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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묘비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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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4-25 06:39 조회1,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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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 <역사적 인물>란의 <김방경>란에서--

 

충렬공 묘소에 있는 묘비석의 묘비문에 '능동' 이 나옵니다.

 1. 자료명 : 벽오유고

 2. 찬자 : 이시발

 3. 제작일시 : 1602년

 4. 자료 내용

 

  가. <충렬공 묘비문>원문 및 역문(벽오유고 영인본-이시발찬)

출전 : 碧梧先生遺稿卷之五. 墓誌. 470쪽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安東之金。系出新羅敬順王。公爲十五世孫。生麗代。仕高元忠烈朝。勳業茂著。轟輵古今。載在國史及行狀。斑斑可攷。姑撮其表表者言之。則忠直信厚。得於天性。制行也勤儉寡默。立朝也竭忠奉國。至於行師有律。戰克攻取。珍島之役。日本之征。此其大較也。厥後內外苗裔趾美舃赫。三百年于茲。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墓在禮安縣治西陵洞。神道有麗王命立碑。世久無徵。姓孫禮生(주1)曾監此縣。竪碣爲標。今幷與此碣而破折。嗚呼。後之人何以知爲公之墓乎。參奉金圻(주2),生員金坪(주3)。以外裔居墓下。與姓孫參奉慶建(주4)曁在近諸孫。謀易他石以新之。且加封植。來語余。余於公。爲母姓十三代孫。嘗拜公之墓。爲之助其資。仍識其梗曁云。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丘府 都護府使。巡察使李時發(주5)。志。

宣敎郞 前行濟用監 參奉 曺友仁 書(주6)

皇明 萬曆 三十年 壬寅 二月 立(주7)

<역문>

고려 선충협모 정란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공김방경묘지(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안동김씨의 가계는 신라 경순왕에서 나왔다. 공은 15세손인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종, 원종, 충렬왕조에 벼슬하여 공훈(功勳)이 무성하게 드러나고 고금에 크게 떨쳤음이 국사(國史)와 행장(行狀)에 실려 있어 뚜렷하게 살필 수 있다.

잠시 그 뚜렷이 드러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충직(忠直)하고 신후(信厚)함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행동을 절제하였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전투에 나아가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했으니, 진도 싸움과 일본 정벌 등이 그 대략이다. 그 뒤로 내 ․ 외손들의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 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내의 서쪽 능동에 있고, 신도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 예생이 일찍이 이 현의 현감이 되어 묘갈을 세워 표식하였는데 지금은 그 묘갈이 깨어지고 부러져 버렸다. 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공의 묘소임을 알 수 있겠는가?

참봉 김기와 생원 김평은 외 후손들로 묘 아래에 살았는데, 후손 참봉 경건과 더불어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이 다른 돌로 바꾸어 새롭게 하려고 하고, 또한 봉식(封植)을 더하고자 하며 내게 찾아와 말하였다. 나는 공으로부터 어머니의 성으로 13대 후손이 되어 일찍이 공의 묘소에 참배하였고 비석을 세우는 데 재물을 도왔다. 이에 그 대강을 기록하도다.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부 도호부사 순찰사 이시발 지음.

선교랑 전 행제용감 참봉 조우인 씀.

황명 만력 30년(1602. 선조 35) 2월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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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생(禮生) : 김예생(金禮生). 본관 안동. 충렬공의 8대손, 문온공의 현손(문온공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 사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함.

 

주2. 김기(金圻) : 원문에는 ‘金坼’이나 조사 결과 실제 인물명은 광산인 ‘金圻’이며 현 교오토대 탁본과 현 중수 묘비에도 ‘圻’로 새겨져 있기에 이는 사실에 맞춰 ‘圻’로 수정하여 원문으로 삼았다.

김기(金圻)의 본관은 광산인, 자는 지숙(止叔)이다. 참된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하였고, 큰형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였으며, 깨끗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고, 집안사람들의 가업을 일삼지 않았다. 수석 사이에 서실을 짓고서 북애(北厓)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경사를 두루 보면서 배고픔을 참았으며, 문을 닫고 죽조차 거의 계속 먹지 못하였으나 그곳에 처함에 편안한 듯하였다. 늘그막에 이르러 참봉에 제수되니 왕명을 받고서 드디어 돌아왔다. 57세에 이르러 졸하니 친구들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라 했다. 대암(大菴)은 현풍(玄風)에 산다. 학행(學行)으로 관리의 추천에 응하여 정랑을 지냈다.

 

주3. 김평(金坪) : 본관은 광산인, 김부신(金富信)의 아들. 성품이 독실하여 일찍 사림의 총망을 입었다. 삼도(三道)의 소수(疎首)가 되어 오현(五賢)의 문묘 배향을 청한 적이 있다. 호는 극재(克齋).

주4. 경건(慶建) : 김경건(金慶建), 충렬공(휘 方慶)의 12대손, 익원공(휘 士衡)의 8대손, 문정공(휘 礩)의 5대손. 자(字)는 선원(善遠). 진사, 경릉참봉 역임. 수 71세. 배위는 함양 박씨, 장인은 좌랑(佐郞) 박순(朴筍)이다.

계대 : 翼元公(士衡)→승(陞)→종숙(宗淑)→질(礩)→성동(誠 童)→려(濾)→언침(彦沉)→1子 림(琳)→경건(慶建).

 

주5-時發 : 원문에는 ‘某’라 되어 있으나 이는 유고(遺稿)를 제작한 후손들이 자신 선조(先祖)의 휘를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의도로 ‘謀’라고 표기한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원명을 밝혀 적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으며, 교오토대본, 현 중수 묘비에도 ‘李時發’로 새겨져 있으므로 ‘李時發’을 원문으로 삼았다.

 

주6-宣敎郞 前行濟用監 參奉 曺友仁 書 : 원문에는 서자(書者)까지 기록할 필요가 없어 생략했으나 교오토대 탁본과 현 중수 묘비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기록한 것을 원문으로 삼았다. 그런데 <교오토대 탁본>에는 '宣敎郞'으로, <현 중수 묘비>에는 '宣務郞'으로 되어 있다. 원문의 중요성을 원칙으로 삼고자 이곳에선 <교오토대 탁본>을 기본으로 삼아 '宣敎郞'으로 기록했다.  

  *국사대사전(교육도서. 1988. 5. 696p) 기록-선교랑(宣敎郞):조선시대 동반의 관직, 종6품인 종친(宗親), 의빈(儀賓)에게 주며 선무랑(宣務郞)과 같은 계열에 속했다.

 

주7-皇明 萬曆 三十年 壬寅 二月 立 : 원문에는 묘비를 세운 날까지 기록할 필요가 없어 생략했으나 교오토대 탁본과 현 중수 묘비에 모두 같게 새겨져 있으므로 이를 원문으로 삼았다.

 

* 현 묘비(1966년 건립) 우측면의 추가 기록 내용

단기 4299년(서기 1966년) 병오 2월

오은공(안렴사공 휘 사렴) 18대손 사옥(思玉)이 구갈문에 의거하여 쓰다.

사촌, 소산(문중)에서 구갈을 세웠고, 오은공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나. 충렬공 묘비문 벽오유고 제5권 원문 영인본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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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충렬공 묘비석 탁본 자료

    1)1602년 건립한 충렬공 묘비 탁본(교오토대 본)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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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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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966년 중수한 현 묘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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