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안동지방의 안동김씨 혼맥(1)광산김씨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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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11-19 12:50 조회2,091회 댓글0건본문
참고자료(***)
장영공 호적 (章榮公 戶籍)
송도(松都) 서부 향천(香川)11리 계유(癸酉)년 방(坊)에 기재된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김진의 호구에 준(准)한다. 연령이 42세로 임진생이요 본관은 화평부(化平府: 광산)이니 정미(1367)년 추장제술과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삼중대광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상호군으로 증시 정경공(貞景公)인 사원(士元)이니 고명은 구, 또는 원구(元具)요 할아버지는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로 증시 양간공(良簡公)인 연(璉)이니 고명은 중룡(仲龍)이요 증조는 추봉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인 대린(大鱗)이요 어미니는 순정군부인 안씨니 본관은 흥주로 외조는 문선왕 배향공신 선수(宣授)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유학제거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관대사제학 수사 판판도사 감찰사사로 시호 문성공인 안향(安珦)이니 고명은 유(裕)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권씨니 연령이 39(을미생)세요 본관은 복주로 아버지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으로 치사한 권윤명(權允明)이니 고명은 명준(明準)이다 졸하였다. 할아버지는 추봉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상장군인 제(濟)요 증조는 추봉병부상서 상장군인 득봉(得봉)이요 어머니는 영가군부인 김씨니 본관은 안동부로 졸하였고 외조는 선수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사 상락군으로 시호 충렬공인 김방경(金方慶)이다. 병산(병産)하여 1남은 좌우위 보승산원 광리(光利)니 연령이 25(기유생)세로 절부(호구에 기록했다는 듯)하였고 처는 원씨니 연령이 24(경술생)세로 본관은 원주요 아버지는 추성좌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찬성사 판판총부사로 치사한 관(瓘)이니 졸하였고 증조는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로 치사하여 시호는 문순공인 부(傅)요 어머니는 남양군부인 홍씨니 본관은 남양부요 외조는 삼중대광 남양부원군으로 시호 광정공인 규(奎)다. 병산하여 1녀의 연령은 6(무진생)세니 절부하였고 1남 파지의연령은 5(기사생)세니 절부하였고 2남 파지의 연령은 4(경오생)세니 절부하였고 3남 파지의 연령은 3(신미생)세니 절부하였고 2녀 소사의 연령은 1(계유생)세니 호구에 절부하였다. 1녀는 화평군 부인이니 연령은 23(신해생)세로 절부하였고 남편은 승봉랑 동부령 박덕룡(朴德龍)이니 연령이 24세로 본관은 죽주(竹州)요 아버지는 추충익대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감찰대부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군부판서 상호군인 사명 원(遠)이니 고명은 경(瓊)이요 할아버지는 추성찬화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전리사사 연흥군으로 시호 문광공인 전지(全之)니 고명은 의지(宜之)요 증조는 전법판서 추봉 첨의시랑 찬성사 판전리사사인 휘(煇)요 어머니는 당성군부인 홍씨니 본관은 남양부요 외조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상호군으로 치사하여 시호 양순공인 홍경(洪敬)이다. 병산하여 1남 용안(龍眼)은 연령이 7세니 절부하였고 1년의 연령은 5세니 절부하였고 2남 파지는 연령이 4세니 절부하였고 3남 파지는 연령이 3세니 절부하였고 4남 파지는 연령이 1세니 호구에 절부하였다.
2남은 사온승동정 영리(英利)니 고명은 정리(貞利)요 연령은 20(갑인생)세로 절부하였고 처는 홍씨니 연령은 19(을묘생)세로 본관은 남양부요 아버지는 봉선대부 선공부령 홍승연(洪承演)이요 할아버지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상호군으로 치사하여 시호 양순공인 경(敬)이요 증조는 배향공신 진충공덕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광정대부 첨의중찬 상호군 판전리사사로 시호 충정공인 자번(子藩)이요 어머니는 연안군부인 이씨니 본관은 연안부요 외조는 통헌대부 밀직부사 민부전서로 치사한 이득량(李得良)이다. 병산하여 1남은 연령이 5(기사생)세니 호구에 절부하였다.
