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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문경공(휘 수동) 신도비명 번역감수 및 원문 띄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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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10-05-10 22:19 조회1,80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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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공(휘 수동) 묘비_판독문&해석문 수정본

출전 : 『金石集帖』

*번역 감수 & 원문 띄어쓰기 작업 : 金 國 會

*감수일 : 2010.05.10


文敬公神道碑銘 문경공신도비명

有明朝鮮國 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永嘉府院君  贈謚文敬公 金公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국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증시(贈諡) 문경공(文敬公) 김공(金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申用漑 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신용개(申用漑)가 비문을 짓다.

奉正大夫 成均館司藝 兼 承文院校勘宗學導善 金希壽 書

봉정대부(奉正大夫) 성균관사예 겸 승문원교감 종학도선 김희수(金希壽)가 비문의 글씨를 쓰다.


天以機警才智出衆之資賦之人者 豈徒厚其人而已歟 將以用於世也 然有其資而不偶於時者亦多 如有兼得之而不負天所賦與之意者 則眞可謂大賢君子人也而世亦蒙其休矣

하늘이 기민(機敏)함과 재지(才智)가 출중한 자질을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어찌 공연히 그 사람을 두터이해준 것뿐이겠는가? 장차 그를 세상에 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제 시대를 만나지 못한 자도 많다. 만약에 자질과 시대 두 가지를 아울러 얻고 하늘이 부여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있다면 참으로 대현군자(大賢君子)라고 할만하고, 세상 또한 그의 아름다운 은덕을 입는다.


領議政金公 諱壽童 字眉叟 其得于天遇于時 行其所蘊蓄 望隆于世 而流美於後者 大而遠 所謂賢君子者其不在玆乎

영의정(領議政) 김공(金公)은 휘(諱)가 수동(壽童)이요, 자(字)가 미수(眉叟)이다. 그는 하늘에서 자질을 얻고 그 시대를 만나, 그가 가슴 속에 품은 뜻을 행하여 세상에서 명망(名望)이 높고 후세에 아름다움을 전한 것이 크고도 오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현군자(賢君子)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公之先 出於安東 安東多鉅姓 金爲最著

공의 선조는 안동에서 나왔는데, 안동에는 거성(巨姓)이 많지만 김씨가 가장 저명하다.


公考諱磧 官至僉知中樞府事 視公勳秩 贈議政府領議政

공의 아버지는 휘(諱)가 적(磧)으로,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공의 공훈(功勳)에 의해서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祖同知中樞府事 諱宗淑 贈議政府領議政

공의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諱)가 종숙(宗淑)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曾祖同知中樞府事 諱陞 贈議政府左贊成

증조부는 동지중추부사 휘(諱)가 승(陞)으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贊成是開國功臣 左政丞 上洛府院君 諱士衡之子

찬성(贊成)은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좌정승(左政丞)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휘(諱) 사형(士衡)의 아들이다.


遠祖諱方慶者 仕高麗有大勳勞 世爲名閥 毓慶蓄祉 繼出賢豪 多大官

원조(遠祖)인 방경(方慶)은 고려 때에 벼슬하여 큰 공로를 세워 대대로 유명한 벌열(閥閱)이 되었다. 경사와 복을 쌓아서 계속 현인과 호걸을 배출하였으며, 대관이 많았다.


僉知事 聘承政院同副承旨安質女 以天順丁丑正月己卯出

(공의 아버지인) 첨지중추부사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안질(安質)의 따님에게 장가들으니,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 정월 기묘일에 공이 태어났다.


公自嬰孩 端溫明穎 已有出衆氣幹 年甫五 所依

공은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영리하여 이미 출중한 재간이 있었다. 나이 겨우 5살에 부모를 잃었다.


七歲學綴句 人奇其秀發 伯●上洛府院君金礩深重之曰 此兒不墜世業 將能更大吾門也

7살에 글 짓는 것을 배우니 사람들이 그의 우수함을 기이하게 여겼다. 백부(伯父)인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이 매우 애지중지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실추시키지 않고 장차 다시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早年學大成 中成化甲午生員試 登丁酉文科 補權知承文院副正字 選拔藝文館檢閱 轉弘文館正字 兼 承文院正字

어린 나이에 학문이 크게 이루어져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 5)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정유년(1477, 성종 8)의 문과에 급제하여 임시로 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겸열(藝文館檢閱)로 선발되었으며, 홍문원정자(弘文館正字) 겸 승문원정자(兼承文院正字)로 옮겼다.


