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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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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4-11-25 07:12 조회2,34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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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1

■ 일시 : 2014년 11월 16일(일요일)
지역 : 익원공파 문정공계 충북 엄정지역(참판공 휘 愼 외)
참석 : 15명(無順, 경칭 생략) - 영국, 영환, 영윤, 재영, 윤만, 은회, 태우, 태영, 태철, 수목, 윤식, 춘식, 완식(안동김씨충주문중회 회장), 경식, 용주

안사연(안동김씨역사연구회)에서는 창립 13주년을 맞이하여 2014년 11월 16일(일요일) 충북 엄정의 참판공(휘 愼), 목사공(휘 繼賢), 통제사공(휘 逷) 등 익원공파 문정공계 부사공(府使公 : 휘 智童) 후손 묘역을 비롯해 혼맥으로 이어진 허한(許僩) 선생 등 충주시 소태면의 양천허씨 묘역과 인근 청룡사지(靑龍寺址), 억정사지(億政寺址), 원주 부론면의 거돈사지(居頓寺址) 등을 답사하였습니다. 이번 답사 역시 안사연 주요사업 중 하나로서 우리 문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선조의 업적을 찾아 현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08:00시 정각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한 일행은 중부고속도로에 올라 08:50분 여주휴게소에 도착, 20분간 휴식을 취한 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충주IC(충주ㆍ노은IC)로 빠져나와 답사지역인 엄정으로 향했습니다.


▲ 청룡사지 가는 길

늦가을 남한강 풍경을 만끽하며 달리다가 청룡사 이정표를 끼고 좌회전,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갑니다. 차가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산 속에 옴폭 들어앉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옛날에는 발길 닿기 어려운 별천지였을 것 같습니다. 산을 다 내려오자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 나타납니다. 중심지를 조금 지나자 별묘리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허한 선생과 허적 선생 영정을 모신 별묘(別廟)가 있는 곳이라 마을 이름도 별묘리(別廟里)라고 한답니다. 그곳에서 10분 정도 산길을 더 달려 10:00시경 약속장소인 청룡사지(靑龍寺址)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원에서 출발한 참의공문중 종인 네 분이 근 한 시간 전부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완식 안동김씨 충주문중회 회장이 합류하고, 때마침 청룡사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해설사 박 선생이 출근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음 맛보기로 완식 회장에게서 청룡사지 전설을 듣고, 박 선생의 안내를 받아 청룡사지를 본격적으로 둘러봅니다. 청룡사지(소태면 오량리)는 고려시대 절터로 지금은 건물이 다 무너지고, 근래에 세운 청룡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습니다.


▲ 청룡사지 주차장에서 합류한 일행


▲ 청룡사지 해설사 박 선생. 안내판에 보각국사 부도탑 등이 표시돼 있다.

 

청룡사 보각국사탑비에서 익원공(휘 士衡) 휘자(諱字)를 친견하다

청룡사가 자리잡은 곳은 충주지역 명산인 청계산 중턱입니다. 여말선초의 고승 보각국사(1320년∼1392년)가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은거하자 조선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큰 사찰을 건립하도록 했답니다. 지금은 폐허로 변한 채 부도밭 자리에 남은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석등, 정혜원융탑비만 남아 웅장했던 옛 모습을 전합니다. 청룡사 터는 안내판 오른쪽에 있는 밭인데, 현재 개인 소유라고 합니다.


▲ 청룡사 터. 드문드문 석축이 남아 있다.

청룡사지 전설
어느 스님이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그만 여의주를 놓쳐 한 마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여의주를 좇아 청계산 자락으로 내려왔답니다. 그 스님이 여의주가 떨어져 광채가 나는 곳으로 찾아가 보니 여의주는 온데간데없었는데, 지세를 살펴보니 용맥의 꼬리에 해당하는 지점이 천하 명당이라 이곳에 암자를 지었답니다. 이것이 청룡사의 창건 설화입니다.
조선 말엽 민씨 세력이 득세를 할 무렵, 청룡사 인근 명당에 민씨가 사랑하는 애첩의 무덤을 쓰기 위해 비밀리에 주지와 결탁해서 절에 불을 질러 폐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절 지붕에 살던 큰 뱀이 내려와 불을 지른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니 한 사람은 피를 토하며 죽고,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주지도 달아나다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애첩 산소에 벌초를 하거나 성묘하러 오는 사람까지도 생명을 잃거나 흉사를 당해 발길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청룡사의 옛 부도밭 자리를 향해 몇 발짝 옮기자마자 ‘충주 청룡사 위전비(忠州 靑龍寺 位田碑)’가 나타납니다. 2m가 넘는 큰 비석으로 청룡사에 전답을 기증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ㆍ수량이 적혀 있습니다. 특히 두세 차례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이 있어 여러 차례에 걸쳐 청룡사가 보수되거나 중건된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절이 폐사지로 변하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잠시 위전비를 살펴본 뒤 그 위쪽에 자리한 보각국사탑비로 자리를 옮깁니다.