3남은 사온승동정 성리(成利)로 연령이 10(갑자생)세니 절부하였고
4남은 개명하여 안리(安利)로 연령이 6(무진생)세니 절부하였고
2녀의 연령은 2(신미생)세니 절부하였고
5남 파지는 천리(天利)로 1(계유생)세니 호구에 절부하였다.
할아버지의 처부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상호군인 조저(曺著)니 고명은 시저(時著)요 관관은 능성이니 졸하였고 아버지는 검교 신호위장군인 추재(樞材)니 졸하였고 할아버지는 호장보윤인 자렴(子廉)이니 졸하였고 증조는 호장인 사단(思旦)이니 졸하였고 어머니는 회안현군 이씨로 본관은 광주(廣州)니 졸하고 외조는 태자첨사 이영필(李永弼)이니 졸하였고 호구에 절부하였다. 증조는 추봉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판병부사인 대린(大鱗)이요 아버지는 추봉은청광록대부 지문하성사인 광종(光存)이요 할아버지는 추봉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 상장군인 주영(珠永)이니 호(戶)하였고 증조의 처부는 호장보윤인 김준령(金俊齡)이니 본관은 광주(光州)로 졸하였고 호하였다. 외조는 문선왕 배향공신 선수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시랑중 유학제거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관대사제학 수사 판판도사 감찰사사로 시호 문성공인 안향(安珦)이니 본관은 흥주(興州)인데 아버지는 추봉수태사 문하시중 행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인 부(孚)요 할아버지는 추봉추밀원부사 상장군인 영유(永儒)요 증조는 추봉ᄉ힌호위상장군인 자미(子美)요 어머니는 순안군부인 우씨로 본관은 강주(剛州)니 졸하였고 외조는 장사랑 예빈승동정 우윤성(禹允成)이니 졸하였고 호하였다. 처의 아버지는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장군인 권윤병(權允明)이니 졸하였고 아버지는 추봉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상장군인 득공(得公)이요 증조는 전중내급사동정인 사발(思拔)이니 졸하였고 어머니는 영가군부인 김씨니 본관은 안동부요 외조는 도렴승동정 김광후(金光厚)니 졸하였고 고하였다. 처의 외조는 선수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 상락군으로 시호 충렬공인 김방경이니 본관은 안동부요 아버지는 추봉중서령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지제고인 효인(孝仁)이요 주부인 의화(義和)요 어머니는 추봉금관국대부인 송씨니 본관은 김령이요 신호위 정용낭장인 송기(宋耆)니 졸하였고 이하는 준(准)하지 않고 인(印)하였다.
장영공 유문 시
바람이 엷은 구름조차 쓸은 듯 맑은데
밝은 달이 푸른 하늘에 둥실 떴네
수정(水晶)같이 찬 기운은 눈(雪)빛을 시새우고
맑은 빛은 사롱(비단으로 싼 등불)을 비쳐주네
보름 밤은 오직 밝기만 한데 술동이에 달이 비치니 동이채 비울 것 같네
이 정경(情景) 벼개에 옮겨 접어 두었다가 임과 같이 즐기고자
ᄋ월하의 회포를 추상서에게 올리는 글귀
장영공 서 청서우 추상서
엎드려 생각하니 절후는 동지(冬至)요 때는 겨울이라 음산한 바람소리 하늘이 높고 기온이 차가우며 먼 구름 검게 일어나니 못은 넓고 연광(年光)은 재촉하네 띠 집의 짧은 촛대아래서 뉘와 함께 매와의 맑은 격을 찾아보며 개인 창 책상앞에 술을 대하여 서로 수작할 만하도다
시물을 살펴보고 사람을 생각하니 빠른세월 어이하며 지난 일을 회상하는 흥따라 꿈속에 혼이 날으는 듯하도다 강서의 초륜을 불러 천진(天津)의 유택(유宅)을 찾고 바둑으로 승부를 가리어 빙부(憑婦)가 수레에 내리게 하고 연단(鍊丹)에 정신을 쏟아 장자의 시구를 이어볼까 운하(구름안개)가 빛을 거두니 돌아오지 못하는 왕손(王孫)을 원망하고 임학(숲속 구렁)이 시름을 띄었으니 공자에게 바람이 있는 듯 하도다.
