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문정공(휘 질) 신도비 번역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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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10-05-10 22:22 조회1,99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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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b6afb1_문정공질묘비명_원문대조_김국회감수.hwp (0byte) DATE : 2010-05-10 22:22:14 다운로드 : 40회 2010-05-10 22: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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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金石集帖』 左相金公礩碑
*번역감수 : 金 國 會
*감수일 : 2010.05.10
文靖公碑銘 문정공비명
有明朝鮮 推忠佐翼 純誠明亮 經濟佐理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上洛府院君 兼領經筵事 諡文靖金公 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 추충좌익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상락부원군 겸영경연사 시(諡) 문정(文靖) 김공 신도비명 : 서문을 함께 쓰다[幷序].
純誠明亮佐理功臣 崇政大夫 達城君 兼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徐居正 撰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다.
朝散大夫 弘文館副應敎 知制教 兼 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館 藝文館應教 安琛 書幷篆
조산대부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예문관 응교 안침(安琛)이 비문의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을 함께 쓰다.
世祖惠莊大王 握符興運 時則豪傑奮庸訏謨 賛襄黼黻至治者 彬彬有人 上洛府院君 金文靖公 其一也
세조 혜장대왕께옵서 부서(符瑞)를 쥐어 왕운이 일자, 당시의 호걸들로 현명한 계책을 내어 임금의 지극한 정치를 도운 자가 아름답도록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상락부원군 김 문정공이 그 중 한 분이시다.
金●新羅宗姓 國既除 子孫分處三韓 在上洛者最遠 敬順王十五代孫 諱方慶 位僉議中贊 功烈盖世 諡忠烈
김씨는 신라 왕실의 성씨로 나라가 바뀐 후에 삼한 땅에 자손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는데, 상락김씨(上洛金氏)는 가장 멀리 경순왕(敬順王)의 15대손 휘(諱) 방경(方慶)에게 나왔으니, 지위가 첨의중찬(僉議中贊)이었으며 높은 공적이 세상을 덮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시다.
●●諱士衡 佐本朝 爲開國定社●●功臣 位冢宰 諡翼元
●●[충렬의 후손으로] 휘 사형(士衡)은 우리 조정[本朝 : 朝鮮朝]을 도와 개국정사●●공신이 되시었으며, 지위는 총재(冢宰 : 좌정승)에 이르렀고 시호는 익원(翼元)이시다.
生諱陞 中樞院副使
(익원공 휘 사형이) 휘 승(陞)을 낳으시니, 중추원 부사(中樞院 副使)이시다.
是生宗淑 以公出入樞院爲同知事 贈領議政
이분(휘 승)이 휘 종숙을 낳으시니, 공(문정공 휘 질)께서 중추원에 출입하여 동지사(同知事)가 되셨으므로, (휘 종숙이) 영의정으로 증직되셨다.
配貞敬大夫人李氏 贈參判良直之女 以永樂壬寅八月丙午生公
(휘 종숙의) 배위는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 이씨이시니, 증(贈) 참판 이양직(李良直)의 따님으로, 영락 임인년(1422년, 세종 4년) 8월 병오일에 공(휘 질)을 낳으셨다.
公諱礩 字可安 自幼嶷然若成人 旣長從賢師友 種學積文
공의 휘(諱)는 질(礩), 자(字)는 가안(可安)으로,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마치 어른같았다. 자라면서 어진 스승과 벗을 따라 학문을 쌓으셨다.
正統辛酉 以勳蔭 屬忠義衛補司勇 轉至司直
정통 신유년(1441년, 세종 23년)에 선조(先祖)의 훈음(勳蔭)으로 충의위(忠義衛) 소속 사용(司勇)에 보임되었다가, 사직(司直)으로 옮겼다.
丁卯 中司馬試 司直參官 國例不得齒國學
정묘년(1447년, 세종 2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사직(司直) 참관(參官)은 나라 법규에 의해 국학(성균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公曰 讀書非爲尋行數墨 將大用也 不讀則已 讀則當擢科第 取公卿如拾瀋耳 安用碌碌事梐盾乎哉
공께서 말씀하였다.“글공부는 범범하게 먹물이나 만지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쓰기 위함이니, 글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지만 공부를 하려면 마땅히 과거에 급제해야 할 것이요, 공경(公卿)이 되는 일은 엎질러진 물을 담는 것처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찌 자잘한 일(역주 :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 음서로 얻은 사직의 벼슬자리를 버려야 하는 일) 때문에 연연하겠는가?”