公善於隷法 能書事大表奏 一時諸僚咸推爲第一 自是至升通政 常帶承文職

공이 예서(隷書)를 잘 쓰고 중국에 바치는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을 잘 썼으므로 그때의 동료들이 모두 공을 제일인자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를 때까지 늘 승문원(承文院)의 직책을 맡았다.


己亥 拜承政院注書 秩滿 授軍器寺主簿 歷司憲府監察 禮戶兩曺佐郞 世子侍講院司書 重入弘文館 爲副脩撰 轉升脩撰 遷司諫院正言 未幾 還拜脩撰

기해년(1479, 성종 10)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제수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와 호조, 두 조(曺)의 좌랑(佐郞),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를 역임하였다. 재차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겨졌다. 얼마 있다가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다.


弘治戊申 升校理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 19)에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


己酉 授吏曺正郞 尋拜議政府檢詳 升舍人

기유년(1489, 성종 20)에 이조좌랑(吏曺正郞)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辛亥秋 遭內憂 送終居廬 極其誠哀 如存之孝 人稱爲難

신해년(1491, 성종 22) 가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상례를 치르고 시묘살이하기를 정성과 슬픔을 지극히 하여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효도하듯이 하니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렵다고 칭찬하였다.


及服闋 授司䆃寺僉正 轉司憲府掌令 世子侍講院弼善

삼년상을 마치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옮겼다.


甲寅冬 成廟禮陟

갑인년(1494, 성종 25) 겨울에 성묘(成廟 : 성종) 임금이 승하하였다.


翼年乙卯 皇帝遣使吊祭前王 冊封新君 朝延以舊例 中朝使到國必審問詔勅頒迎之儀 多往復難定 擇練達典故詳於禮儀者 以公充問禮官 明使見公儀度聽言講禮 彼此意達 一無疑阻 盖心服之也 是年夏 拜弘文館典翰 秋 升直提學

다음해 을묘년(1495, 연산군 1)에 황제가 사신(使臣)을 보내 전왕(前王 : 성종)을 위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고서 새 임금을 책봉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례(前例)에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조칙(詔勅)을 맞이하고 반포(頒布)하는 의식에 대해 자세히 묻는데, 서로 상의하여도 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므로 전고(典故)에 밝고 예의(禮儀)에 대해 상세히 아는 사람을 골랐다. 그리하여 공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충원하였는데, 명나라 사신이 공의 거동하는 태도를 보고 말을 듣고 예(禮)를 강론(講論)하니 피차가 뜻이 통하여 전혀 의심꺼리가 없었으니 이는 마음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이해 여름에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丙辰秋 特超三階 爲通政 升拜副提學

병진년(1496, 연산군 2) 가을에 세 품계를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었다.


丁巳春 拜承政院同副承旨 累升至左承旨 階加嘉善

정사년(1497, 연산군 3) 봄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戊午秋 出爲全羅道觀察使 冬以繼母病辭任 拜禮曺參判 兼 同知春秋館事 階升嘉靖

무오년(1498, 연산군 4) 가을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겨울에 계모(繼母)의 병으로 사임(辭任)하였다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兼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고, 품계는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되었다.


己未以聖節使 進賀皇朝 還拜慶尙道觀察使

기미년(1499, 연산군 5)에 성절사(聖節使)로 황조(皇朝 : 명나라)에 진하(進賀)하러 갔으며, 돌아와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庚申 拜同知中樞府事

경신년(1500, 연산군 6)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辛酉 轉刑吏兩曺參判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형조와 이조, 두 조(曺)의 참판에 옮겨졌다.


壬戌 爲京畿觀察使

임술년(1502, 연산군 8)에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癸亥春 特加資憲 除刑曺判書 兼 弘文館提學 知春秋館事 秋移判吏曺 餘如舊仍兼知義禁府事 都摠莩摠管

계해년(1503, 연산군 9) 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어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지춘추관사(兼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를 받았다. 가을에 이조판서에 옮겨졌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았으며, 이어서 겸 지의금부사도총부도총관(兼知義禁府事都摠莩摠管)에 임명되었다.


甲子夏 階加正憲 冬加崇政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에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고, 겨울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다.


乙丑秋 升崇祿 拜議政府右贊成 仍兼判吏曺 餘如舊時

을축년(1505, 연산군 11) 가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고, 그대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았다.