한 장 편지로 높은 자리를 두드리노라
답 추상서
지난 겨울에 보내주신 글을 해가 지나고 봄이 다 된 뒤에야 받아보니 후의에 감사하는 마음 헤아릴 수 없나이다. 다만 사사로운 일에 몰두되고 또 인편 얻기도 용이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회답을 드리지 못하니 게으른 죄 크나이다. 혹 넓으신 도량으로 용서하여 주실줄 믿사오나 마음은 향상 죄송하여 큰 짐을 짊어진 듯합니다. 아뢰옵나니 대감의 기체 만복하심을 위로하고 비나이다 생(生)은 근근히 어리석은몸을 부지하오니 더 아뢸 만한 것은 없습니다 보내주신 서문은 뜻이 극진하여 받들어 읽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황홀케 하는도다. 비유컨대 큰 고기점을 먹음에 씹을수록 맛이 더 좋은 것과 같으니 후의에 감사하오며 가보로 전하겠아오나 민첩치 못한 저로써 어떻게 이런 글을 얻었는지 모르겠나이다 너무 과장하신데 대하여 용렬한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문 말미에 깨우쳐 주신 교훈은 나약한 자질을 격려하여 주시니 좋은 경계를 얻었는지라 감히 머리를 조아리지 아니하리까 남북의 상거가 먼지라 뵈올날을 기약치 못하고 편지로 망연히 문후하오며 겸하여 지난 허물을 사과드립니다.
天利 (충숙왕 계유ㅓ생) 배 밀양박씨 부 동지밀직 光厚
▶17세 김천리(金天利)
17세 김천리(金天利)(양간공파/밀직부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忠肅王 癸酉生이며,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면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좌명원종훈(佐命原從勳)에 기록되었다. 묘(墓)는 고양이었으나 실전되었다.
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父 동지밀직(同知密直) 광후(光厚)이다.
18세 務 배 영가김씨 부 繕工令 瑞麟
19세 崇之 배 죽산안씨 부 판전농시사
20세 淮(회) 배 안강노씨 부 응(膺)
21세 효로
21세 김효로(金孝盧)(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安東예안파 입향조)(1454~1534) 81歲.
조선 전기의 학자. 字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회(淮)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안강노씨(安康盧氏)로 현령(縣令) 응(膺)의 딸이다.
1480년(성종 12) 생원시에 3등 8인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 결백으로 신조를 삼고 남과 사귀되 구차하지 않았으며 남의 악함을 보고도 관용을 베풀었다. 제사를 받들되 성경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로써 하였다. 부귀를 구하지 않고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았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에 있다.