遂解簮 挾筴 遊橋門
마침내 사직 벼슬을 버리고, 책을 끼고서 교문(橋門 :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다.
學問日進 常時議論 酬酢諳練 老成綽然 有公輔器 儕輩推服之
학문이 날로 향상되어 당시의 의론이 묻고 대답함이 능숙하여 노성하고 여유로운 듯 하여 재상(宰相)이 될 그릇이 있으니 동료들이 공을 받들어 복종하였다.
景泰庚午 中文科 授成均注簿 遷司諫院左正言 轉兵曹佐郞 乙亥陞成均司藝
경태 경오년(1450년, 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주부에 제수되었으며, 사간원 좌정언으로 옮겨서 병조 좌랑이 되시고, 을해년(1455년, 세조 1년)에 성균 사예로 승진하셨다.
丙子夏 李塏等謀危宗社 公審其幾微 卽上變 捕鞠逆黨
병자년(1456년, 세조 2년) 여름에 이개(李塏) 등이 모의(謀議)로 종사(宗社)를 위협하는 모의하자 공이 그 기미를 살펴 즉시로 임금께 알려 반역의 무리[逆黨]를 잡아 국문(鞠問)하여
芟●●●策勳 賜推忠左翼功臣號 超授通政判軍器監事
( )을 제거하니 (주상께서) 공을 인정하여 추충좌익공신호(推忠左翼功臣號)를 내리셨으며, 품계를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 군기감 판사)를 제수하셨다.
俄 擢承政院同副承旨 知兵曹事 轉至左
바로 승정원 동부승지 지병조사(知兵曹事 : 병조 지사)로 발탁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光陵 方礪精圖理 公居左右 論思獻替 出納惟允
광릉(光陵 : 세조)께서 바야흐로 정기(精氣)를 가다듬어 정사(政事)를 다스릴 때 공이 좌우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바치고 바꾸는 일을 의논하고 생각하여 내고 들임에 오직 신실하게 하였다.
公久知兵曹 光陵時出入 今古兵法 縱橫問難 公應對如響 上拊髀嘆曰 金某可與論兵者矣
공이 오랫동안 지병조사(知兵曹事 : 병조 지사)를 맡아 보았는데, 광릉(세조)께서 때때로 출입하며 고금(古今)의 병법(兵法)에 대해 종횡무진으로 난제(難題)를 물었는데, 공께서 메아리가 울리듯이 민첩하게 답하니, 주상(세조)께서 손으로 무릎을 치시며 탄복하여 말씀하였다. “김모(金某 : 휘 질)는 병법을 함께 논할 만한 사람이로다.”
天順辛巳 授兵曹參判 光陵曰 兵權至重 輟卿近班 授是職卿 知之乎
천순 신사년(1461년, 세조 7년)에 병조 참판을 제수하면서 광릉(세조)께서 말씀하셨다.“병권(兵權)은 매우 중하여 가까운 중신들마저 내칠 정도인데, 이 직책을 경에게 내리노니 이를 잘 아시겠소?”
公拜謝 旣而董戎有法 講畵甚明 光陵曰 上洛眞所謂文武全才也
공이 사은숙배를 올리고 얼마 안되어 군병(軍兵)을 통솔함이 법도가 있고 일을 처리함이 매우 분명하였다. 광릉(세조)께서 말씀하셨다. “상락군은 참으로 이른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로다.”
自庚辰 北征以來 毛隣建州等衛 挾前憾 嘯聚屯結 屢搆邊患 平安道北門管鑰 控制尤難
경진년(1460년, 세조 6년)에 북쪽 변방을 정벌한 이래 모린위(毛隣衛), 건주위(建州衛) 등이 예전의 묵은 감정으로 병사를 모아 둔을 치고 여러 번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자, 평안도 북쪽 관문을 방어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光陵命公 爲都巡察使 往審邊境 措置得宜 上手札褒獎之
광릉(세조)께서 공을 도순찰사로 삼아 변경에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여 (공이) 적절하게 조치하자, 임금께서 수찰(手札)을 내려 포상하고 칭찬하셨다.
