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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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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10-01-06 21:54 조회1,6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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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최씨 기축보(2009년간)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본 홈에 수성최씨의 선원세계를 밝힌 자료를 전해 주셔서 참으로 반갑고 감사합니다.

선원세계를 밝히고 연구하는 일은 비교적 큰 어려움이 아니나 이를 정론으로 삼고 족보에 싣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원로 종친 여러분들을 설득하는 일과, 학술적인 검증과정을 거쳐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엄청난 험로를 무사히 지내시고 이제 선원세계에 대해 산술적, 계보적으로 거의 일치하는 정론을 갖게 되신 것을 큰 박수로 축하드립니다.

 우리 문중도 지금 바로 그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맞지 않고, 경순왕의 후손 중 분관, 분성된 다른 여러 문중과도 세대수가 서로 맞지 않는 선원세계의 문제에 대해 논란만 거듭하다가, 가장 최근 발견된 자료, 즉 삼성연원보에 나타난 2대(元姜-文雄)의 선조님을 수년전 본 홈에서 소개하고 이에 대한 검증 및 원로 여러분들의 이해와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즉 <敬順王-殷說-叔承-元姜-文雄-日兢-利請-義和-敏成-孝印-方慶>로의 선원세계를 정론으로 삼느냐, 일설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본 홈과 한 원로 연구가(고 김용진님)의 소 논문에서만 발표한 적이 있을 뿐입니다. 아직 본격적인 학술발표와 정론 채택 여부는 일단 유보된 상태입니다. 곧 본격적인 연구 및 인정 여부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수성최씨 기축보의 변의문을 이곳에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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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辨 疑 文

  대저, 族譜란 [한 家門의 系統과 血統關係를 記錄한 冊]이라는 辭典的 意味를 넘어 東洋文化圈의 統治理念인 忠孝思想의 基本的 典範이라 하겠다. 나무에는 뿌리(根)가 있고 물에도 샘(泉)이 있거늘 況且 사람임에랴. 東方禮義之國인 우리나라에서도 祖上을 바로 알아 모시고 孝를 行하는 方法의 하나로 族譜를 만들어 傳해오는 아름다운 傳統을 갖고 있음은 周知의 事實이다.

  우리 隋城崔氏 門中에서는 壬寅譜(서기1722년) 刊行 이래 꾸준히 脈을 이어오고 있었으니 現存하는 譜冊을 中心으로 그 現況을 살펴보면 大略 다음과 같다.

 

庚辰譜

1760년

己酉譜
1849년
1909년

戊辰譜
大同譜
1928년

丁酉譜
大同譜
1957년

丁巳譜
大同譜
1977년

丁丑譜
宗簿令派譜
1997년

1 世

敬順王

敬順王

敬順王

敬順王

敬順王

敬順王

2 世

殷說

殷說

殷說

殷說

殷說

殷說

3 世

繼笒

繼笒

繼笒

繼笒

泰華

叔承

4 世

漢公

漢公

漢公

漢公

正矩

日兢

5 世

景輔

景輔

景輔

景輔

淑承

利請

6 世

世麟

世麟

世麟

世麟

日兢

義和

7 世

鳳毛

鳳毛

鳳毛

鳳毛

利請

敏成

8 世

台瑞

台瑞

台瑞

台瑞

義和

孝印

9 世

慶孫

慶孫

慶孫

慶孫

敏成

玄慶

10 世

琿(日兢)

孝印

11 世

利請

日兢

日兢

日兢

玄慶

永奎

12 世

義和

利請

利請

利請

 

13 世

敏成

義和

義和

義和

永奎

 

14 世

孝印

敏成

敏成

敏成

 

 

15 世

玄慶

孝印

孝印

孝印

 

 

16 世

玄慶

玄慶

玄慶

 

 

17 世

永奎

 

 

18 世

 

永奎

永奎

永奎

 

 

