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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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8-08-16 01:51 조회2,078회 댓글2건본문
[충간위 / 계암일록] 충렬공 묘소 관련 일기_01 계암일록(1608년 2월 19일) 주석
①戊甲 : ‘戊申’의 오기. 선조 41년인 1608년이다.
②判生二兄 : 판사 형과 생원 형.
•판사 형 : 김지(金址). 金富信의 맏아들. 자(字) 景建. 內資寺 正. 배위는 숙인 평창 蔡氏. 아들 光宇, 光述 형제와 사위 權圭, 權赫, 權垍가 있다.
•생원 형 : 김평(金坪). 金富信의 셋째 아들. 자(字) 季平. 金富仁의 넷째 아들 김기(金圻)와 함께 임인년에 감사 이시발과 휘 慶建 할아버지께서 충렬공 묘비를 개수할 당시 외후손으로 참여하였다. 김기는 계암일록에 ‘북애형(北厓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역 선성지(226쪽)에는 “성품이 독실하여 일찍 사림의 총망을 입었으며, 삼도(三道)의 소수(疎首)가 되어 오현(五賢)의 문묘 배향을 청한 적이 있다. 호는 극재(克齋)”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以志伯仲李士安 : 이지의 형제 중 맏이와 둘째, 이사안
•이지 : 김광계(金光繼)의 자(字). 김해(金垓)의 아들 4형제 중 맏이로 광산김씨 예안파 종손이다.
•김광계(金光繼) : 김해(垓)의 아들.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다. 정치가 혼란해지자 문을 닫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 인조가 개혁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란 때에 향인이 추대하여 의병장이 되어 걸어서 고개 아래에 이르니 남한산성이 지켜지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돌아가 숨어서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국역 선성지> 230~231쪽.
•이지의 형제 : 金富儀의 아들 光繼(字 以志), 光實(以健), 光輔(以 道), 光岳(以直) 4형제를 말한다. 김부의의 사위는 박회무(朴檜茂 字 仲植), 류암(柳嵓), 이시명(李時明)이다. 계암일록에 등장하는 박중식은 박회무를 가리킨다.
•이사안 : 미확인.
④朴仲植 : 생몰년 미상. 본관 반남(潘南). 이름은 회무(檜茂)이며, 중식(仲植)은 자(字)이다.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목사 승임(承任)의 손자이다.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1606년(선조 3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소를 올려 화의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년)에 또 소를 올려 시정(時政)과 서북관방의 허술함을 논하고 선정양병(選丁養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⑤金繼道 金時獻
•김계도 : 익원공의 8대손, 문정공(휘 질)의 5대손. 배위가 정부인 예안이씨로 장인이 이구(李榘)이다. 큰아드님 휘 성기(成器)는 기미대보에 후손 기록이 없으며, 둘째 아드님 중기(重器)는 사위만 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위는 鄭栯, 李斗宗, 李命衡이다. 계암일록에는 끝자가 ‘道’로 기록돼 있으나, 기미대보에는 ‘燾’로 적혀 있다. 김령이 기록한 것은 조보(朝報)를 보고 기록한 것이므로 개명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김계도(金繼燾)
국조문과방목 기록
김계도(金繼燾) | |
<문과> 선조(宣祖) 28년 (1595) 을미(乙未) 별시2(別試) 병과(丙科) 10위 | |
<인적사항> | |
자 |
순원(順元) |
생년 |
계묘(癸卯)1543 |
합격연령 |
53 |
본관 |
안동(安東) |
<이력사항> | |
전력 |
참봉(參奉) |
관직 |
지사(知事) |
타과 |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진사시(進士試) |
<가족사항> | |
부 |
김구(金龜) |
조부 |
김언박(金彦博) |
증조부 |
김변(金汴) |
외조부 |
박언효(朴彦孝) |
처부 |
이구(李榘) |
출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계대 : 翼元公(휘 士衡) → 승(陞) → 종숙(宗淑) → 질(礩) → 의동(義童) → 변(汴) → 언박(彦博) → 구(龜) → 1子 계훈(繼勳), 2子 계열(繼烈), 3子 계희(繼熹), 4子 계도(繼燾), 5子 계점(繼點), 女 황사도(黃師道), 女 풍원령(豊原令), 女 이대로(李大老)
•김시헌 : 제학공(휘 익달)의 8대손.
생몰년 1560년(명종 15년)∼1613년(광해군 5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과 싸우다 전사한 제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년)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일대(一代)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의 아버지 제갑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호남·영남 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다.