辛巳 平安道觀察使缺 光陵曰 廷臣無踰上洛者 特遣之
신사년(1461년, 세조 7년)에 평안도 관찰사 자리가 결원이 되자, 광릉(세조)께서 말씀하셨다. “조정 신하 중에 상락군을 능가할 자가 없기에 특별히 그를 보낸다.”
癸未 召還爲工曹判書 尋移刑 又判兵曹 兵判 古之司馬 光陵 以戎政委公 倚任益專
계미년(1463년, 세조 9년)에 불러들여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형조로 옮겼다가 또다시 판병조(判兵曹 : 병조 판사)가 되었으니 병판은 고대의 사마(司馬)이다. 광릉(세조)께서 군사에 관한 정무(政務)를 공에게 위임하고는 신임이 더욱 깊어졌다.
成化丙戌 進議政府右參贊 兼 都總府 又兼 八道軍籍巡察使
성화 병술년(1466년, 세조 12년)에 의정부 우참찬 겸 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올랐고, 또한 팔도군적순찰사를 겸하였다.
丁亥 出爲慶尙觀察使 戊子 召還爲上洛君 兼 都總義禁二府 秋擢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俄陞左
정해년(1467년, 세조 13년)에 외직으로 나가 경상관찰사가 되었으며, 무자년(1468년, 세조 14년)에 불러들여 상락군이 되시고 도총부와 의금부 두 부(府)를 겸직하셨다. 그 해 가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는데 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셨다.
睿宗卽位 加領經筵事 己丑封上洛 今上卽位 以先朝舊臣敬重之 仍領經筵
예종(睿宗)께서 즉위하여 영경연사(領經筵事 : 경연 영사)로 더 높이셨다. 기축년(1469년, 예종 1년)에 상락군으로 봉군(封君)되셨다. 지금 임금(성종)께서 즉위하시어 선대왕의 옛 신하이기에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영경연사가 되셨다.
庚寅九月 丁父憂 壬辰服闋 賜純誠明亮 經濟佐理功臣號 還封上洛
경인년(1470년, 성종 1년) 9월에 부친 상(喪)을 당해 임진년(1472년, 성종 3년)에 복(服)이 끝나자,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호를 제수하시고 다시 상락군으로 봉하셨다.
甲午秋 上以懿敬王無爵諡 具由陳請 命公爲奏聞使
갑오년(1474년, 성종 5년) 가을에 임금께서 의경왕(懿敬王 : 덕종)의 작위와 시호가 없었기에 그 사유를 갖추어 중국(명)에 청하는 일에 공에게 주문사(奏聞使)가 되기를 명하였다.
上曰 知卿有老母 敷奏事重 不得不煩卿耳 仍授議政府右議政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경(卿)이 노모가 계신 줄 알지만 주청하는 일이 중하기에 어쩔 수 없이 경(卿)을 번거롭게 하노라.”곧이어 의정부 우의정을 제수하셨다.
公至京師 奏請蒙允 賚賜誥命冠服而還 上大悅 賞賚稠重 明年乙未 復封上洛
공께서 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에 도착해 황제에게 주청하여 윤허를 받고 고명(誥命)과 관복(官服)을 하사받아 돌아오자,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하사품이 매우 많았다. 이듬해 을미년에 다시 상락군으로 봉하셨다.
丁酉 感疾日劇不視事 然國有重事 必遣就問 賜廚膳藥餌不絶
정유년(1477년, 성종 8년)에 병환이 들어 날로 극심해져 정무(政務)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에 중대사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 자문(諮問)하여 따랐으며, 수라상 음식과 약물을 하사하신 것이 끊이지 않았다.