배 양성이씨 부 군수 持 조부 판중추부사 졍평공 순지
22세*緣(호 雲巖)
▶22세 김 연(金緣)
22세 김연(金緣)(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 (1487~1544) 58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자유(子由), 호는 운암(雲巖), 죽연(竹淵) ,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효로(孝盧)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거쳐 1519년(중종 14) 식년시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혔고 1520년(중종 15) 춘추관 한림이 되었다. 대교와 봉교를 거쳐 1524년(중종 19)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 때 간신 김안로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의흥현감을 자청하였고 1528년(중종 23) 전적으로 승진되었다. 공조, 예조의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 흥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37년(중종 32) 지평, 사예를 거쳐 군자감정,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김안로의 무리 채무택(蔡無擇), 심언광(沈彦光)이 모의하여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려 하자 이언적과 함께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김안로가 다시 정권을 잡으니 군자감 판관으로 임명되어 돌아오니 중종이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간신에게 미움을 당한 줄 모르고 외방으로 멀리 나가서 수고한 일은 내 마음에 불한함이 있다."고 하였다. 1538년(중종 33) 군자감정, 성주목사로 있다가 그 해 탁영시 문과에 병과 9인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승진, 영주부사로 나갔다. 1541년(중종 36)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오르고 1542년(중종 37) 가선대부로 승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이언적과는 도의로 사귀었고 옥산서재(玉山書齋)에 여러번 가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1544년(중종39)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병사했다후학이 사우(祠宇)를 지어 향사하고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富弼(호 後凋堂) 문과 강원도관찰사. 운암파조
23세*富儀(호 挹淸亭) 생원
24세*垓 (호 近始齋, 문과 검열 역 증 이조판서 겸 대제학 임란의병대장
25세 光繼(梅園) 매헌공파 -26세 렴(石+廉) 군자리 종손
25세 光實(號溪厓) - 26세 초. 려. 선. 빙 厓(애)
25세 光輔(호 龍門-26세 면. 이. 근
25세 光岳(호 野逸齋)-26세 정 영 성
▣ 김해(金垓) 묘지명(墓誌銘)
이현일(李玄逸) 지음
근시재 선생(近始齋先生) 김공(金公 : 김해)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93년이 되었다. 어느 날 선생의 손자 성균관 진사[國子上庠] 김면(金?)이 가문에 전래한 문적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의 선덕(先德)과 의행(誼行)으로 볼 때 묘지(墓誌)가 있어야 할 터인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안정되지 않아 장례를 치를 때 미처 만들지 못하고 그럭저럭 미루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국 실추하여 유명간(幽明間)에 죄를 짓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빨리 묘소에 묘지를 묻어 후세에 알리고 싶었으나, 세대가 멀어질수록 아는 사람이 더욱더 드물어져 묘지명을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오직 그대는 가정에서 익히 들어 왔으므로 반드시 우리 할아버지의 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묘지명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내가 일어나 절하고 사례한 다음 말하기를, “나의 선친(先親)이 일찍이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공의 고모는 바로 나의 어머님이십니다. 선친이 비록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친히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어진 아들들과 노닐면서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을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다행히 중한 인척으로 가호를 받았으므로 여느 사람보다도 더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나, 오늘날의 일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 늦게 태어나 학문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문장도 비루하니, 어떻게 선새의 덕행(德行)을 말하여 먼 후세에까지 전하여 보일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백배(百拜)하고 사양합니다.”라고 하니, 상사군(上舍君)이 거듭 대의(大義)로 책망하였다. 이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가문에 전래한 문적에서 간추리고 들은 바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사적을 서술한다.