계대 : 提學公(휘 益達) → 고(顧) → 맹렴(孟廉) → 철균(哲鈞) → 수형(壽亨) → 언묵(彦默) → 석(錫) → 제갑(悌甲) → 1子 시헌(時獻), 2子 시백(時伯), 3子 시준(時俊), 4子 시걸(時傑)
김시헌(金時獻)
국조문과방목 기록
김시헌(金時獻) | |
<문과> 선조(宣祖) 21년 (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 |
<인적사항> | |
자 |
자징(子徵) |
생년 |
경신(庚申)1560 |
합격연령 |
29 |
본관 |
안동(安東) |
<이력사항> | |
전력 |
생원(生員) |
관직 |
이조참판(吏曹參判) |
타과 |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생원시(生員試) 생원(生員) 1등(一等) 4위 |
<가족사항> | |
부 |
김제갑(金悌甲) |
조부 |
김석(金錫) |
증조부 |
김언묵(金彦默) |
외조부 |
윤개(尹漑) |
처부 |
홍성민(洪聖民) |
출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⑥翰林兄 : 김해(金垓).
1555(명종 10)∼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광산.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관찰사 김연(緣)의 손자이며, 부의(富儀)의 아들이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신(朝臣)의 천거로 1587년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9년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1월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 등지에서 분전하였다. 이듬해 3월 좌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상주 당교(唐橋)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거두고, 4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적을 차단, 공격하여 대승하였으며, 5월에는 양산을 거쳐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시재집》이 있다.
⑦金景建 : '金慶建'의 오자. 익원공의 8대손, 문정공(휘 질)의 5대손.
계암일록에 '金景建'과 '金慶建'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김령이 명확히 모르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계대 : 翼元公(휘 士衡) → 승(陞) → 종숙(宗淑) → 질(礩) → 성동(贖) → 려(濾) → 언침(彦沈)
언침(彦沈) → 1子 림(琳) → 경건(慶建)
언침(彦沈) → 2子 근(瑾) → 효건(孝建)
언침(彦沈) → 3子 찬(瓚) → 홍건(弘建)
•김림(金琳) : 字 伯玉. 秉節副尉. 처가인 영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세거함. 배위 예안 김씨, 장인 생원 김황(金滉).
•김경건(金慶建) : 字 善遠. 진사. 경릉참봉. 壽71歲. 배위 함양 박씨, 장인 佐郞 박순(朴筍).
•김효건(金孝建) : 字 善述. 號 警弦翁. 삼가현감, 동지중추부사, 장예원 판결사. 배위 증정부인 청송심씨, 장인 심창수. 계배 증정경부인 나주박씨, 장인 박열(朴悅).
1584(선조 17)∼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선술(善述), 호는 경현옹(警絃翁) 또는 경옹(警翁). 현감 근(瑾)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장령 등을 지냈다.
1623년 장령으로 있을 때 함경감사 목장흠(睦長欽)의 인목대비 폐모절목(廢母節目) 작성문제를 변명하다가 흥해군수(興海郡守)로 체차(遞差)를 당하였다. 1634년에는 광해군 때 폐모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던 문제로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양해를 받았다. 후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⑧증조부(김효로) 묘소는 상락공과 같은 언덕인데, 상락공 묘소가 앞에 있다. 상락공은 내 증조부의 7대 외조부이다. : 김효로의 묘는 능골 충렬공 묘 위에 있다. 충렬공의 셋째 사위가 안동권씨 권윤명(權允明)이며, 권윤명의 사위가 광산김씨 김진이다.
•권윤명의 계대 : 태사공 권행 → 2세 권인행 → 3세 권책 → 4세 권광한 → 5세 권광진 → 6세 권황원 → 7세 권정윤 → 8세 권필생 → 10세 권영하 → 11세 권사발 → 12세 권득 → 14세 권제 → 15세 權允明 → 16세 권석, 권내, 권효신, 女 광산김씨 金稹
•김진의 계대 : 1세 김흥광 → 2세 김식 → 3세 김길 → 4세 김준 → 5세 김책 → 6세 김준정 → 7세 김양감 → 8세 김의원 → 9세 김광중 → 10세 김체 → 11세 김주영 → 12세 김광존 → 13세 김대린 → 14세 김련 → 15세 김사원 → 16세 金稹 → 17세 金天利 → 18세 金務 → 19세 金崇之 → 20세 金淮 → 21세 金孝盧
⑨선생(퇴계 선생)이 지은 묘갈문 : 별도 게시물 참조
⑩증조부의 장례는 이미 100년쯤 전이다. : 충렬공께서 돌아가신 해는 1300년이며, 김효로는 1534년에 몰했다.
