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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軒記 -쌍계재 김뉴-김수온(金守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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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11-03 14:22 조회2,0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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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軒記 김수온(金守溫)
 
夫先王所以垂世立敎者。燦然備具。而其宏綱大節。則不過曰禮樂而已矣。然禮之爲之。自二之外。無慮數千餘家。而於沿革度數之變。殆無餘論矣。至於樂。其傳蓋寡。禮樂二者。相爲本末而體用。不可偏廢也。何後世之言禮樂者。獨於禮之詳而樂之缺如此乎。蓋樂者。聲音而已矣。而淸濁高下之謂也。是其體乎性情而爲之者也。淸濁高下之疾徐。豈言語文字之可載。而性情之發之妙。則又有如風之捕。如雷之追。雖使游,夏命文。班,馬操觚。亦不若之矣。蓋其人亡。則性情之道。亦隨而亡。而無怪乎古樂之不傳於今也。夫樂之聲。莫尙乎絲。而絲之聲。又莫尙乎琴。琴誠樂之者也。余於他藝。一不假矣。而竊於琴。樂之有年矣。朅來京師。得與金君子固爲友。金君則能琴者也。一日過其家。君命酒有間。乃囅然笑曰。小子今爲先生之癢。一枝之矣。於是。御銀甲促珠徽。爲鼓宮聲之數引。[油油乎若春雲之敷空。浩浩乎若薰風之拂野。忽然變之。揚而激之。則如迅霆驟雨。震蕩乎山岳。驚濤巨浪。蹴湧乎天地。]蓋使人辟易而毛豎也。然後皦如繹如。以至於一成。則又如[風恬而波定。天開而日曜。]其憂深思遠。則舜與文王孔子之遺音。而[淳古淡泊之旨。蓋在於唐虞三代之天矣。]噫。琴之道一至此乎。蓋子固之不數數於故法之拘。得之心。應之手者也。若夫哀而不傷。樂而不淫。則又本之吾心性情之正。故其形於聲音之譜者如此。初豈有其法之傳於誰某哉。其亦在乎自得而已矣。嗚呼。禮樂。一致也。禮本於敬。樂本於和。惟和與敬。卽此心之謂也。禮之不可不本於敬。猶樂之不可不本於和也。自堯舜而來。大而朝廷君臣之際。小而夫婦居室之間。何嘗一日而去禮樂哉。非不曰周旋拜俯。吾有文矣。然二帝三王禮樂致治之盛。終不復見。則豈非發於威儀度數之末者易爲禮。而本於精神心術之微者難爲樂乎。宜乎禮盛其傳。而樂傳之寡也。吾於子固氏。深有感也。余之椎鄙而得以司成均之藝。古者。司徒掌敎胄子。卽典樂之職也。於禮樂之汚隆。吾豈漠然哉。因釐吾說而錄之以爲子固之軒記云。
 
출처 拭疣集卷之二 식우집
 
금헌기(琴軒記) 김수온(金守溫)
 