▲ 위전비. 부도밭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다.

위전비 바로 뒤에 종 모양의 거대한 부도 1기와 몸체가 없이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은 또 다른 부도 1기가 남아 있습니다. 종 모양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부도라고 하는데, 몸체 전면부에 글자를 새긴 흔적이 보인다고 합니다.

▲ 종 모양의 부도탑과 일부 석재만 남은 부도탑


▲ 종 모양의 부도탑. 희미하게 글자가 보인다.

그 뒤로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보각국사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각국사는 풍양조씨 조지란(趙之蘭) 선생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선생, 어머니는 청주경씨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충주지역 벌족의 후예로 짐작됩니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륭(定慧圓融)입니다. 어머니 청주경씨의 권유로 13세에 계송(繼松) 대선사에게서 공부를 시작해 1341년(충혜왕 후2년) 22세의 나이로 승과 선종선에 급제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법에 전념해 훗날 선종의 경전에 두루 통달했다고 합니다. 나옹화상을 비롯한 불교계 선승은 물론 목은 이색 선생과 도은 이숭인 선생 등 동시대 유학자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는 등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축하 표문을 올린 뒤 그 해 9월 18일 이곳 청룡사에서 문인에게 유서를 쓰게 한 다음 입적했다고 합니다.

▲ 보각국사 부도탑. 뒤에서부터 보각국사탑비, 부도탑, 석등 

이때 조선 태조가 왕명으로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리면서 양촌 권근 선생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했습니다. 이 비석이 보물 제658호인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입니다.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직사각형의 거대한 몸돌을 올려놓았는데, 표면을 잘 다듬어 앞뒷면에 정연한 해서(楷書)로 적었습니다. 몸돌 위에는 머릿돌을 얹지 않고, 양쪽 모서리를 귀접이 형태로 다듬어 마치 거대한 묘지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바로 이 비 뒷면 중하단에 “우바새(優婆塞) …… 문하우시중 김사형(門下右侍中 金士衡) ……”이라 적혀 있어 더욱 눈길을 끕니다. 이 비석은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왕명에 의해 희달(希達) 선사가 세운 것으로 비문은 양촌 권근 선생이 짓고, 글씨는 천택 스님 필적입니다.


▲ 보각국사탑비. 익원공 휘가 음기 중하단에 적혀 있다.

 

이 비석 앞에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과 석등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처럼 석등 뒤에 부도탑을 세우고, 그 뒤에 비석을 배치하는 양식이 조선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예라고 합니다.


▲ 보각국사 부도탑

부도탑의 정식 명칭은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定慧圓融塔)’으로 국보 제197호입니다. 두어 길 크기의 거대한 부도라 범상치 않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유독 이것만 국보인지라 무언가 다른 점이 있나 봅니다. 박 선생 해설로는 이렇습니다. 맨 아래 바닥돌을 8각으로 조성하고, 그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을 얹어 기단을 만든 다음 다시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상륜부를 얹었다고 합니다. 바닥돌은 별다른 장식 없이 8각으로만 다듬어 보는 이의 눈길을 끌지 않는데, 화려한 장식을 베푼 위쪽과 대비될 뿐만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제 역할을 다해서 오히려 보기 편했습니다.
3층으로 이루어진 기단 부분은 설명을 들으니 정말 정교한 조각 솜씨입니다. 아래 받침돌은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겨 넣고, 가운데 돌에는 사자와 구름에 휩싸인 용을 번갈아 가며 빙 둘러 새겼습니다. 위쪽 받침돌에는 아래 받침돌과 똑같은 연꽃무늬를 반대 형태로 새겨서 서로 대칭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몸돌의 장식은 둥글둥글 마모되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8면에 빙 둘러 무기를 들고 서 있는 8부중상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면과 면 사이에 돋을새김으로 장식한 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어서 용틀임을 하는 자세가 역동적이라고 합니다. 조선 초에 이 장식들이 날카롭게 새겨졌을 때를 상상하니 지금도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베일 것만 같네요.


