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안동지방의 안동김씨 혼맥(2)풍산류씨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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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11-20 17:23 조회1,831회 댓글0건본문
풍산 류씨(豊山柳氏)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923년(고려 태조 6)에 이곳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한 공으로 순주(順州)로 승격하였다.
후에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어 다시 하지현이 되었으며, 풍산(豊山)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 안동(安東)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다시 안동에 속하여 지금의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에 이르고 있다.
풍산 류씨(豊山柳氏)는 고려(高麗) 때 수주(樹州:경기도 부평의 옛 지명) 호장(戶長)을 지낸 류 절(柳節)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문화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한다.
일찌기 영남(嶺南)의 젖줄 기인 낙동강변(洛東江邊)에 자리잡아 명문의 위치를 지켜온 풍산 류씨는 일세조 절(節)의 7세손 종혜(從惠)가 조선 태조(太祖)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조부(祖父) 난옥(蘭玉:창평 현령을 지냄)과 부친 보(고려 말 검교예빈경을 지냄)가 지어놓고 적선(積善)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停)이 있는 하회(河回) 마을에서 풍산 류씨의 가맥(家脈)을 계승했다.
가통(家統)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진보 훈도(眞寶訓導) 공지(公智)의 손자 종개(宗介)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봉화(烽火)의 소천(小川) 전피현(箭皮峴)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 사하였고, 간성 군수(杆城郡守) 공작(公爵)의 아들 중영은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命臣)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 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토호(土豪)들의 횡포를 엄중히 다스렸으며 육영(育英) 기금을 마련하여 교학 진흥에 공이 컸다.
중영의 맏아들 운룡(雲龍)은 퇴계(退溪) 이 황(李滉)은 초기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와 제자 백가(諸子百家)에 정통했으며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풍기 군수로 나가 토적(討賊)했고, 특히 풍화정 치(風化政治)에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어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성룡(成龍)은 선조조(宣祖朝)의 명상(名相)으로 문장(文章)과 학행이 뛰어났으며, 역사의 최대 난국인 임진왜란을 맞아 고비에 처해있는 위국(爲國)을 수습하는데 중임을 맡아 불멸의 훈공을 남겼다.
1542년(중종 37)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慶北義城郡點谷面沙村里) 외가(外家)에서 태어난 성룡(成龍)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 중영의 임지(任地)를 따라 여러 지방 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으며 21세 때 형 운룡과 함께 도산(倒産)의 퇴계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을 전수 받았고, 성현(聖賢)의 도를 배워 학문(學問)에 뛰어났다.
일찌기 스승인 퇴계가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셨다" 라고 하였고, 선조(宣祖)는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이항복(李恒福)은 "이 분은 어떤 한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회은집(晦隱集)」에는 <이원익(李元翼)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2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성룡은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 字)를 시작으로 하여 풍파 많은 벼슬길에 첫 걸음을 딛게 되어 영상(領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항상 가난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성룡의 아들 중 진(袗)은 광해군(光海君) 때 유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거쳐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초(初)는 광국호성원종공신(光國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한편 성룡의 장손 원지(元之:여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에 밝은 학자로「상수소설(象數小說)」을 지어 12패도(卦圖)의 근원을 밝혀 명성을 떨쳤으며, 운룡의 증손 세명(世鳴:원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 이조 좌랑(吏曹佐郞), 지평(持平) 등을 거치고, 일찌기 공충도 도사(公忠道都事)로 서천군구(舒川郡守)의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그외 정조(正祖) 때 경산 현령(慶山縣令)으로 치적(治績)을 울렸던 규와 순조조(純祖朝)에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태좌(台佐)가 유명했고, 도정(都正) 심춘(尋春)의 아들 후조(厚祚)는 대 원군(大院君)의 인재등용에 발탁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 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1867년(고종 4)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판중추부사 (判中樞府事)에 이르러 치사한 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자결했던 도발(道發)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고, 신영(臣榮)은 고종(高宗)이 독살(毒殺)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고 음독자결하므로써 문벌과 충절(忠節)의 가문인 풍산 류씨의 가통(家統)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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