•김효로(金孝老) : 자(字) 순경(舜卿). 고려 지문하성사 광산인(光山人) 광종(光存)의 후예이다. 처음에 오천(烏川)에 살기 시작하여 예안 고을 사람이 되었다. 성화 경자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로 과거 시험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 살면서 청렴결백함으로 스스로를 지켜서 남과 억지로 사귀려 하지 않았으며, 남을 지나치게 질시하지도 않았다.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정성과 공경으로써 하였고 자제들을 교욱함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로써 하였다. 또한 거실을 잘하였는데 참으로 완전함을 취할 뿐이었다. 이익을 꾀하지 않아 친구들이 오면 서로 속마음을 충분히 토로하였으니 언필칭 착한 행실을 쌓은 집안에는 뒷날에 경사스러움이 있음이었다. 모든 행실은 우뚝하여 우러를 만하였기 때문에 고을에서 추천으로 크게 쓰이려 하였으나 추천에 응하지 아니하고 졸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경태 갑술년(1454)에 졸하니 향년은 81세였다. 현 서쪽 지례촌(知禮村)에 장사하였는데 고려 시중 김방경(金方慶)의 묘와 같은 둔덕이다. <국역 선성지> 162쪽.
- 경태 갑술년(1454년)은 가정 갑오년(1534년)의 오류임.
⑪상락공 비석 :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렬공께서 돌아가시자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그 뒤 예안현감으로 부임한 9대손 예생(禮生 : 金九容 → 明理 → 孟獻 → 自壤 → 禮生)이 묘갈을 세웠으나 이 묘갈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부서졌다. 후손 예생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기간은 <국역 선성지> 등에 의하면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부터 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까지이다.
그 뒤 1593년 11월(음력)에 광산인 김해의 묘를 충렬공 묘 아래에 쓰면서 충렬공의 묘지석이 출토되었다. 또한 임인년(1602년)에 외손인 감사 이시발과 후손 경건 등이 주축이 되어 새 비석을 세웠다. 이때 김효로의 후손인 김기와 김평 등도 묘비를 새로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이로써 충렬공 묘소 실전시기가 우리 족보에 기록된 200년간이 아니라 96년간이었음이 충렬공 24대손 윤만에 의해 밝혀졌다.(<충렬공(忠烈公) 묘소(墓所) 실전(失傳) 시기(時期)에 관한 고찰(考察)> 참조)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 36년(1603년) 9월 9일 충렬공 묘소를 봉식(封植)하고 초목을 금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 별도 게시물 참조
⑫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무렵에 감사 이시발에게 말했더니, 이시발 역시 상락공의 외손이라 마침내 협력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다. : 註⑪번 참조.
⑬경차관(敬差官) 김방(金昉) : 제학공(휘 익달)의 8대손. 기미대보에 배위가 광주김씨로, 국조문과방목에는 장인이 ‘신효충’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방(金昉)
국조문과방목
김방(金昉) | |
<문과> 선조(宣祖) 1년 (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 |
<인적사항> | |
자 |
명원(明遠) |
생년 |
갑오(甲午)1534 |
합격연령 |
34 |
본관 |
안동(安東) |
<이력사항> | |
전력 |
생원(生員) |
관직 |
정(正) |
타과 |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생원시(生員試) |
<가족사항> | |
부 |
김윤운(金潤運) |
조부 |
김익(金釴) |
증조부 |
댓글목록
김재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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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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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실기를 위하여 노력하심에 감사드리며 .대단하신 탐구력에 놀랐습니다. 참으로 부럽군요.
저는 익원공의 문정공후손중 성동(대사헌공)-려-언침(참의공 수원문중)의 13세손 재영입니다
주석하신 ⑦金景建의 景은 慶建이 맞고요 경건의 아버님 淋은 琳으로 삼형제분 전부가 임금왕(王)변을 사용하고 있으며 경건할아버님의 후손이 영주에 김주식(016-832-4779)형제가 살고 있으며
저는 두째 瑾의 장자 孝建후손으로 경현공의 행장기와 창수록 필사본이 있습니다.
안사연 여름 캠프에서 뵙고자 하였으나 ....저도 하루만 참가하였습니다.. 다음기회에 만날수 있겠지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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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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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지적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예안파 일기를 살펴보면서 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제가 새로 찾은 것은 거의 없고 종친들께서 우리 홈에 귀한 자료를 올려주신 것을 보고 발췌 정리하여 주석을 달았을 뿐입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종친 여러분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것을 느끼고 잇습니다.
여름 캠프는 집안 사정으로 참여하기가 곤란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찾아뵙고 인사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