主心昏荒 朝政紊舛 自甲子夏 罪網高張 人鮮得脫 追罪大臣 臺諫之言 事讜切者 誅竄殆盡 雖細民 一觸時禁 竝處顯戮 大小遑遑 重足以待 公爲推官 務從寬緩 凡可以盡吾心者 無不極力 頼公全活者亦多

당시에 임금(연산군)의 마음이 혼미하고 황량하여 조정의 정사(政事)가 문란하였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부터 죄의 그물을 높이 펼쳐서 소급해서 치죄(治罪)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신(大臣)과 대간(臺諫) 중에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찬배(竄配)하였으며, 하찮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일단 당시의 금령(禁令)을 범하기만 하면 모두 공개적으로 처벌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워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공이 추관(推官)이 되어 될 수 있으면 너그러운 쪽으로 처리하여 내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경우에는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의 덕을 보아 온전히 살아난 자도 많았다.


丙寅二月 丁繼母憂 時短喪制 違者罪重 五月制盡 還授右贊成懼違時制 不得守情 七月 升拜右議政 九月 翊聖主登大位 卽乞身守服 聖上以弊政之餘 凡改紀之事 施措之方 當與大臣共圖 勉留輔政 賜表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 升左議政 封永嘉府院君

병인년(1506, 연산군 12) 2월에 계모의 상(喪)을 당했는데, 당시에 단상제(短喪制)를 어긴 자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단상복제가 끝나자 다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하였는데, 당시의 단상제도를 어기는 것이 두려워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였다. 7월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9월에 성주(聖主 : 중종)를 도와서 대위(大位)에 등극하도록 하고 즉시 벼슬에서 물러나 거상(居喪)하였다. 성상(聖上)이 폐해가 많은 정치의 여파로 무릇 개혁하는 일과 조치할 방도를 마땅히 대신과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힘써 만류하여 정사를 돕게 하고,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하였다.


公更乞解官終喪 哀懇不已 始蒙允許

공이 다시 관직을 벗고 계모의 삼년상을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슬프고 간절한 청을 그치지 아니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戊辰夏 服闋 復封府院君 兼 領經筵事

무진년(1508, 중종 3) 여름에 삼년상을 마치자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다.


己巳夏 考試文科 殿試 取金正國等十八人

기사년(1509, 중종 4) 여름에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考試)하여 김정국(金正國) 등 18인을 뽑았다.


庚午春 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勳封如舊 考試文科 殿試 取李膂等三十三人

경오년(1510, 중종 5) 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에 임명되었으며, 훈봉(勳封)은 예전과 같았다. 문과 전시를 고시하여 이려(李膂) 등 33인을 뽑았다.


辛未春 考試文科 殿試 取姜台壽等十六人

신미년(1511, 중종 6) 봄에 문과전시를 고시하여 강태수(姜台壽) 등 16인을 뽑았다.


壬申春 遘疾 累月不瘳 再上疏辭職 不允 仍給由 遣內醫常處左右救藥 又數遣承旨問疾

임신년(1512, 중종 7) 봄에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재차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어서 말미를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항상 곁에 거처하면서 치료하도록 하고, 또한 몇 차례 승지(承旨)를 보내어 병문안을 하였다.


公以久病在家 不受祿 上聞之 特命賜之

공이 오랫동안 병을 앓아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녹봉을 받지 않으니 임금께서 이 일을 듣고 특별히 명을 내려 하사하였다.


至七月 病革 初七日戊寅 夜絶纊 享年五十有六

7월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서 7일 무인일 밤에 절명(絶命)하니, 향년은 56세였다.


訃聞 上慟傷 輟朝三日 賻贈有加

부음(訃音)을 듣고 성상이 애통해하며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규정보다 더 많이 치부(致賻)하였다.


自公卿大夫 下至士庶 莫不哀悼 寮友之弔祭者日踵門 是年九月十三日甲申 開吉兆于陽川縣治南將軍所里乙坐辛向之原 遂窆焉

위로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애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문하고 제사하기 위해 오는 동료와 벗이 날마다 끊이지 않았다. 이해 9월 13일 갑신일에 양천현(陽川縣) 남쪽 장군소리(將軍所里) 을좌(乙坐 : 남동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 신향(辛向 : 북북서의 방향)의 언덕에 길지(吉地)를 열고 마침내 하관(下棺)하였다.


