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중종 12) 동생 수경(壽卿)에 의해 세워진 김수동(金壽童)의 신도비이다. 찬자는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 신용개(1463~1519)이며, 서자는 해서체를 잘 썼던 조선 중기의 문신 김희수(1475~1527)이다. 김수동(1457~1512)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성학동심법(聖學心法)』4권을 구하여 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경기관찰사·형조판서겸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1504년(연산군 10)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윤씨의 회릉(懷陵) 추숭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중종 5)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비문의 초반부에는 가계도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중반부에는 승문원정자(兼承文院正字)로 있을 때 예서(隷書)를 잘 쓰고 중국에 바치는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을 잘 썼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김수동을 제일인자로 추대했다는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하여 여러 관리들을 선발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