疾革 語子弟曰 以予不才 累沗盟府 再長巖廊 於分已極 死亦無悔 但老母在堂 不得不茹恨泉下 無一言及私
병환이 매우 심해지자, 자제(子弟)에게 말씀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으면서 여러 차례 맹부(盟府 : 忠勳府)에 오르고, 두 차례나 연달아 암랑(巖廊 : 議政府)의 정승이 되었으니, 분수에 넘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다만 노모께서 살아 계시니 황천길에 한이 되지 않을 수 없구나.”그 밖에 한 말씀도 사사로운 데 언급이 없으셨다.
戊戌二月丙辰卒 享年五十七 上痌傷 輟朝膳賻 贈有加 四月己酉 窆于抱川之雙谷村 與夫人鄭氏同域 夫人鄭氏 卽今領議政昌孫之女 先公卒
무술년(1478년, 성종 9년) 2월 병진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다. 주상께서 애달파 하시면서 조회를 중지하시고 부의(賻儀)를 보내시고 더 높이 추증하셨다. 4월 기유일(己酉)에 포천 쌍곡촌에 하관하였으니, 부인 정씨와 같은 묘역이다. 부인 정씨는 곧 지금의 영의정 정창손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公稟資純粹 外寬內嚴 天性至孝
공은 타고난 자질과 성품이 순수하시고, 겉으로는 너그럽고 속으로는 엄하시며,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具慶堂在雙谷之別墅 距京城可七十里 每遣人問起居 有公暇 輙親往定省 佳辰令節率子弟奉觴稱壽 怡怡愉愉 上亦屢賜上尊榮之 及尊大人先逝 奉養母夫人愈謹 待諸弟友于亦至 一國稱孝友無間言
양친께서 쌍곡(雙谷)마을의 별서(別墅 : 별장)에 계셨는데, 서울에서 70리나 떨어졌으나, 늘 사람을 보내 안부를 여쭙고, 휴가를 얻으면 문득 몸소 가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하셨다. 좋은 철에는 자제들을 거느리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며 장수하시기를 기원하기를 기쁘고 즐겁게 하였다. 주상께서도 또한 여러 차례 좋은 술[上尊]을 내려 영화(榮華)롭게 하셨다. 부친께서 먼저 돌아가시자 모친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더욱 공손하였고 여러 동생들을 대함에 우정 또한 지극하시니 온 나라에서 ‘효우(孝友)’라 일컫기에 딴지 걸 사람이 없었다.
平生不喜酒不營産 關節不到 居官履事 淸謹自守
평생동안 술을 즐기지 않으셨으며 생없을 따로 꾀하지 않았으며, 뇌물 청탁이 이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벼슬살이에 일을 처리함에 청렴하고 삼가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여 지키셨다.
雖不崖岸立異 亦未嘗軒輊 再入相 政尙寬大 務存大體 抹樧繁細 至於論決大事 確然有不可奪者
비록 특별한 이설(異說)을 세우지 않았으나 또한 일찍이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으니, 두 차례나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정사(政事)는 관대함을 숭상하고 대체를 세움에 힘써 번세함을 물리치면서도 큰 일을 논결하는데 있어서는 확연하여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公生五男二女 男長曰義童 驪州牧使 曰禮童 軍資注簿 先歿 曰智童 司贍副正 曰贖 司果 曰敬童 司正 副室有諴童
공은 5남 2녀를 낳으시니, 장남은 의동(義童)으로 여주 목사이고, 차남은 예동(禮童)으로 군자감(軍資監) 주부(注簿)인데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으며, 삼남은 지동(智童)으로 사섬시(司贍寺) 부정(副正)이며, 사남은 성동(贖)으로 사과(司果)이며, 오남 경동(敬童)은 사정(司正)이며, 둘째 부인에게서 함동(諴童)을 낳았다.
女長適生員辛銛早歿 次適宗室富林君湜
큰 따님은 생원 신섬(辛銛)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찍 사망하였으며, 둘째 따님은 종실 부림군 이식(李湜)에게 출가하였다.
驪州 娶司直洪義華之女 生二男 曰汴 曰泠 女三幼
장남 여주 목사(휘 義童)는 사직 홍의화(洪義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으니 변(汴)과 영(泠)이며, 딸 셋은 어리다.