삼가 살펴보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실로 신라(新羅)의 왕자(王子)의 후손이다. 신라가 쇠퇴하자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광주(光州)로 피신하였는데, 이분이 시조가 된 것이다. 고려(高麗) 때에는 김길(金吉)이란 분이 태조(太祖)를 보필해 공로를 세워 품계가 대광(大匡)에 올라 사공(司空)이 되었고, 그 뒤 대대로 광주에 살면서 여러 대 동안 태보(台輔)가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지음성현사(知陰城縣事)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김회(金淮)란 분이 비로소 안동(安東)에서 살았고 그의 아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김효로(金孝盧)가 또다시 예안(禮安)으로 옮기었다. 이조참판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연(金緣)을 낳고, 관찰사가 성균관 생원 김부의(金富儀)를 낳았다. 김부의가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 : 이황)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고 권씨(勸氏 : 권습 勸習)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2월 모일(某日)에 선생을 낳았는데, 휘(諱)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선생이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큰어머니 하씨(河氏)에게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헌칠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장성하자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등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탁월하게 일찍 성취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므로 여러 유명한 분들이 너나없이 탄복하며 허여하였고, 심지어는 나이와 지위를 잊으면서 사귀었다. 이보다 앞서 관찰공(觀察公 : 김연)이 2남을 두었는데,큰아들 후조당(後凋堂) 김부필(金富弼)이 선생의 백부(伯父)였다. 후조당이 아들이 없어서 선생을 어루만지며 아들처럼 여기었는데, 선생은 살아서 효도를 다하고 죽어서 3년간 심상(心喪)을 입었다. 만력(萬曆)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만 집에 돌아와 영전(靈前)에 전(奠)을 드리고 삼년상이 끝나도록 외부의 일을 보지 않았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추천을 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무자년(戊子年1588년 선조 21년)에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이 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여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전직되었다.이 해 겨울에 사원(史院)의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태운 사건으로 인해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정여립(鄭汝立)의 역변(逆變)이 있어 모함당하여 의금부에서 심리(審理)를 받다가 어떤 재상의 말로 인해 사건이 무마되어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 세상을 사절한 채 조정의 시비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고 3,4년간 재야에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 한 달 안에 삼도(三都)가 함락되자 선생이 나라의 비상한 변을 통분한 나머지 향병(鄕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목숨을 버리고 의거(義擧)에 나서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학봉(鶴峰) 김 선생(金先生 : 김성일 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 도내(道內)에 격문(檄文)을 발송하였는데, 선생이 답하기를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임금이 피난가자 신민(臣民)들이 매우 애통하여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 궁벽한 고장에는 필묵(筆墨)만 일삼고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여 빈 주먹만 불끈 쥐고 있으니,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충의(忠義)의 근성으로 복수의 뜻이 간절하여 천지에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치려고 합니다.” 하였다. 8월에 진군(進軍)하여 안동(安東)에 도착하자 여러 고을의 의병이 선생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빈객(賓客)을 부서(部署)로 편성하고 용궁(龍宮)ㆍ함창(咸昌)의 지경으로 진을 옮겨 기회를 보아 적병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정월에 명(明)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왜적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므로, 선생이 형세를 틈타 공격하여 적병의 머리를 상당히 많이 베고 이어 적병을 쫓아 남하하여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회합(會合)하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아들은 어린 데다가 형제마저 없는 것을 생각한 나머지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처리한 다음, 곧바로 군영(軍營)으로 달려와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환이 나 향년 39세로세상을 떠났다. 온 군중(軍中)이 친척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고 원근의 알고 모른 사람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갔다.”고 하였다.
