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유적 답사시 들려볼만한 곳, 충주 오량리 양천허씨 문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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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4-11-05 15:17 조회2,488회 댓글1건본문
∎충주유적 답사시 들려볼만한 곳, 충주 오량리 양천허씨 문화 유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는 조선 시대의 문신 허한(許僩 1574~1642)과 그의 아들인 허적(許積 1610~1680)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사우(祠宇)와 묘소(墓所)가 있다. 또 부자의 모습을 각각 그린 두 폭의 영정이 충북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양천허씨 영당에 보관하고 있다.
향오공(香塢公) 허한의 배위는 안동김씨로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 1525-1592)의 따님이며, 묵재공(默齋公) 허적은 외숙 참판 김시헌(金時獻 1560-1613) 집에서 자랐다.
∎허한(許僩, 1574-1642)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의보(毅甫), 호는 행오(杏塢) 또는 향오(香塢)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지중추부사 한천(寒泉) 허잠(許潛)의 셋째 아들이자 허적의 아버지이며, 인현왕후의 할아버지인 민광훈의 외삼촌이다.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보은 현감, 예천군수(醴泉郡守)를 거쳐 이천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허적(許積, 1610-1680)은 자(字)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또는 휴옹(休翁),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조선시대 문신, 학자, 정치인으로 남인 온건파의 지도자였으며 탁남의 영수였다. 1637년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였다.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의 주요 논객으로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하여 서인들과 맞섰으며, 제2차 예송논쟁에서는 인선왕후를 맏며느리의 예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채택시키고 집권하였다.
서인 송시열의 사형을 놓고 남인 내에서 여론이 갈라졌을 때 온건론을 폈으며, 강경파인 윤선도, 윤휴, 허목의 주장에 맞서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안마와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1680년 3월 할아버지 허잠이 시호를 추증받은 것을 기념하면서, 왕실, 예조의 허락 없이 유악(帷幄)을 빌려쓴 것이 화가 되어, 그해 4월 서자 허견의 여러가지 비행과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1795년(정조 20년)에 정조의 특명으로 신원되었는데 당색으로는 남인이었지만 서인 민광훈의 처조카이자 서인 중진인 민유중, 민정중의 외종숙이기도 했다. 한강 정구, 장현광, 이민구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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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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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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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청룡사지 가는 길에 능선에 묘지가 위치해 있습니다.
영당은 소재지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