▲ 아래 받침돌. 연꽃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 가운데 받침돌. 구름에 싸인 용 문양(위)과 사자상(아래)을 번갈아 가며 8면에 빙 둘러 새겼다.


▲ 위쪽 받침돌. 연꽃무늬를 아래 받침돌과 대칭이 되게 새겼다.


▲ 부도탑의 몸돌


▲ 몸돌 8면에 새긴 8부중상과 모서리 기둥에 용이 서린 모양을 정교하게 새겼다. 오랜 세월의 풍파로 깎여 나가 둥글둥글해졌다.

지붕돌은 겹처마 형태의 한옥 모지붕과 같은데, 여덟 귀퉁이가 높이 들려 있어 마치 기와집 처마 밑에서 그 고운 곡선을 올려다보는 듯합니다. 아마도 여말선초의 한옥 살림집도 이러했겠지요? 서까래를 표현할 자리에는 역시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맨 위 상륜부에는 4면에 태극문양을 새겼습니다.


▲ 한옥의 겹처마 형태에 연꽃무늬를 새겨 아름답기 그지없다.


▲ 상륜부의 태극문양. 4면에 빙 둘러 새겼다.

부도탑 앞 석등은 보각국사 부도탑의 장엄품(莊嚴品)으로 조성된 것인데, 본래 명칭은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 사자석등(靑龍寺 普覺國師 定慧圓融塔前 獅子石燈)’으로 좀 깁니다. 보물 제656호입니다. 모두 4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사각형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사자상과 화사석, 지붕돌을 차례로 쌓아올렸습니다. 특이하게 사자상과 석등 받침은 한 덩어리 돌로 다듬었습니다. 해설사 박 선생의 설명으로는 신라나 고려처럼 불교가 흥성했던 시대에는 사자상 크기가 웅장한데 이 사자상은 크기도 줄어들고 조각기법도 위축되었다고 합니다. 석등의 형태도 신라나 고려는 8각인데 조선시대에는 4각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가 조선 초기 석등의 기본형태로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랍니다. 부도탑과 석등 사이에 배례석으로 보이는 직사각형의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자리 배치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합니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배례석으로 사용하려면 꽤나 불편해 보입니다. 해설사 박 선생의 설명으로는 아마도 제 위치가 아닌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 석등. 사자의 크기가 고려시대보다 작아졌다.


▲ 배례석으로 추정되는 돌

아참! 깜빡 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잔디를 깔았는데 참 보기 좋았답니다. 그런데 자꾸 습기가 차서 석물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보각국사탑비 하단부가 박리처럼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했답니다. 그래서 잔디를 걷어내고 자갈을 깔았더니 그런 현상이 없어졌다고 하네요. 우리 선대 묘역의 석물 관리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 표면이 얇게 떨어져 나간 박리현상. 습기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각국사 부도탑과 익원공 휘자를 살펴본 뒤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해설사 박 선생과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10:51분 청룡사지 아래쪽 양천허씨 묘역으로 이동합니다. 가까운 곳이라 차로 불과 2분 거리입니다. 양천허씨 묘역 답사는 제2편에서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앞줄 왼쪽부터) 태우, 태영, 영환, 용주, 윤식
    (뒷줄 왼쪽부터) 태철, 경식, 은회, 재영, 영국, 영윤, 춘식, 완식, 수목(泰 항)
    (맨 뒤) 윤만

 

사진 윤만, 윤식 / 글 윤식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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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단체사진 충간위 카페에 올려놨습니다.
필요하신 분 다운 받으세요.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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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다녀 가셨는지 이제서야 지면으로 인사 드립니다.
꼼꼼히 기록을 잘하셨습니다.
다음 편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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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덕분에 즐거운 나들이에, 몰랐던 집안 이야기 많이 배웠습니다.
늦게 보고드려 송구합니다.