무릇 선왕(先王)이 세상에 남기어 세운 교화는 찬란하고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대강령은 예(禮)와 악(樂)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에 대한 기록은 이대(二戴 대덕(戴德)ㆍ대성(戴聖)) 외에 무려 수천여 가(家)를 헤아릴 수 있으니, 그 연혁(沿革)도수(度數)의 변천에 있어서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되었는데, 악에 이르러는 전하는 기록이 아주 적다. 본시 예ㆍ악이란 두 가지가 서로 본말(本末)이 되고, 체(體)ㆍ용(用)이 되어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후세에 예ㆍ악을 말하는 이가 유독 예만 자상하게 하고 악은 빠뜨린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대개 악이란 성음(聲音)일 따름인데, 청탁(淸濁)ㆍ고하(高下)를 두고 이름이니, 이는 바로 성정(性情)을 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청탁ㆍ고하의 빠르고 느림을 어찌 언어나 문자로 형용할 수 있으며, 성정의 발하는 묘리는 또한 바람을 잡고 우레를 따라 가는 것 같아서 비록 자유(子遊)ㆍ자하(子夏)나 반고(班固)ㆍ사마천(司馬遷)더러
글월을 지으라 해도 역시 그대로 똑같이 형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개 그 사람이 없어지면 성정의 도(道)도 따라서 없어지는 것이니, 옛 악(樂)이 오늘에 전하지 않는 것을 괴이히 여길 것이 없다. 무릇 악의 소리는 사(絲 현악(絃樂))보다 더한 것이 없고, 사의 소리는 거문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거문고는 진실로 즐길 만한 것이다. 내가 다른 예술은 하나도 배울 겨를이 없었지만 유독 거문고에 있어서는 즐긴 적이 여러 해였다. 그러다 서울에 와서 김자고(金子固)군과 더불어 벗이 되었는데, 김군은 거문고에 능란하였다. 하루는 그 집을 찾아가니 김군은 술을 권하고 조금 있다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생이 지금 선생의 듣고자 하시는 것을 들려드리기 위하여 한번 타 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은갑(銀甲)을 손가락에 끼고 주휘(珠徽)를 죄어서 궁성(宮聲) 두어 가락을 타니, 봄 하늘의 구름이 뭉게뭉게 공중에 피어나는 듯하고 넘실넘실 훈훈한 바람이 들판을 스쳐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변하여
솟구쳐 올라서 빠른 뇌성과 소나기가 산악을 뒤흔드는 듯하고, 놀랜 파도와 큰 물결이 천지에 출렁거리는 듯하여, 대개 사람으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서 머리칼을 꼿꼿이 서게 한다. 차차 음절(音節)이 분명한 채 여운을 남기어[皦如繹如]주D-001 한 곡조를 마치고 나면 또 바람이 잠잠하고 물결이 가라앉으며 하늘이 개이고 햇볕이 빛나는 것 같으니, 그 근심이 깊고 생각이 먼 것은 순(舜)ㆍ문왕(文王)ㆍ공자(孔子)의 유음(遺音)인 동시에 숭고하고 담박한 맛주D-002이 대개 당우(唐虞)시대나 삼대(三代)시대의 천지에 있는 듯하다. 아, 거문고의 도가 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자고(子固)가 옛법에만 구애되지 않고 마음에 얻은 것이 손에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슬퍼해도 상(傷)하지 아니하고 즐거워도 음탕하지 않은 것은 또 내 마음의 성정의 바른 것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 성음(聲音)의 보(譜)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다. 어찌 처음부터 그 법이 어느 뉘게서 전해 받은 것이겠는가. 모두가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아, 예와 악은 한 곬이다. 예는 공경을 위주하고 악은 화평을 위주하는데, 그 화평과 공경은 바로 이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니, 예가 공경을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악이 화평을 위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요순(堯舜) 이래로 크게는 조정에서 군신의 사이에, 작게는 부부사이에 어찌 하루인들 예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누구나 앉고 서고 절하고 부복(俯伏)하는 데 있어 나는 문(文 절도(節度))을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지만,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이 예악으로 거룩한 정치를 이룬 것을 마침내 다시 볼 수 없는 즉, 어찌 예는 위의(威儀)도수(度數)의 말단에 나타나는 것이라 쉽고, 악은 정신 심술(心術)의 은미한 데 근본한 것이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예는 전하는 것이 많고 악은 전하는 것이 적게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자고씨에게 깊이 느낀 바 있다. 나는 비박(鄙薄)한 자질로 성균(成均)의 예(藝)를 맡아보고 있는데, 옛날엔 사도(司徒)가 주자(冑子)주D-003를 가르쳤으니 곧 악을 맡은 직이다. 그런즉 예ㆍ악의 성쇠에 있어 내가 어찌 막연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의 한 말을 간추려 기록해서 자고의 금헌(琴軒)에 기(記)를 하는 바이다
 
[주D-001]분명한 …… 남기어[皦如繹如]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온 말인데, 그 주에, “교여(皦如)는 음절(音節)이 분명하다는 말이고, 역여(繹如)는 음절이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주D-002]근심이 …… 담박한 맛 : 구양수(歐陽修)의 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3]주자(冑子) : 즉 국자(國子)로,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를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기(夔)여, 너를 명하여 악(樂)을 맡게 하노니 주자(冑子)를 가르쳐라[夔命汝典樂 敎冑子].” 하였다.
 
 
김수온[ 金守溫 ]
1410(태종 10) ~ 1481(성종 1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동.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 식우(拭疣). 아버지는 증영의정 훈(訓)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1457년(세조 3) 성균사예로서 문과중시에 2등으로 급제, 청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을 하사받았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세종 때 수양대군 · 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信尾)의 동생으로 불경에 달통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 · 육경(六經)에 해박하여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써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성삼문(成三門) · 신숙주(申叔舟) · 이석형(李石亨)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문명을 겨루었으며, 그의 특징은 산문은 웅방호건(雄妨毫健)해서 도도한 기운이 넘쳤고, 시(詩)는 자유분방해서 압운(押韻)의 구속을 벗어나기도 했다.
 
《치평요람(治平要覧)》 · 《의방유치(醫方類聚)》 등의 편찬, 《석가보(釋迦譜)의 증수》, 《명황계감(明皇誠鑑)》 · 《금강경》 등의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식우집》이 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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