  위 資料에서 上系를 살펴볼 때, 各譜 사이에는 克明하게 差異가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庚辰譜에서는 17世, 前己酉譜 이후 丁酉譜에 이르는 네 차례 族譜에는 18世, 最近의 大同譜인 丁巳譜(1977년)에는 13世, 그 후 刊行된 丁丑譜(1997년 宗簿令公派譜)에는 11世로 各其 明示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分明하고 確實한 事實을 確認하게 되는 바, 다름 아니라 모든 族譜에는 上系門題가 뚜렷하게 明示되어 있다는 점과, 時代가 變함에 따라 記述 內容도 變하고 있다는 事實이다. 이것이 바로 族譜의 本質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不過 五百년 前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天下,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 地球는 네모난 땅(四方)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바다(四海)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땅은 當然히 가만히 있는 것이고 해와 달이 움직여 뜨고 지는 것이라 믿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眞理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폴란드 사람 코페르니쿠스라는 科學者였다. 그는 1543년 地球는 둥글고 自轉한다는 學說을 發表했다. 그야말로 驚天動地할 爆彈宣言을 한 것이었다. 그후 1632년 갈릴레이가 이를 立證하여 세상을 또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어느 누가 五百년 前 사람들을 無識했었다고 罵倒하고 있단 말안가?

  時代가 바뀌면서 우리는 새로운 事實을 發見하고 그에 맞는 對策을 講究하며 사는 것이 正常人의 生活이다. 族譜에 관한 情報가 거의 閉鎖的이던 時代를 지나 이제는 많은 情報가 公開되고 또 努力여하에 따라서는 良質의 情報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世上이다. 그에 따라 밝혀진 眞實에 立脚하여 過去 잘못 알고 있었던 事實을 바르게 고친다는 것은 祖上에 대한 不敬이 아니라 後孫들이 마땅히 해야 할 德目이니 어찌 망설이며, 바른 行爲를 한 사람을 어찌 그르다 非難할 수 있겠는가.

  이런 觀點에서 볼 때 지난날 大同報를 編纂하시면서 그야말로 換骨奪胎하는 水準으로 族譜 編纂을 하신 조상 여러분께 感謝를 드리고 維持 補完할 義務感을 무겁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大局的인 立場에서 살피고 判斷해 올바르게 行하여야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不拘하고 우리 門中에서 大同譜 編纂을 決議하고 實務를 進行하는 科程에서 發生된 難題 중의 難題가 바로 이 上系問題였다는 점은 有感이 아닐 수 없다.

  돌아보건대 지난 2004년 5월 7일 大宗會 總會에서 隋城崔氏 大同譜 編纂事業을 決議한 以來 諸般 準備過程을 거쳐 2005년 4월 7일 編纂委員會 事務室을 開設했고 이어 2006년 3월 14일 제1차 附錄編纂委員會에서 上系問題가 擧論되었지만 그 후 수차례의 協議를 거쳤으나 結局 統一案 導出에 失敗한 채 昨今에 이르렀다.

  問題의 爭點은 隋城伯 文惠公은 敬順王의 13世孫(最近 大同譜의 脈을 이은)이라야 한다는 主張과 敬順王의 17世孫(1760년 庚辰譜 기준)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主張이다. 여기에 便乘하여 兩側의 主張을 모두 收容해 이번 대동보에는 過去 記述된 上系를 網羅해 記述하고 後孫들로 하여금 硏究해 밝히게 하자는 折衷案이 나왔다. 실로 많은 時間과 努力을 虛妄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現狀이 아닐 수 없엇다. 그에 더하여 族戚인 慶州金氏와 安東金氏 門中에서도 자기들 祖上에 대하여 그릇되게 우리 族譜에 올리는 것을 警戒한다는 뜻을 表明하기에 이르러 難堪한 일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敬順王 13世, 17世論이 單純한 숫자 差異가 아니라는 점을 看過할 수 없다. 즉 敬順王→慶州金氏→安東金氏→隋城崔氏(13世論)과, 敬順王→慶州金氏→隋城崔氏(17世論)으로 갈려 血統을 달리하는 重且大한 差異点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려지지 않는 狀態에서,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잘 모르겠으니 後孫들이 硏究하여 밝혀달라]는 折衷案 또한 너무도 無責任한 代案으로 뜻있는 宗人들은 이것은 言語道斷이라는 多數人의 意見을 모아 强力하게 抗議하고 있는 實情이다.