嗚呼哀哉 易名曰文敬稱也 公資性敏達 操履恭謹 友兄弟睦 親戚無不得其歡悰 以簡素自飭 不致飾服美 守心溫恕 與物無忤 早捷科第 敭歷三朝 莅事精幹 出入經帷臺閣 按節三道 踐履六卿 卒登台鉉 以佐聖主中興之治 世方倚以爲重而年未耳順 天奪之速 痛哉

아! 슬프도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고 하니 걸맞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민첩하고 행실이 공손하고 신중하며, 형제와 우애하고 친척과 화목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간략하고 소박함으로 스스로 단단히 경계하여 의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켜 사람들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3대의 임금을 두루 섬기는 동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요령이 있었다. 경연(經筵)과 대각(臺閣)을 출입하고, 삼도(三道)의 관찰사가 되었으며, 육경(六卿)의 자리를 거쳐 마침내 삼정승에 올랐으니, 성주(聖主 : 중중)의 중흥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이 한창 공을 의지하여 신망(信望)하였고 나이가 이순(耳順)이 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앗아가 버렸으니 애통하도다.

公配 乃軍器寺判官李季禧女 無子

공의 부인은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이계희(李季禧)의 딸로 자식이 없었다.


副室 有二男一女 男長曰渾 以勳蔭 授修義副尉副司勇 餘幼

측실(側室)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혼(渾)은 공훈을 세운 음덕(蔭德)으로 수의부위사용(修義副尉副司勇)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喪旣終 夫人追慕公 久而彌篤 凡爲公治後事 無不盡心 欲更竪石于神道 記公行治事業 垂示後來 乃介公之季弟僉知事壽卿 請碑銘于用漑曰 旣蒙幽堂之誌 幸卒其惠 俾亡人行迹 無昧於後 意甚哀切

상(喪)을 마치고 나서 부인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위해 훗날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시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고 공의 행적과 사업을 기록하여 후세에 드리워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공의 막내 동생 막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수경(壽卿)을 보내 나 용개(用漑)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여 말하였다. “이미 고인(故人)의 지석(誌石)을 지어주셨으니 부디 그 은혜를 마무리하여 고인의 행적이 후세에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소서.”그 뜻이 매우 애절하였다.


用漑自玉署忝僚之後 陪侍僚席非一再 得公之實甚詳 況蒙許可示心腹 不作崖岸 銘公之碑 義不敢辭 遂爲銘曰

나 용개가 옥서(玉署 : 홍문관)에서 동료로 지내게 된 뒤로부터 같은 관사(官司)에서 모시게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공의 실상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알고 더구나 항상 속마음을 보여주고 거리감을 두지 않는 은혜를 입었으니 공의 비명(碑銘)을 의리 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명(銘)을 지었다.


永嘉之金 영가(永嘉 : 안동)의 김씨는

根深而厚 뿌리가 깊고 두터우니
功積于先 선대(先代)에서 공을 쌓아

慶遠于後 후대에까지 복이 멀리 미쳤다.

生才與智 재주와 지혜를 타고나서

位亦大受 벼슬자리도 크게 받았으니

猗惟文敬 아! 문경공(文敬公)은
天富其有 하늘이 그의 소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明敏之資 명민(明敏)한 자질과

端謹之性 단정한 성품을

發以文學 문학으로써 발현하고

乃施於政 정사에 시행하였다.

 

宜小宜大 작은 일이나 큰일을 모두 합당하게 처리하되
不有厥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

顯敡樞要 주요한 관직을 두루 거쳐

望重名隆 명망이 두터웠다.

 

中遭屯否 중도에 어려운 시기를 만나

民苦疾威 백성이 학정(虐政)에 시달리니

國步將顚 나라의 운명이 전복(顚覆)되려 하고
宗祊失依 종묘와 사직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

 

天啓聖主 하늘이 성주(聖主)를 인도하여

代虐以寬 학정 대신에 너그러움으로 다스리게 하니

公能捧日 공이 임금을 받들어

轉危而安 위기를 전환하여 안정시켰다.

 

山河策勳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공적(功績)을 기록하고

台鉉著績 삼정승의 자리에서 뚜렷한 업적을 세우니

士有領袖 선비들은 지도자를 두었고
國倚柱石 나라는 주춧돌처럼 의지하였다.

 

無齡未耉 나이가 채 육십도 되지 않았는데

何不慗遺 어찌하여 남겨두지 않았단 말인가.

天理茫渺 하늘의 이치는 아득하니

予奪難知 목숨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알기 어렵도다.

 

芳名茂業 아름다운 이름과 성대한 업적은

不與身 몸과 함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銘玆貞珉 이 옥돌에 새겨서

庶垂永長 아마도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正德十二年丁丑三月 日 竪

정덕(正德) 12년인 정축년(1517, 중종 12) 3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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