이 해 11월 경오일(庚午日)에 고을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소와 같은 묘원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을미년 가을에 임금이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에 순절한 선생의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衣郞)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상락공의 후손으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부임한 자가 있어 강제로 선생의 묘소를 옮기라고 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임시 재실(齋室)의 뒤쪽 산기슭에다 안치해 놓았다. 그때 마침 나라 안에 전쟁이 나 묘지를 택하여 안장하지 못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거음곡(居音谷) 신좌 을향(申坐乙向)의 자리로 이장(移葬)하였는데, 때는 12월 아무날이었고, 그 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풍수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그 날짜는 4월 24일이라고 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정신이 빼어나고 명랑하였으며 행동이 근엄하였다. 그 학문은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의 정대한 길을 얻었다.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정성을 쏟아 조상을 받들었다. 가정을 벋도로 다스려 안팎이 정연하였다. 백부(伯父)와 백모(伯母)를 부모처럼 섬기고 두 집안의 일을 돌보아 은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는 등 사람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종족과 화목하고 향리에 겸양하는 도리를 다하여 길사에 축하하고 흉사에 조문하는 예절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궁핍한 사람을 도와 줄 때도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일찍이 한 필의 말을 내주어 궁한 친구의 급한 일을 도아 주었으며, 주고받는 것을 살펴서 하고 대답을 신중히 하였다. 사람의 작은 허물은 포용하고 사람의 선행을 이야기하기 좋아하였으며, 사람과 사귈 때 구차하게 하지 않고 오래도록 공경하였다. 분지당(賁趾堂) 남치리(南致利),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송소(松巢) 권우(權宇),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존재(存齋) 곽준(郭駿)과 도의(道義)의 벗을 삼아 책상을 마주 대하여 글을 논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번갈아 닦고 다듬는 유익한 바가 아님이 없었다. 거처하는 남쪽에다 조그만 서재를 지어 놓고 ‘근시재(近始齋)’란 편액을 건 다음 날마다 그 속에서 독서하면서 성경(聖經)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고 예서(禮書)를 널리 상고하여 요지의 귀추(歸趨)와 상이점을 연구하고 역대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가 하면 천문(天文),지지(地誌), 병모(兵謀), 사율(師律), 의방(醫方), 복서(卜筮)의 설(說)까지도 모두 원류(源流)를 섭렵하여 대체를 알았다. 학자들이 찾아와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 각자의 재주에 다라 말해 주되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퇴도(退陶)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 나머지 여운(餘韻)을 다스리고 실추된 실마리를 찾아 유학(儒學)을 흥기시키려고 뜻을 가졌으나 어려운 세상을 만나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후학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이보다 앞서 퇴도 선생이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변론을 저술하였는데, 근세에 대유(大儒)로 일컬어진 사람이 이(理)와 기(氣)는 호발(互發)함이 없다는 설(說)을 제창하여 ‘이(理)가 발로되면 기(氣)가 따르고 기(氣)가 발로되면 이(理)가 탄다’는 퇴도 선생의 말을 비난하자, 선생이 그에 대한 반박의 설을 지어 변론하였다. 그 내용에 “천지 사방에 가득 차고 고금에 유행하는 것은 이기(理氣)뿐이다. 사람의 일신(一身)은 이기(理氣)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단(四端)이 발로할 때 비록 기(氣)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理)가 주(主)가 되므로 ‘이(理)가 발로하면 기(氣)가 따른다.’고 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 발로할 때 비록 이(理)가 비록 이(理)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氣)가 주(主)가 되므로 ‘기(氣)가 발로하면 이(理)가 탄다’고 한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학자로 하여금 이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은 데에 나아가 이기가 서로 혼잡되지 않은 묘리를 찾아내어 준칙(準則)을 삼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 일종의 의논이 이와 반대로 이기를 하나로 합쳐서 보고자 ‘이(理)가 발로하면 기(氣)가 따른다’는 퇴도 선생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퇴도 선생의 설이 실로 주자(朱子)의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나온 줄을 모른 것이니, 퇴도 선생을 비난한 것은 바로 주자를 비난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견식의 참됨과 사특한 말을 그치게 한 공로를 근세의 선비들이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글을 지을 때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평범 온아하고 지향하는 뜻이 명백하여 시를 지을 때 혼후(渾厚)하고 담담하여 그 사람됨과 비슷하였다. 평생 저술한 것이 대부분 병화(兵火) 중에 산실되고 몇 권만 집에 간직되어 있다.