注簿 娶前縣監李宏植之女 生一男 曰洧 女一幼
차남 주부(휘 禮童)는 전 현감 이굉식(李宏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유(洧)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副正 娶府使安克思之女 生二男 曰湕 曰滂 女二幼
삼남 부정(휘 智童)은 부사 안극사(安克思)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으니 건(湕)과 방(滂)이며, 딸 둘은 어리다.
司果 娶判敦寧姜希孟之女 生一男二女 皆幼
사남 사과(휘 贖)는 판돈령 강희맹(姜希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司正 娶別提崔伋之女 生一男幼
오남 사정(휘 敬童)은 별제 최급(崔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富林 生二男二女 皆幼
둘째사위 부림군(李湜)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汴 娶僉知鄭仁耘之女 生一女云
장손자 변(汴)은 첨지중추부사 정인운(鄭仁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한다.
己亥夏 諸孤將碑神道 請於居正 謹銘
기해년(1479년, 성종 10년) 여름에 공의 여러 아들이 신도비를 세우려고 거정(徐居正)에게 청하기에 삼가 명을 짓는다.
銘曰
명(銘)에 이른다.
●●●● (판독 불가)
于洛是遷 상락(上洛)으로 옮겨오니
有濬其源 그 근원 깊고도 깊어
流慶綿綿 대대로 경사가 이어지네
顯允忠烈 훌륭하신 충렬공
克大以昌 위대하게 빛나시니
奕葉蟬貂 대대로 현관(顯官)을 배출한 집안
襲美傳芳 아름다움 이어받고 꽃다움 전하였네
翼元策勳 익원공 책훈(策勳)됨은
佐我王國 우리 나라를 도왔기 때문일세
周旋廊廟 암랑(의정부)에서 힘껏 주선하여
經綸化育 경륜으로 경영하네
堂堂文靖 당당한 문정공(文靖公)이여
允也箕裘 진실로 가통을 이어 받았네
遭遇際會 어진 임금을 만나
大展厥猷 그 지혜를 크게 펼쳐보였네
蠢玆逆雛 벌레 같은 역적 무리
孽芽天地 천지를 무너뜨리려 하니
公炳其幾 공께서 그 기미를 알아채시고
公奮厥義 그 대의(大義)를 떨치셨네
髮櫛苗媷 못된 싹을 빗질하듯 뽑아내어
無種俾易 씨앗조차 움트지 못하게 하였네
惟公之忠 아, 공의 충성(忠誠)과
惟公之節 아, 공의 절의(節義)여
聖簡在心 임금의 마음속에 서렸으니
鉄券載錫 철권(병권)을 맡기셨네
于以歷試 두루 벼슬에 거치되
何試不可 어느 벼슬에 모자랐던가
乃擢銀臺 은대(승정원)에 발탁되시고
乃遷司馬 사마(병조판서)로 옮기시니
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오면 재상이라
文謨武略 문무를 겸비했네
位進宅揆 지위가 정승에 올라
功存納麓 정사를 총괄한 큰 공로
潭潭相府 깊고 깊은 정승부(의정부)에서도
屹屹麟閣 인각(麟閣 : 忠勳府)에 우뚝하시네
時而措之 시의적절한 조처로
亭而毒之 만물을 화육(化育)하셨으니
惟德莫盛 덕이 더 훌륭할 수 없으며
惟績莫懋 공적이 더 빼어날 수 없다네
何哲其萎 현철한 이 어찌 그리 떠나셨나
仁亦不壽 어진 분이 수명이 길지 않구나
魏鑑雖亡 임금의 거울 같은 신하 비록 사라져도
漢礪尙存 대려(帶礪)의 충정은 오히려 보존되리
公死不朽 공께서 돌아가도 썩지 않아
子孫其繁 자손들 번성하리
瞻彼雙谷 저 쌍곡리를 보라
有截高墳 말끔한 높은 봉분이 있구나
公則長往 공이 영영 가셨으니
獨無母傷 어머님 홀로 슬프지 않을손가마는
勒辭●碑 공의 비석 세우라 하시니
存者亦長 살아 계신 어머니 또한 장수하시리
成化十五年己亥八月 日 立石
성화 15년 기해년(1479년, 성종 10년) 8월에 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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