  우리가 常識的으로 알고 있는 法諺에 [新法은 舊法에 優先한다.]라는 말이있다. 이는 同一한 效力을 가지는 法源間의 衝突이 問題되는 境遇 新法이 舊法에 優先한다는 것이다. 民主主義를 自己決定의 原理에 비추어볼 때 過去의 決定보다 새로운 情報와 現實을 勘案한 最新의 決定이 自己決定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46년 前 西紀 1963년(癸卯)에 우리 族譜의 根幹을 뒤흔드는 破格的인 改正提案이 있었다.(原文 및 飜譯本 別添) 累代에 결쳐 刊行되어온 族譜上 上系部門의 誤謬를 摘示한 것이다. 그 분이 바로 晩悟先生(基衡公)이시다. 當時로서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發想이요 놀랄만한 歷史的 事件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분은 主張하는 것만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丁酉大同譜(1957년)를 發刊한지 20년도 안된 時點에서 다시 大同譜 編纂을 主管하여 드디어 丁巳大同譜(1977년)를 發刊하신 것이다. 推測해 보건대 當時 充分한 協議와 同意를 얻기에는 無理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그분의 바로 直孫 後孫되는 분들이 理解를 못하겠다고 하여 바로 이 問題를 論難의 核으로 떠올리고 있으니 當時에 編纂에 參與한 大宗孫 및 編纂委員長 그 외 여러분들의 慧眼에 새삼 敬畏心을 禁할 수 없다.

  그 後 宗簿令公 宗中에서 世譜를 編纂(1997년 刊行)하면서 考證資料를 檢證하는 過程에서 丁巳譜에 登載된 [泰華, 正矩] 두 분은 최근 發見된 誌石 內容에 따라 慶州金氏로 또는 淑承公의 형님과 장질로 밝혀졌다. 그로 因해 泰華, 正矩 두 분을 除外하고 始祖 文惠公은 敬順王 11世孫으로 記述하게 되었다. 이는 當時 安東金氏 族譜와 一致하는 것으로 現在까지도 兩側 族譜에 그대로 登載되어 있다.

  近者에 慶州金氏 系譜 硏究會에서 發表한 內容에 의하면 淑承公 以後 元姜 文雄 두 분이 漏落되었으므로 그의 復元이 不可避하다고 했다. 그 論理는 이미 安東金氏 門中에서도 受容하여 次期 族譜 發刊時 登載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緣由를 綜合하여 隋城崔氏 上系를 再定立하는 次元에서 이번 大同譜에 勸告案대로 記述함이 妥當하다는 結論에 이른 것이다. 一角에서는 이 結論에 대하여 正體性을 擧論하며 愼重論을 펴고 있으나 이는 우리 始祖 文惠公 以後의 繼代에 關한 問題가 아니고 上系에 대한 事項이므로 굳이 正體性을 論할 階梯는 아니라고 思料된다. 따라서 慶州金氏 安東金氏 隋城崔氏는 族譜上의 上系는 最大公約數를 共有하게 된 것이다.

  結論的으로 13世論을 整理하면 敬順王→殷說→淑承→元姜→文雄→日兢→利請→義華→敏成→孝印→玄慶→俊→永奎(隋城伯 文惠公)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族譜의 基本인 上系에 대한 明瞭한 記述과 族譜의 正統性을 同時에 갖추는 完結篇을 얻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發刊후 全帙을 國立圖書館과 各大學圖書館등 各界 要路에 堂堂하게 配布할 것이며 後代에 硏究 補完을 當付할 것이다. 우리의 正體性을 위하여 始祖 文惠公에 대한 生沒年代와 官職에 대한 歷史的 考察을 尋究하여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族譜 編纂을 함에 있어 많은 종인이 협력하여 주신 점을 고맙게 생각하며 특히 附錄編纂委員長 省菴 重哲선생은 不撤晝夜 資料蒐集 및 整理에 盡力하고 自費로 各種 考證 資料를 入手하여 關係者 여러 宗人께 直接 配布하는 等 그 功勞가 至大하였음을 밝히며 이 자리를 빌어 깊이 感謝드리는 바리다.

                       隋城崔氏 大宗會長 兼 大同譜 編纂委員長 24世 讚鎔 삼가 씀

  ※ 과거 발간한 우리 족보의 시조상계 분석과 省菴 重哲선생의 선원세계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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