복록(福祿)의 터전일세. 저 아름다운 임천(林泉)에 공(公)이 은거(隱居)하였음에, 많고 많은 자손들이 그 유서(遺緖)를 이었도다. 누가 하늘이 정한 이치(理致) 여기에 있지 않다 하리요, 세상 여러 집안 사람들 이 글 한번 살펴보소.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지제교(知制敎)이황(李滉)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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