단인(端人) 이씨(李氏)는 관향이 진성(眞城)인데, 할아버지는 이의(李?)이고 아버지는 이재(李宰)이다. 퇴계 선생의 종손녀(從孫女)로서 유순하고 정숙하여 선생의 배필이 되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향년 42세로 선생보다 한 달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처음 장례를 치를 때부터 그 뒤 세 번 이장(移葬)할 때까지 모두 같은 자리에 묻혔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김광계(金光繼)는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선비의 덕행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김광실(金光實)이고, 셋째 아들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김광보(金光輔)이고, 넷째 아들은 김광악(金光岳)이다. 큰딸은 찰방(察訪) 박회무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인(士人) 유암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나의 선친 이시명에게 시집왔는데, 선친은 일찍이 능서랑을 지냈다. 동몽 교관은 아들이 없어 김광실의 아들 김염을 후사로 삼았다. 김광실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초, 김여, 김염, 김선, 김빙이고 딸은 사인(士人) 권계, 권익훈, 이민표에게 시집갔다. 생원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면은 진사이고 둘째 아들은 김이이고 셋째 아들은 김근이다. 큰E라은 사인 정시태에게, 둘째 딸은 생원 변지두에게, 셋째 딸은 사인(士人) 조병에게, 넷째 딸은 금이석에게, 다섯째 딸은 이홍지에게, 여섯째 딸은 권경에게 시집갔다. 김광악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장, 김영, 김성이고 딸은 사인(士人) 김인, 생원 채익하, 사인(士人) 강명에게 시집갔다. 찰방은 1남 박요를 두었다. 유암은 아들이 없고 1녀만 낳아 사인(士人) 정억에게 시집갔다. 나의 어머니는 일찍 죽고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참봉 이상일이고 딸은 사인(士人) 여국헌에게 시집갔다. 김염은 또 아들이 없어 김선의 아들 김순의를 후사로 삼았다. 안팎의 손자, 증손, 현손 남녀는 90여 명이다.
아!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한 바가 독실하였으니, 하늘이 수명을 더 주어 대업(大業)을 끝마치도록 하였을 경우 조정에 나아가 백성에게 미친 혜택과 물러나 후세에 끼친 다행이 어떠하였겠는가?그런데 불행하게도 성년(盛年)에 세상을 떠나 조금도 펼쳐 보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소유한 것을 미루어보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잊고 나약한 것을 일으키며 유도(儒道)를 보호하고 사특한 말을 배척한 공로가 있으니, 또한 끝내 불행한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선생께서는 성실하고 단아했도다. 지조가 엄하였는가 하면 실천에도 독실하였도다. 신중한 효도였고 꿋꿋한 충성이었도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였고 학설의 공도 있었도다. 옛날에 차분한 시서(詩書) 법도 있었도다. 강개하게 전쟁에 나서니 그 모습이 씩씩했도다. 또한 학설을 저술하여 사특한 말을 막았도다. 선배에게 빛이 났었고 오늘날에 혜택을 입혔도다. 시종이 한결같으니 유감과 부끄러움 없도다. 명을 지어 밝히어 후세에 알리도다.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150~156쪽
매원 김광계 묘지명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 ∼ 1646)
자는 이지(以志)요 호는 매원(梅園)이다. 아버지는 근시재(近始齋) 해(垓)이고, 어머니는 진성(眞城)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의 조카인 재(宰)의 따님이다.
선조 13년(1580) 8월 예안 오천에서 태어나 인조 24년(1646)에 향년 64세로 몰하였다. 8세에「소학(小學)]을 배됐으며 14세에 양친을 여의고 슬퍼하며 예로써 상을 치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처음 대암(大菴)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한강(鄭寒岡)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이 크게 성취했다. 광해군 때에는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전념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출세 영달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낙동강 언덕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한 절벽인 낙천(洛川) 위에 침낙정(枕洛亭)을 지어 글을 읽고 거닐며 후진을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나라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재낭(齋郎)· 별검(別檢)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감사(監司)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도 좀처럼 남을 칭허(稱許)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공을 한번 대하고는 절로 경복(敬服)하여, 일찍 여러 고을 선비들에게 심경(心經), 사서(四書)를 강의하도록 도내(道內) 도훈장(都訓長)을 삼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든 공무를 띤 사절(使節)로 공의 마을 부근을 지나는 인사들은 다들 공을 방문하여 예경(禮敬)을 표했다고 한다.
공의 학문은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전심(專心)하여 외물(外物)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혼자 있을 때에 더욱 두터운 공경으로 처했고 아무리 번잡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종용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한다.
일찍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학문을 논하면서 [지(知)와 행(行)은 새의 양쪽 날개며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양편 모두 겸비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마땅히 행(行)을 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학문에 있어서 공의 독특하고 오묘한 경지를 다른 사람들은 헤아리기도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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